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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표면과 실체

류시화 산문집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를 읽던 중, (너무)좋아서 기록해야만 했던 문구다.

'당신은 이름 없이 나에게로 오면 좋겠다. 나도 그 많은 이름을 버리고 당신에게로 가면 좋겠다. 이름을 알기 전에 서로를 느끼면 좋겠다. 그때 신비의 문을 여는 열쇠가 우리에게 내려온다. 현존에는 이름이 없다. 궁극의 신비인 우리는 이름과 분류를 넘어서 있다. 그 세계에서만 우리는 온전히 하나가 될 수 있다. 내 안의 신과 당신 안의 신이, 내 안의 불과 당신 안의 불이 만날 수 있다. 내 안의 절대 고요와 당신 안의 절대 고요가.'

사실, 많은 책과 사상들에서 접해봤을법한 맥락이다.
류시화의 감성적이고 온유함이 드러나는 글이라, 유독 가슴 안쪽으로 깊이 들어오는 것 같다.
여기에서 표현된 '이름'이랑 겉, 표면 따위가 아닐까.
나아가, 많고 많은 인간이라는 종을 분류해 불러야 할 경우가 많으므로, 이름은 대명사가 된다. 따라서, 이름이 필요하긴 하다. 하지만 이름은 존재의 실체는 아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사물의 이름으로 그 사물의 온전한 실체를 파악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류시화를 비롯한 많은 이들은 이 점을 지적한다.

나 역시, 이 맥락에 동의한다.
유명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의 지난 날의 활동과 나를 접한 경험자들의 개인적인 편견에 의해 나라는 존재가 판명지어진 듯한 느낌이 들 때(직접 '전해들은'게 많다)가 있다. 불쾌했고, 그래서 불끈하고 대응책을 마련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웃어 넘기는 법을 알게 됐다('헤헤' '하하'의 웃음은 아니다). 전해들은 편견들을 정답이라 여기는 이들을 나는 과감히 무시하기로 했다. 그들과 나는 어쩌면 아예 마주치지 않을지도 모른다, 평생동안. 그들에게 나의 이미지(이름 같은)를 애써 미화하며 편견을 되돌릴 생각도 없다. 진실은 밝혀지게 마련이며, 더욱 중요한 것은 관계란 상대적인 것이기에 나의 태도 역시 마냥 좋을 것이라는 보장도 못하겠다.

어찌됐든, 대명사와 표면으로 타자를 판명내리지 말자는 것. 나 역시, 이 점을 깊이 염두에 두고 타자를 대해야겠다고 다시금 다짐해본다.




_2017.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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