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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여교사>,
욕망과 현실의 줄다리기

[주의] 스포일러 많습니다



영화 <여교사>의 주인공 효주는 계약직 여교사다. 그녀는 자기 차례인 정직원 교사 자리를 꿰차고 들어온 젊은 여교사 혜영이 거슬린다. 이사장 딸인 혜영은 '낙하산 취업'을 한 것이다. 혜영은 효주가 자신의 대학 선배임을 알아차리고 인사하지만, 효주의 반응은 냉담하다. 사회생활이 처음인 철부지 혜영은, 효주가 자신을 왜 싫어하는지 알지 못한다. 이때부터 두 여교사의 관계가 비꺽대기 시작한다.


두 여교사가 저울의 양극이라면, 그 사이에 놓여있는 인물은 제자 재하다. 이 세 명의 관계는, 사회성과 욕망으로 뒤엉켜 있다. 가난하지만 실력있는 발레 특기생 재하는, 두 여교사의 욕망의 대상이다. 재하는 효주의 정신적 사랑과 혜영의 육체적 사랑을 동시에 받고 있다. 그렇다면 재하는 두 여성을 어떻게 바라볼까? 그에게 효주는, 사회적 신분을 드높이는데 도움을 주는 '진짜 스승'이고, 혜영은 사랑의 대상이다. 그에 반해, 혜영은 재하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효주의 혜영에 대한 질투(싫어함)의 원인은 사회적인 것에서 애욕으로 확대된다.


사랑을 위한 세 남녀의 행위는 잔혹하다. 또한 이 관계성은 먹이사슬에 가깝다. 더 많이 가진 자는 더 적게 가진 자의 질투를 산다. 질투를 산 인물은 자신이 더 가진 것을 도구화하여, 욕망하는 자의 욕망을 더 자극한다. 지나친 욕망은 화를 부르게 마련인데, 그 진리를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여교사>가 보여주는 모습들이다.


욕망은 관성을 지닌다. 가질수록 더 갖고 싶은 것이 욕망의 본질이다. 따라서, 마음가짐을 달리 하지 않고서야 절대 채워질 수 없는 것이 욕망이다. 효주는 빡빡한 자신의 삶에서 한줄기 빛(재하)을 찾았지만, 그것마저도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에 대해 분노한다. 직장과 사랑, 나아가 자존감 모두를 잃어가는 위태로운 한 여자는, 무너질대로 무너진다. 잔혹한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망연자실한 효주의 모습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분노보다는 안타까움을 연발케 한다. 효주의 범죄보다 더 잔혹한 것은 현실이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효주였다면 어땠을까'. 그녀의 입장이 되어본다면, 우리는 마냥 그녀를 손가락질할 수 없을 것이다. 혜영의 말처럼, 우리는 그 누구도 깨끗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혹은,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누군가에게 가해자일 수 있다. 가령, 재하에 대한 효주의 사랑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효주는 재하에게 전적인 사랑을 줬지만, 재하는 그녀를 '악마'라고 부른다. 자신의 선의가 타인에게는 악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이렇듯 <여교사>는, 욕망의 폐단을 보여준다. 선악의 여부를 떠나, 욕망의 관성은 잔혹한 결말의 원인임을 일깨워준다. 어찌됐든 욕망의 기준은 자신이다. 타인의 욕망(입장)보다는 내 것이 우선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인간의 이기심이다. 영화는, 내재된 욕망과 외부의 잔혹한 현실의 잘못된 결합을 경험한 한 여자를 통해 경고의 메시지를 보낸다. 내 안의 가장 무서운 적을 잘 다스리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만약 그에 대한 노력이 부족하다면, 잔혹한 현실에 순응하는 인물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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