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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 감독 영화 <피에타>


영화 <피에타>는 자본의 권력과 이면을 다룬다. 따라서 가장 현대적인 이야기의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다뤄지는 문명은 자본이다. 사실, 감독은 지속적으로 자본의 욕망이 지닌 야만적인 면을 다뤄왔다. 문명의 외피를 입은 자본은 육체에 대한 야만성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기계화로 연결된다. 따라서, 정신적 고귀함은 휘발된다. 


영화에서의 육체는 자연적인 것으로부터 발생한다. 주인공 '강도'는, 태어나자마자 부모로부터 버림받았다. 이어,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버림받는다. 영화의 배경인 청계천 기계공구상가들은, 후기자본주의에 걸맞은 환경 하에서 버림받는 사람들의 집단이다. 그들을 둘러싼 것들은 현대 문명의 쓰레기들이다. 기계로 인해 잘려나가는 그들의 육체는 미쳐갈 수밖에 없다. 이 잔인한 사회를, 감독은 잔인하게, 날 것 그대로 보여준다.


시청각 이상으로 섬뜩한 분위기와 잔혹한 캐릭터들의 행위는, 현 시대의 야만성을 통감하게 만든다. 영화가 끝으로 다다를 때면, 서서히 감독의 의도가 드러난다. '자본이 강조된 사회는 이토록 잔인하다. 우리는 자본 이전의 근원적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근원적인 사랑과 자연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의도다.


결국, <피에타>에서 벌어지는 가학과 피학 등의 폭력은, 정신적인 것들에 이르기 위한 발버둥이다. 강도는 치열하게 나쁜 놈으로 비춰지지만, 사실 그의 본질 깊은 곳에서는 선함이 자리잡고 있다. 강도를 고용한 고리대금업 사장은 자본의 악을 최대한으로 품은 인물이다. 강도는 그의 하수인일 뿐이다. 강도는 자신의 감정을 읽고 청부업을 관두려고까지 한다. 강도의 선한 본심이 영화의 전면에 등장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데에는, 그의 엄마라(라고 주장하는) '미선'이 나타나면서부터다.  그녀는 사실, 아들의 복수를 위해 강도에게 접근한 인물이다. 강도는 사랑을 박탈당하고 허위와 위선, 폭력으로 얼룩져있다. 그런 그에게 미선이 복수의 창구로 '활용'한 건, 모성애다.



모성애는 '정신'이다. 이는, 온갖 물질, 폭력적인 것들. 즉, 자본에 물든 악한 것들을 이기는 것이 정신임을 말해준다. 미선의 출현 장면에서 극명하게 보여지는 상징들은 '종교적인 것'들이다. 강도의 집 창밖으로 보이는 건물 외벽에는 '할렐루야는 영원하리라'는 문구가 쓰여있고, 또한 십자가를 볼 수 있다. 이는, 인간적인 문제와 함께 종교적인 구원을 상징한다.


<피에타>에서 두드러지는 '모성애'는 직접적인 이미지들로 표현된다. 살을 먹는 행위, 여성의 가슴에 칼을 던지는 행위 등은, 원초적 회귀에 대한 극단적인 표현이다. 이 과정들을 거쳐, 강도를 둘러싸고 있던 악의 기질을 사라지기 시작한다. 날 것만 먹던 강도가 날 것을 먹지 않고, 미선이 건넨 장어도 먹지 않는다. 나아가, 타인을 손을 절단해야만 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갈등하고, 끝내 절단하지 않는다. 미선을 통해 안식처를 찾은 강도의 변화는 우리 삶에 있어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이 영화의 묘미는 '반전'에 있다. 현 시대에서는, 개인의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악을 행해야만 한다. 이기적인 것들을 만연해 있는 사회는 비판받아 마땅한 공간이다. 문명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은 육체로 그것들을 이겨내야만 한다. 온갖 절망과 고립으로 몸을 휘감는 것도 모자라,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는, 아니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자본으로부터 버려진 이들이다.


<피에타>는, 자본으로 인해 죽음을 당하거나 선택한 사람들에 대한 위로문으로 볼 수도 있겠다. 이 영화가 잔인한가? 그보다 더 잔인한 '현실'이 있다. 감독은 영화를 통해, 이 끔찍한 사실을 날 것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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