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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철원기행>

고립과 단절로 얼룩진 가족의 초상


여기, 고립과 단절로 얼룩진 가족이 있다. 고등학교 선생님이었던 아버지의 정년 퇴임식에 참석하기 위해, 흩어져 살던 가족들은 철원에서 모인다. 쓸쓸하고 단출하기 짝이 없는 퇴임식 풍경부터, 영화가 그려낼 이야기를 짐작케 만든다. 어설픈 자세와 표정으로 사진을 찍고 낡은 중국집에서 한 끼 때우는 것으로 퇴임식을 기념하는 가족들. 이들의 모습은, 냉혹한 날씨 만큼이나 냉랭하다. 그 기운을 몰아 아버지는 "이혼하기로 했다."는 한 마디로 모임의 분위기를 더욱 싸늘하게 만든다. 식사를 마친 가족들은 아버지의 관사로 향한다. 각자 집으로 향하려던 가족들은 눈 때문에 버스 운행이 중단된 탓으로 2박 3일 간 함께 지낸다.



일방적인 이혼 통보를 받은 어머니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을 테고, 그 이야기를 들은 가족들도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간 어떠한 사건사고도 없어'보였던' 부부(부모)관계가 한 순간에 깨질 지경이니, 가정 내에서는 큰 사건일 수밖에 없다. 이유도, 영문도 모른 채 부부의 관계는 끝맺음될 예정이고, 자식들은 저마다의 고민과 부모의 사건을 연관지으며 이기적인 생각에 휩싸여있을 뿐이다.


<철원기행>은 다분히 상징적인 작품이다. 온화하고 따스하다기보단 단절에 익숙한 가정의 분위기에 걸맞게, 배경은 눈으로 뒤덮인 철원으로 선택된다. 눈 때문에 '고립'된 가족의 상태는, 이 가정의 모습과 닮아있다. 그들의 몸과 마음은 묶여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가슴이 답답하다'며 한숨을 내쉰다. 이 불편한 분위기 속에서 자식들과 며느리는 서로의 눈치를 살피기 바쁘다. 각자 처한 상황에 대해 묻고 걱정하기보다는, 어떻게든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바람이 더 커보인다.


유일하게 화목해'보이는' 장면은, 가족이 떠나는 날 아버지가 끓인 라면을 다함께 먹는 장면이다. 맛있게 끓인 라면 한 끼가 이들이 다같이 모여 나눈 마지막 온화함이다. 그렇게 눈 덮인 고립의 공간에서 벗어난 가족들은 또다시 뿔뿔이 흩어질 것이다. 이제 부부는 완전히 분리될 것이다.



새하얀 설경 위에서 새카만 외투를 입고 힘겹게 눈을 밞아나가는 가족들의 모습을 비추는 신(scene)이 잊히지 않는다. 우리는, 가장 가까워야 할 가족을 잘 모른다. 어쩌면 다른 사람들을 더 챙기고 그들을 더 잘 안다. 가까운 사이라는 이유만으로, '당연히, 늘 함께할 것'이라는 안이한 태도 때문에, 우리는 가족 간의 관계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고립과 단절로 점철된 한 가정사를 통해, 나의 가정을 돌아보게 만드는 영화 <철원기행>. 사랑 문제 만큼이나 고민해야 될 게 가족 문제라는 걸 직시시켜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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