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영화<이터널 선샤인>

기억에 대한 담론

미셸 공드리 감독의 작품 모두 좋아하지만, 그 중에서도 내게 최고의 작품(현재까지)은 <이터널 선샤인>이다.



이 영화의 장르는, 멜로드라마이자 SF다. 즉, 평범한 멜로드라마가 아닌 '판타지 멜로드라마'이다. 2004년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 조엘은 출근길에 우발적으로 기차를 타고, 거기에서 파란 머리카락의 여인 클레멘타인을 만난다. 그들의 만남은 분명히 '첫 만남'으로 보여진다. 조엘은 어색해하고, 적극적인 클레멘타인 덕분에 둘의 관계는 발전해간다. 좋은 조짐이 보인다. 그런데, 다음 신에서 조엘은 대성통곡을 한다. 분명, 좋아보였던 남녀인데 금세 헤어지기라도 한 걸까?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조엘은 울어댄다. 그리고 다음. 클레멘타인을 깨우는 조엘. 클레멘타인은 조엘의 집에 가도 되냐면서 자신의 집에서 칫솔을 가지고 나오겠다고 한다. 처음 만난 남녀 같지 않게 자연스러운 둘의 모습이다.


각각의 장면들이 순차적인 것만은 아님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렇게, 조각이 이어지는 듯한 장면들은 편집과 가공을 반복한다. 그렇다. <이터널 선샤인>은 구성 자체가 흩어진 퍼즐조각들과 닮아있다.


사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오래된 연인이었다. 대부분의 연인들이 그러하듯, 권태가 찾아오고 싸움도 잦아졌던 그들이다. 음식점에서 말 없이 식사를 하고, 연락이 닿지 않을 때에는 상대를 의심한다. 의심이 오해가 되면서 싸움이 생기고 그렇게 관계가 식어간다. 어찌됐든 이별은 슬프다. 이별이 슬픈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대부분이 사랑을 나누는 당사자들 간의 추억 때문일 것이다. 추억이란 단어는, 통상적으로 좋았던 부분을 아우르곤 하는데 우리가 경험은 좋고나쁨 모두가 어우러져 있다. 연인 사이에서도 물론 그렇다. 이별이 슬픈 가장 큰 이유는, 좋았던 추억들과 그와 닮은 앞으로의 경험들을 헤어진 상대와 다시 할 수 없다는 데에서 오는 '상실감' 때문(사견이다) 아닐까?


어쨌든, 이별을 견디지 못해서 혹은 조엘이라는, 그리고 그와의 관계 모두를 삶에서 덜어내고 싶어서였는지 클레멘타인은 '기억 지우기'를 감행한다. 클레멘타인의 기억 속에는 더 이상 조엘이라는 과거의 인물은 없다. 기억이 사라졌기에, 이별에 슬퍼하는 인물은 조엘 뿐이다. 그래서 조엘은 그렇게 대성통곡했고, 그 또한 이별의 아픔에서 벗어나고자 클레멘타인이라는 인물, 그녀와의 기억 모두를 삭제하기로 결심한다.


영화의 대부분은, 사라져가는 조엘의 기억 속 클레멘타인과의 관계로 채워져 있다. 가장 최근의 기억에서부터 먼 기억으로 지워져나가는 과정을 통해, 비로소 우리는 그들의 관계를 알아가게 된다. 우리가 보는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관계는 조엘의 현재가 아니다. 현재에서 보여지는 기억을 지우기 프로젝트에 동참한 사람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좀 더 직설적인 '기억에 대한 메시지'를 듣게 된다. 매리는 니체의 잠언 "망각한 자는 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라."를 반복하면서 우리들에게 망각에 대해 사색하게끔 만든다.



'실수조차 잊는 것'은 과연 좋은 것일까? 니체는 더 나은 인간, 진화하기 위해서는 망각이 필수불가결하다고 말했다. "과거의 기억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으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은 새로운 것을 낯선 것, 불편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결국 변화보다 불변, 차이보다 동일성에 의존하게 된다."라는 말과 함께…, 결국, 클레멘타인과 조엘의 연애 속에 권태와 싸움이 침범하게 된 이유 또한 '기억 때문'일 수 있다. 의심은 상대 혹은 나의 '과거 언행' 혹은 '관념' 때문에 불거지는 것이며, 권태롭다는 느낌 또한 '과거와의 비교'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기억(과거)에 대한 의존은 위험하다.


그렇다면, 기억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은 좋은 것일까? 물론, 그것 또한 나쁘다. 무엇이든 극단적인 것은 좋지 않다. 클레멘타인과의 추억을 지우겠다고 결심한 조엘 역시, 그녀와의 행복했던 순간들이 지워질 때는 괴로워한다. 이렇듯, 사랑은 마냥 좋은 것들로만 채워질 수 없는 법이다. 나아가, 우리의 인생 또한 마찬가지다. 희로애락이 어우러진 것이 삶의, 사랑의 온전한 형태이며 우리가 피해야 할 것은 자·타와의 갈등과 그것으로부터 빚어진 슬픔이 아닌 '과거(기억과 낡은 인습 등)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것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진정한 자유만이 우리의 삶을 더욱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


클레멘타인에 대한 조엘의 기억이 완전히 사라진 후, 오히려 영화는 그 이후의 짧게 비춰지는 장면들을 통해 '로맨틱함을 배가'시킨다. 서로의 기억이 휘발된 두 남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재회(그들의 관계는 운명적이다)'한다. 그리고, 앞으로 올 갈등과 이별에 대해 '기억에 의존해' 겁을 먹는 클레멘타인과는 달리 조엘은 '괜찮다'고 말한다. 즉, 조엘은 기억으로부터의 해방(자유)을 각오한 것이다. 앞날의 경험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며 예측은 가능하나 그것은 정답이 아니다. <이터널 선샤인>은, 사랑에 초점을 둔 멜로드라마이지만 '기억'이라는 소재를 활용해 우리가 삶을 대하는 방식에 대한 메시지도 함축하고 있다. 다시 봐도 참 좋은 영화였고, 매너리즘에 빠져있었던 나의 생활에 망치질을 해주어서 더욱 좋았다. 로맥틱한 동시에 먹먹함을 선사하는 <이터널 선샤인>은 달콤쌉싸름한 작품이다.



- 클레멘타인의 머리카락 색으로 알 수 있는 시점

BLUE: 현재의 만남

RED: 과거, 클레멘타인과 조엘의 연애기

GREEN: 과거, 클레멘타인과 조엘의 첫 만남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브루클린의 멋진 주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