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요, 모든 건 괜찮다고 믿어요
영화 <그 후>는 감독 홍상수의 자전적(으로 보이는) 이야기다. 등장 인물은 네 명이다. 출판사 사장 '봉완'과 그의 내연녀이자 직원 '창숙', 창숙을 대신해 첫 출근한 여자 '아름', 그리고 봉완의 아내 '해주'다.
영화는 시작부터 관객들을 뜨끔하게 만든다. 바로, 홍상수가 쓴 노골적인 대사와 장면들 때문이다. 해주 앞에서 밥을 먹고있는 봉완은 체기가 생길 정도로 노골적인 말을 듣게 된다. "자기, 여자 생겼지?"라며 시작되는 해주의 말은 봉완을 당황하게 만든다. 아무런 대답도 않은 채 어이 없다는 듯 헛웃음만 짓는 그의 반응은 관객들(과 해주)에 의구심을 품게 만든다. 하지만 그것이 의심이 아닌 실체임은 금세 밝혀지게 된다.
이어지는 장면들에서 창숙과 봉완의 짠한 밀회가 밝혀진다. 둘 사이에는 애정 뿐만 아니라 증오도 동시에 자리잡고 있다. 사랑하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힌 둘은 결코 사랑을 이어갈 수 없게 되고, 그로 인해 창숙은 출판사를 관두고 만다.
다음 장면에서, 관객들이 기다리던 주인공 아름이 등장한다. 앞서 언급했듯, 아름은 창숙 다음으로 출판사에 출근하기로 한 새 직원이다. 그런데 웬걸. 아름은 첫 출근부터 큰 봉변을 당하고 만다. 봉완의 외도를 의심했던 해주가 출판사에 방문하고, 하필 그 자리에 있던 아름이 봉완의 내연녀로 의심받게 된 것이다. 섣부른 오해 때문에 아름은 해주에게 따귀를 맞는 등 제대로 당한다. 아름의 봉변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창숙이 돌아오자, 봉완은 아름에게 출판사에서 나가달라고 말한다. 그렇게 아름은 단기간에 여러 차례 오해와 내침의 대상이 되고 만다.
아름의 말대로 액땜을 하게 된 날, 하늘에서는 눈이 퍼붓는다. 이때, 아름이 했던 말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모든 게 다 괜찮다는 걸 믿어요' '모든 게 다 아름답다는 걸 믿어요'. 이 아름다움에 대한 대사는, 감독과 배우의 스캔들에 대한 변명과도 같이 느껴졌다. 마치 그들의 스캔들이 정당화되기라도 바라는 듯, 타자(관객들)에게도 자신들의 사연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괜찮고 아름다울 수 있는) 것임을 알아달라고 호소하는 듯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씬이 극중 가장 아름답게 느껴(그려)졌다. 시종일관 흑백으로 연출된 장면들에서 대다수의 공간이 흰 빛으로 채워지는 이 장면은, 아름(엄밀히 표현하자면 김민희)의 아름다운 얼굴과 함께 더 아름답게 다가왔다.
'그 후'가 그려지는 후반부에서 비로소 홍상수식 수사법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마치 이전과 동일한 시공간 속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같은 공간 속 같은 구도로 아름과 봉완을 담은 카메라의 시선. 봉완의 외도와 해주의 의심, 오해로 인한 아름의 액땜 등 단기간에 일어났던 다사다난의 시간들이 지난 후의 장면들은 왠지 모르게 고요하다. 봉완은 예쁜 딸 아이 때문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고, 창숙과는 완전히 남남이 됐다. 아름 역시 이렇다할 사건 없이 일상을 보내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눈들이 소복히 쌓인 거리를 터벅터벅 걸어가는 아름의 뒷모습이 왠지 쓸쓸해보인다.
이 영화를 다 본 후 느꼈던 가장 큰 정서는 허망함이었다. 그렇게 많고 많은 일들이 지나간 후 남겨진 것들은 적적한 눈발 위를 걸어가는 한 여인의 뒷모습 만큼이나 쓸쓸했다. 모든 것들은 흐른다. 늘 그래왔듯, 홍상수 영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시간'이라는 개념이다. 시간이 흐르면 우리는 무언가를 잊고(잃고) 혹은 생산한다. 사랑과 쾌락, 아픔과 슬픔 모두 시간이 지나면 다른 것들로 뒤바뀔 수 있는 게 인생이다.
감독은 '안정'을 찾고싶어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후>의 스타일만 봐도, 전작들에 비해 한결 미니멀해졌다. 모든 것은 괜찮고, 또한 아름답다는 아름의 고백은 스스로를 구하기 위한 몸짓으로 느껴진다. 한데, 틀린 말은 아니다. 모든 것은 괜찮아진다. 아름답다고까지 표현할 것들은 많지 않겠지만 말이다. 생애 많은 부분들을 내려놓은 듯한 홍상수. 차기작은 어떤 소재의 어떤 스타일로 표현할 것인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