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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자유의 언덕>

'모리'는 자신이 가장 존경했고, 그래서 결혼하려 했던 여자 '권'과의 재회를 위해 한국에 건너온다. 권의 집 주변 게스트하우스에서 이주일 가량 머물기로 다짐한 모리. <자유의 언덕>은, 모리의 여정을 좇는다. 사실, 모리가 머무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권은 요양을 떠나고 없는 상태다. 그 사실을 몰랐던 모리는, 매일 그녀의 집을 방문하여 편지를 남기는 등 '권 찾기'에 충실한다. 요양을 마친 권은, 이전에 일했던 어학원에서 모리의 편지들을 전해받지만 편지를 읽다 바닥에 떨어트리는 바람에 편지의 순서가 뒤죽박죽이 되어버린다.



영화는 권이, 순서가 엉켜버린 편지를 읽는 순서대로 진행된다. 즉, 영화의 내러티브는 비순차적으로 진행된다. 순차적인 내러티브에 익숙한 관객들은 이 영화에 대해 당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구 엉켜버린, 조각난 시간들은 완성되지 못한 퍼즐 조각들과 다름 아니다. 가령, 카페 지유가오카의 여사장은 처음 보는 모리에게 개를 찾아준 대가로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하는데, 다음 장면에서 개는 자신의 자리를 꿰차고 있다. 모리는 여사장에게 '남자친구를 이해 못하겠다'는 식의 말을 건네지만, 아직 관객들은 여사장의 애인을 만난 적이 없다. 비순차적 내러티브 전개는, 관객을 혼란에 빠트리는 동시에 관념으로부터의 자유를 선사한다.



영화 속에는 관념으로부터의 자유에 대한 상징으로 '지유가오카'라는 카페가 등장한다. 지유가오카는 '자유의 언덕'이라는 뜻을 지닌다. 영화의 제목과 일치하는 카페는, 이 영화의 주제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매일 똑같이 주어지는 시간은, 어쩌면 우리를 옥죄는 틀일 수 있다. 홍상수 감독은 이 관념을 파괴시킨다. 감독의 다른 작품들 속에서도 시간은 변형을 꾀한다. 시간은 반복되는 동시에 개별적이다. 동일한 시간을 부여받지만, 어떠한 상황과 추억에 의해 완전히 다른 가치가 될 수 있다.


사실, 시간은 무형한 가치다. 모리는 항상 <시간>이라는 책을 들고 다닌다. 책에 대해 설명해달라는 카페 여사장의 요청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시간은 우리 몸이나 이 탁자 같은 실체가 아닙니다. 우리 뇌가 과거, 현재, 미래란 시간의 틀을 만들어내는 거죠. 하지만 우리가 꼭 그런 틀을 통해 삶을 경험할 필요는 없습니다." 즉, 시간은 본래 틀이란 것과 어울리지 않는 가치이며, 그 시간에 대한 경험은 틀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것. 결국, <자유의 언덕>의 주제는 이것이다. '관념과 편견에 얽매이지 말자'는 것 말이다.




관념에 대한 주제에 힘을 실어주는 또다른 에피소드가 있다. 모리와 게스트하우스 여사장의 대화가 그것이다.



여사장: 난 보통은 일본 사람들 좋아하는데. 굉장히 착하고, 예의가 있고 깨끗해서요.

모리: 하지만 예의 있고 깨끗한 건, 그냥 그것일 뿐이죠. 그걸로 사람을 사랑하거나 존경하게 되지는 않죠. 그 저질 강사들 같은 한국인들은 정말 싫어했지만,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도 역시 한국인입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에 대해 일반적으로 얘기할 게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바보 같은 짓입니다.



우리는 타인을 대할 때, 편견과 선입견으로부터 출발할 때가 많다. 타인을 제대로 알기 이전부터 관념적인 것들로 타인을 묶는 경우가 있다. 홍상수 감독의 작품들은 편견과 선입견 등의 관념들을 파괴한다. 두루뭉술한 표현과 애매모호한 이미지로 판단하는 것에 일침을 가한다. 인종과 성별, 종교와 직업 등에 덧입혀진 편견 등을 벗겨내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관념을 초월하려는 의지는, 한편으로 풍자성도 지니고 있기에 홍상수 감독 영화들은 특유의 재미를 지닌다.


수많은 독특한 인물들과의 시간을 경험했음에도, 편견을 초월한 모리는 그토록 원했던 권과의 재회에 성공한다. 나아가 결혼 후 자식까지 낳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중이다. 사실, 모리의 에피소드들이 현실인지 가상인지도 모호하다. 모리는 자주 꿈을 꿨고, 심지어 '모리'라는 이름 자체도 죽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감상한 <자유의 언덕> 속 이야기들이 실체인지 가상인지에 대한 판단 역시 관객의 자유의지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다. 확실한 건, 이 영화가 '관념(틀)의 초월하라'는 주제의식을 갖췄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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