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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클로저>

스치듯 지나간 사랑들이 떠올라

지나치게 현실적이어서 볼 때마다 가슴 아픈 영화<클로저>. 사랑을 한 마디로 정의내릴 수 없지만, 이 영화는 많은 부분에서 우리의 공감대를 자극한다. 설렘, 열정, 온기와 배신, 이별 등의 한기, 나아가 모든 것이 휘발되기까지에 이르는 사랑. 결국, 사랑이 종착역에 이르게 되면 어찌됐든 고통을 겪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금 사랑을 '본능적으로' 찾아나선다. 또다시 아플 걸 알지만, 그보다는 사랑의 시작에서 지속 단계에서 느끼는 감정이 더 훌륭하기 때문이다.


낯선 사람을 우연히 만나 사랑하게 되고, 가장 가까웠던, 심지어 절대 떨어지려 하지 않았던 둘 사이가 한순간에 변질되는 것. 우리는 이러한 사랑의 패턴을 현실에서도 충분히 겪어왔고 현재에도 겪고 있으며 앞으로도 겪게 될 것이다. 과연 '영원한 사랑'의 존재에 대한 질문은 인류가 지속되는 한 영원히 펼쳐질 듯 하다.



국경은 물론, 심지어 신분조차 뚜렷하지 않은 이와 사랑에 빠지고 '사랑스럽다'고 말하면서도, 행동하면서도 다른 이와 사랑에 빠지는 우리들. 어이없기도 하고, 멀리서 바라보는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우리들의 연애사. 영화<클로저>는 이러한 모습들은 냉소적으로 그려낸다. 첫눈에 반하는 사랑, 로맨틱한 순간들, 다른 이에게 느껴지는 사랑의 감정, 이별의 예감 등 사랑의 다양한 코드를 읽을 수 있는 <클로저>는 '어른들의 로맨스'다. 그들은 오래토록 만나온 연인의 행동에 담담하게 대처한다. 이미 겪어 볼 만큼 겪어 본 이들의 로맨스는 확실히 매혹적이다.



<클로저>는 많은 관객들에게 사랑받는 작품이다. 하나의 작품을 감상함에도 불구하고 '언제 보느냐'에 따라 다른 관점을 표현하는 모습들만 봐도 이 영화가 '매력적인 작품'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20대 초반(이성과의 사랑경험이 다소 부족한 때)에 볼 때는 '이해가 안 됐던' 작품이, 20대 후반, 30대, 그 이상으로 갈수록 '마치 나의 이야기'같은 작품이랄까. 이미 우리가 겪고 있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클로저>에 끊임없이 빠져있는 이유는, 이 영화가 연애와 이별을 반복하는 우리들에게 '괜찮다'며 공감과 위로를 전해주기 때문일테다.


댄: 사랑해.

앨리스: 어디있어?

댄: 뭐?

앨리스: 보여줘. 사랑이 어디 있어? 볼 수도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어.

몇 마디 말은 들리지만 그렇게 쉬운 말들은 공허할 뿐이야. 뭐라고 말하든 이젠 늦었어.



할 때는 열렬하지만, 끝이 나면 공허함만 남는 사랑.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낯선 이와의 감정이 사랑이라면, 사랑의 존재 자체가 무의미하고 허망해져버릴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을 갈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에 끊임없이 순간의 충동과 허망함의 감정을 타인과 나누고 있다.



물론, 영화의 OSTDamien Rice'The Blower's Daughter'는 <클로저>를 논할 때 절대 빠지지 않는 매력요소다. 사진으로써 삶을 왜곡하는 것처럼, 우리는 사랑을 단지 '아름다운 것'이라며 미화하기 일쑤다. 과연 사랑은 '아름다운 것'일까. 슬픈 질문이겠지만, 우리는 모두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위해 반복되는 사랑을 경험할 뿐이다. 낯선 이와 나누는 왜곡(미화)된 무언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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