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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다른 가족 영화
<단지 세상의 끝>

따듯하기만 했던 가족 영화에 반기를 든 작품



가족은 늘 가까워야만 할까. 가정은 무조건 화목해야만 할까. 영화 <단지 세상의 끝>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보여준다. 물론, 작품에서 보여지는 것이 '정답은 아니다'. 이러한 가족과 가정의 일례일 뿐이다.

영화의 시작은 어두운 기내에서부터 시작된다. 주인공 '루이'의 모습이 비춰지면서 그의 독백이 이어진다. 독백의 내용을 통해 우리는 그가 12년 만에 집을 찾는다는 것과 그가 곧 죽음을 맞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종합해보면, 루이는 스무살이 갓 넘었을 무렵 집을 떠나 파리에서 유명한 작가가 됐다. 그가 고향으로 향하는 이유는 자신이 시한부임을 밝히기 위해서다.





루이가 집에 도착했지만, 가족들의 반응은 썩 뜨겁지 않다. 모두가 반겨 마땅할 상황이지만, 그를 열렬히 반기는 이는 엄마와 뿐이다. 아들을 늘 그리워했던 엄마는 루이를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반긴다. 어린 시절의 얕은 기억과 이따금씩 루이로부터 오는 짧은 메시지 뿐인 엽서를 통해 오빠를 추억하던 여동생 쉬잔도 오빠와의 재회에 들뜬 기분이다. 이들과는 달리, 형 앙투안은 냉담하기만 하다. 형수 카트린은 남편을 대신해 따스하고 정중하게 루이를 맞아주려 노력하지만, 그마저도 눈치를 봐야 하는 실정이다. 이렇게 복잡한 기운이 뒤엉킨 묘한 루이네 집 풍경은 낯섦과 동시에 긴장감까지 선사한다.





루이가 집에 머무른 시간은 고작 세 시간 남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집의 분위기는 삭막한데다 답답하다. 참으로 묘한 것은, 가족들이 제 말들을 아끼는 것도 아니고 조용한 분위기로 일관되지 않음에도 즐거움이나 기쁨은 조금도 느낄 수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형과의 갈등으로 인해 루이는 제 몫의 일부도 발휘하지 못한 채 집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된다. 이같은 가정을 두고 과연 화목과 행복을 말할 수 있는 이가 있을까.

<단지 세상의 끝>은 프랑스 극작가 장 뤽 라가르스의 희곡을 각색한 영화다. 작가는 자신이 에이즈에 걸려 시한부의 삶에 놓인 시점을 담은 자전적 이야기를 펼쳐냈다. 영화의 메가폰을 잡은 자비에 돌란 감독 역시 퀴어 영화를 통해 자전적 이야기를 표현해온 작가성 짙은 인물이다. 이 작품 속 루이는, 장 뤽 라가르스와 자비에 돌란의 페르소나인 셈이다.

삭막하고 답답한데다 시끄럽고 괴팍하기까지 한 이 영화. 관람하는 동안 꽤 많은 감정 소모를 경험했을 것이다. 지칠대로 지치게 만드는 루이네 가족 구성원들은 그야말로 이기적이다. 하나 둘씩 밝혀지는 개인의 속내들은, 그 동안 펼쳐내지 못한 응어리의 분출이다. 특히, 앙투안의 이해할 수 없는 억지스러운 행동들에서는 루이에 대한 자격지심까지 느껴진다.

영화는 가족과 가정이 결코 안식처나 행복의 창구가 아님을 직설적으로 보여주고 들려준다. 영화의 시작과 끝에서 들을 수 있는 직설적인 곡 'Home is Where it hurts'가 주제를 압축하고 있다. '내 집엔 문이 없어, 지붕이 없어, 창문이 없어, 집은 항구가 아니야, 장의차가 아니야, 마음을 다치는 곳'. 엔딩 신(scene)에서는 루이가 집을 벗어나는 뒷모습과 함께 곡이 한번 더 흘러나온다.

<단지 세상의 끝>이 보여준 가족 구성원들처럼, 제 역할에 충실하지 못한 채 관계의 끈을 느슨하게 만들거나 끊어버리는 가정의 형태도 다수 존재한다. 가정으로도 파고들지 못하는 인간은 역시 절대 고독의 존재인 것일까. 이 영화는, 고독에 대해 다시 한번 수긍하게 만드는 동시에 가족의 의미에 대해서도 되짚어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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