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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여배우들>

이미지를 벗어던진 여배우들의 민낯



필자는 이재용 감독의 실험정신을 좋아한다. 그의 영화들은 솔직하다 못해, 숨기고 싶은 것들까지 존재를 드러낸다. 재기발랄하고 발칙하기까지 하다. 영화 <여배우들>은 필자가 굉장히 좋아하는 작품이다. 이재용 감독의 최근작 <죽여주는 여자>를 본 후, 다시금 그의 영화들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여배우들>, <뒷담화: 감독이 미쳤어요>를 재감상했다.


<여배우들>에는 20대에서 60대까지 이르는 국내 탑 여배우들이 등장한다. 윤여정, 이미숙, 고현정, 최지우, 김민희, 김옥빈. 이 여섯 명의 배우들은 12월 24일, 패션잡지 보그의 커버 촬영을 위해 한곳으로 모인다. 콧대 높은 여배우들이 모인 공간은 살벌하다. 동시대 배우들은 서로를 견제하기에 바쁘고, 후배들은 당연히 선배 눈치를 봐야만 한다. 누군들 이 배우들 중 한 명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큰일 날 것 같다. 이런 환경은 패션계의 불문율을 깬, 하나의 '사건'이다. 화보 찍을 때 여배우들은 시차를 두고 부른다는 불문율을 깬 '위험한' 시도. 현장에 있는 에디터와 스탭들은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 느껴지고, 그 기운은 영화 감상자들에게까지 고스란히 전해진다.



여배우 개개인은 나름의 고충이 있다. 이미 자신의 위치를 잡은 그녀들이지만, 모인 자리에서도 탑을 거머쥐겠다는 의도가 보여지는 분위기가 흥미진진하다. 특히 그 욕구가 두드러지는 인물은 고현정이다. 고현정은 최지우와의 첫만남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심기를 건든다. 급기야 둘 사이에는 속어들과 작은 손찌검이 오간다. 이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촬영은 무사히 진행될까?


촬영을 방해하는 또다른 요인이 있었다. 바로 날씨. 눈 때문에 중요한 소품이 도착하지 않는다는 불편한 소식 때문에 이들의 살벌한 분위기의 지속시간은 길어진다. 불편한 시간들 속에서 여배우들은 한자리에 모여앉는다. 기 세고 개성 강하지만, '여배우'라는 공통 직업을 가진 그녀들은 '대한민국에서 여배우로 살아간다는 것의 고충'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자리에 모인 여섯 명의 여배우들 중 세 명은 이혼을 경험했다.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공인의 이혼에 대한 색안경이 존재한다. 그동안 쉽게 볼 수 없었던 기센 여배우들의 눈물을 보는 순간, 얼음판처럼 차가웠던 촬영현장의 기온이 뜨거워지기 시작한다. 특히, 고현정의 눈물은 애잔함의 강도가 셌다. 이전까지 최지우와의 기싸움을 벌이던 그녀가 갑자기 다른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자신의 과거사를 거리낌없이, 오히려 위트 있게 풀어내는 윤여정의 연륜에는 '멋있다'는 표현을 해주고 싶었다. 높디높은 콧대녀 이미지를 일관해오던 최지우도 새침데기 이미지를 내려놓으니 인간미가 돋보였다. 선후배들이 있는 자리에도 김민희의 개성은 두드러졌고, 가장 불편했을 법한 김옥빈의 눈치 액션은 영화의 재미를 드높이는 데 한 몫 제대로 해낸다.



영화가 끝으로 치달을수록 분위기는 화기애애해진다. 다소 살기 넘쳤던 크리스마스이브는, 화이트크리스마스를 맞이하면서 냉랭함이 와해된다. 결국 영화는 훈훈하게 마무리된다. 더하여, 콧대 높고 기 세고 개성 강한, 그래서 그 누구도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이미지'를 갖고 있던 여배우들의 이미지도 조금은 부드러워졌을 것이다.


우리는 배우들을 스크린이라는 창을 통해 본다. 그 창 안에는 의도된 이미지 속에 갇힌 배우들이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의 실상을 모른다. 공인이기 때문에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 된다. 스캔들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사생활 관리를 철저히 해야만 한다. 이것 자체만으로도 배우들은 '심각한 고충'을 앓고 있을 것이다. 영화 <여배우들>은, 제맘대로 무엇 하나 하지 못했던 카메라 앞에서 그녀들에게 '약간의 자유시간(물론, 이 영화 또한 페이크 다큐멘터리이기 때문에 완전한 자유는 아니다)'을 제공한다. 그 자유시간을 통해, 여배우들과 관객들은 조금 더 친숙한 사이가 됐을 것이다. 물론, 이미지에 타격을 주면 안 되는 여배우들이기에 '관리'를 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지(환상) 속에 갇혀있던 여배우들의 (반)민낯을 본 것만 같아,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이 영화를 사랑한다. '다소' 솔직하고, 그래서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잊지 말자. 탑 여배우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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