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난 꽤 텍스트를 좋아했었다. 읽고 쓰는 걸 즐겼다. 쓰는 걸 좋아했는데, 글씨체가 좋진 않았다. 그야말로 악필이었다. 악필이었던 이유들 중 하나는, 내가 글씨를 그림처럼 썼기 때문이다. 즉, 나는 글씨를 '그렸다'. 그래서 매일 아빠에게 혼났다. 요즘에야 다양한 글씨체들이 각광받고 있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다름에 관대한 사회는 아니었다. 나는 글씨의 끝부분을 달팽이관처럼 뱅뱅 말아 그리는가 하면, 삐침 부분이 글씨 전체만큼의 비율을 차지할 만큼 그려댔다. 되새겨보면, 나의 글씨가 이상하긴 했다. 더군다나 타인에게 불편을 끼치는 형태였다. 하도 꾸중을 들어서 '고쳐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교내 써클활동으로 정서반을 택했다.
공책이 너덜너덜, 부풀어오를 때까지 힘을 주어 글씨를 글씨답게 쓰는 데 매진했다. 끝내, 타인이 한번에 알아보기 쉬운 글씨다운 글씨를 쓰는 데 성공했고, 그때부턴 보다 예쁜 글씨체를 유지하기 위해 무언가를 끊임없이 썼다. 쓰기 위해서는 베낄거리가 필요했다. 그 당시의 나는, 썩 창조에 재능이 없었다. 그래서 읽을거리들을 찾아댔다. 방 한구석에 앉아, 책을 베꼈다. 베끼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머리로 들어오던 글씨들은 마음에 각인되어 감동을 선사했다. 그때부터였다. 읽기의 매력을 알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읽기 위해서는 이해가 필요했다. 단순히 글씨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새기기 위해서 나는 더 열심히 썼다. 사실, 그때는 필사의 장점을 모른 채 더 예쁜(남들이 읽기 편하고 보기에 좋은) 글씨체를 유지하기 위해 필사를 필사적으로 했었다. 그랬더니 책의 장점을 하나 더 깨닫기 시작했다. 가장 단편적인 예로는 '받아쓰기 점수'가 높아졌다는 것이다. 빨간 빗줄로 가득했던 공책 위가 예쁜 동그라미로 바뀌어있는 모습을 마주하는 순간. 어릴적 느낄 수 있는 희열들 중 하나 아닐까. 그렇게 나는 글의 매력을 하나 둘씩 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받아쓰기도, 창의적인 것들도 자신 없었던 나는 열심히 읽고 쓰는 것을 반복하면서 글의 매력을 알아갔고, 그에 대한 성과도 체감할 수 있었다. 초중고등학생 시절, 교내외에서 수차례 글짓기 대회에서의 수상을 거듭했고, 텍스트에 대한 사랑 역시 커져만 갔다.
물론 지금은 글로 밥 벌어먹고 사는 직업은 아니지만, 꾸준히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있다. 기고 활동도 하고, 그게 아니더라도 매일 텍스트를 접한다. 이 활동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은, 나의 앞날에 대한 다짐문 같은 것이다. 텍스트로 인해 얻은 것들이 많고, 무엇보다 나는 그것들과 함께 할 때 즐겁다. 내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창구이자 타인과의 소통구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표현하고, 나의 어떤 시점을 기록할 수 있는 '쓰는 행위'. 나는 쓰는 인간이다.
_2017.08.08, 쓰는 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