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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모든 상처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아프지 않게 상처와 마주하는 방법

책<모든 상처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중국의 알랭 드 보통'이라 불리는 량원다오의 기록이다. 그가 2006년 8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일기 식으로 매일 한 편씩 써내려간 자기 해부의 시문이다. 저자가 자신의 내면을 향해 던지는 작은 돌멩이며, 그의 극단적인 자기 해부를 통해 상처와 슬픔이 낱낱이 폭로된 전투적인 기록이다. 저자 스스로는 이 책에 대해 '여정 중에 몰라 술병을 핥은 결과'라고 말하는데, 이는 달콤함과 몽상, 타락과 위험 등 큰 간극을 오가는 삶의 총체적인 모습을 묘사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책을 읽으면, 량원다오가 얼마나 지혜로운 인물인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사랑, 이름, 망각, 질병, 용서, 종교, 죽음, 반추, 동거, 빛, 이사 등 일상의 다양한 소재들로부터 사유를 이끌어내는 능력을 통해서 말이다. 누군가의 책, 누군가의 그림, 누군가의 음악 등 실존하는 것에 대한 탐구와 해석에 이르기까지, 이 책은 저자의 뇌와 심장을 낱낱이 정리해낸다.


나는 이 책에 대한 감상을 '숭엄'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하고 싶다. 읽는 동안, 가슴이 벅찬 감동을, 때로는 눈물을 와락 쏟고 싶을 정도의 슬픔이 밀려올 때도 있었다. 내 가슴을 송두리째 옭아간 듯한 공허함에서 같은 소재에 대한 비슷한 생각을 표현한 데서 느끼는 동질감에 이르기까지, 이 책은 어느 순간 '나의 인생 책'이 되어 있었다. 저자는 그렇게 내게 경외의 대상이 되었다.


옮긴 이, 김태성은 프롤로그에서 책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슬픈 존재다. '쇠함'과 '사라짐'이라는 물리적 한계를 지닌 존재다. 인간의 삶이란 조금씩 사라지는 과정이다. 그래서 슬픈 것이다. 호모 트리스티아. 삶의 깊이란 곧 슬픔의 깊이다. 그 깊숙한 곳에 우리가 놓쳐버리는 무수한 슬픔의 아름다움이 있다. 반면 웃음에는 깊이가 없다. 아무리 파고 들어가도 한 번의 파안대소로 끝나버린다. 삶은 절대 웃음으로 규정하거나 파악할 수 없다. 오히려 슬픔과 그것이 만드는 아름다움의 깊이로 규정된다. 이 책은 슬픔의 아름다움을 결정하는 구체적인 방법과 유형을 보여준다.' 라고…. 굉장히 잘 정리된 단평이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즐거움과 웃음으로 삶이 규정되지 않는다. 물론, 이것들도 삶의 많고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지만 슬픔과 상처, 시련과 고통 또한 우리의 삶에서 배제될 수 없다. 부인하고 멀리하고 싶지만, 그것으로부터 우리는 완전히 벗어날 수 없으며, 오히려 이것들을 감내하고 이겨내는 과정에서 우리는 성장하게 된다. 각종 스트레스가 질병을 낳고 우리를 생명의 시간대를 규정하는 것과 같이…. 극단적인 생각이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을 보면 지나친 우울감 속에서 방황하다 자신의 삶의 끝을 규정한다. 삶의 끝을 결정짓는 건, 어쩌면 '슬픔'일 것이다. 우리는 슬픔을 피하고 보다 긴 삶의 여정을 만끽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행복'을 추구하고자 고군분투한다. 하지만 그것이 삶의 전부일까?


시중에 '행복'을 포함한 긍정적인 책들이 쏟아져나온다. 행복, 웰빙, 힐링과 관련된 책들이 쏟아져나오는 문화계를 결코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긍정적이며 낙관적인 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어찌됐든 훌륭하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면 행복은 '찰나의 감정'이기 때문에 금세 흩어져버린다. 하지만 상처와 슬픔은 존속기간이 길고, 또한 우리를 사유하게 만드는 영역이다. 감히 단언컨대, 예전에 비해 개인이 안고 있는 슬픔의 그림자들이 짙어지고 있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생활 수준은 향상되어가는데 개인의 슬픔의 골은 깊어져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슬픔에 대한 직시와 진단이 필요하다. <모든 상처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와 함께 슬픔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해보는 좋을 것이다.






[책 속의 한 줄]


신은 왜 사랑을 구하는 자들 편에 서는 것일까.

일찍이 어떤 이는 일방적인 사랑이 남을 해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러한 견해는 애정과 피해가 공생관계라는 설정을 전제로 한다.

사랑이 있으면 반드시 상처가 있기 마련이고, 이 세상에 상처와 고통 없는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 p. 114


고독을 좋아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사랑도 좋아한다.

사랑의 상태에 있을 때만 가장 깊은 고독을 만날 수 있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은 이루지 말아야 한다.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혼자 살면 진정한 고독을 느낄 수 없다.

하지만 한 사람의 마음과 자신의 작은 방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고 해도 결국 자신의 방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때부터 고독은 더 완전하고 아름다워진다.

- p. 132


호퍼가 그린 집은 안과 밖을 막론하고 극도로 깨끗하다.

그가 그린 인물화만큼이나 무정하다. 그러다가 만년에 이르러 그린 마지막 작품<빈 방의 햇빛>에는 사람이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간판 같은 광선만 남아 있고 방바닥과 벽에는 그림자가 만들어낸 기하학적 편린 몇 조각이 있을 뿐이다. 창문도 보인다. 창밖의 나무 그늘 아래에는 뚫고 나갈 수 없는 깊은 침울함이 있다.

- p. 145


<빈 방의 햇빛> 에드워드 호퍼



인생을 살면서 저지르는 모든 죄에는 그 근원이 있기 마련이다.

기억 속에 남은 가장 원초적인 죄가 바로 그 근원이다. -p. 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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