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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따코 Dec 22. 2020

라떼와 삶

삶, 인생, 행복, 고통, 불행, 절망, 사랑과 같은 거대해 보이는 단어들을 선망했던 적이 있다.

삶, 이라는 단어를 가장 처음 접한 것은 아마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의 가사 속이었을 것이다. 의무교육과정을 밟았다면 한 번도 접해보지 않은 이 없는 노래.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받고 있지요”


누군가에게 물었던 기억도 있다. 삶이 뭐야? 누군가 대답했던 것 같다. 인생이라는 뜻이야.


어려 보이는 사람이 삶이나 인생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면, 반사적으로 불쑥 거부감이 든다. 그들은 삶이라는 것에 대해 인생이라는 것에 대해 절대 알지 못할 것이라는 견고한 확신에서 나오는 본능에 가까운 것이다.


그것은 다수의 어른들에 의해 세뇌되어 온 인식이기도 하다. 자라오면서 넌 어려서 몰라. 어린 게 뭘 안다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cf. 민증에 잉크도 안 마른 게) 너도 지나 보면 다 알 거다. 등등의 관용어구들을 한 번도 듣지 못한 이는 없다. 오히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너무 많이 들어 “너네들은 뭘 그렇게 잘 아는데!”라고 마음으로 절규한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교육은 어린이에게 지대한 영향력이므로, 절규는 어느새 수긍으로, 어린이는 어른이 되어 또래집단 중에서도 세대를 가르고 나보다 어려진 누군가를 단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리곤 어딘지 익숙한 톤과 리듬으로 그 관용어구를 읊조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 지금 네가 뭘 알겠니”


“나도 너 땐 그랬어” 이런 말을 하는 이에게 ‘나 때’라는 그 시절이 있었던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나와 같이 그랬다는 말에는 분명한 오류가 존재한다. 한 인격체를 그 인간이 지나고 있는 시기로, 즉 나이라는 숫자로만 정의 내릴 수는 없다. 그 나이 대에는 분명 어떠한 감정과 신체의 변화를 겪고 있을 것이라 단정하는 말이다. 그것은 인간의 성숙이 윈도우가 97에서 xp로 비스타를 거쳐 10까지 변화하는 일련의 과정처럼 정해진 이진법대로 진행하고 있을 것이라는 오산이다.


한 인간이 내가 아닌 이의 감정과 모순을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한다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처한 상황이나 조건에 공감하는 정도다. 이 말에 반박하거나, 당신은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이해한다고 단언하는 이의 얼굴은 나이에 상관없이 주름지고 총기를 잃어 있다.


답습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교육받았지만 결코 누군가를 나이로, 그가 살아온 시간만으로 평가하지 않아야 한다. 타인의 매분 매 초란 내가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며 감히 가늠할 수도 없는 미지의 시간이라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어른들이 라떼를 논하며, 삶을 논하고, 인생을 논한다. 인생의 왕도를 제시하려 하며, 누군가를 계몽하려 한다.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어린이들이여 절대 당신이 겪은 억압을 전승해서는 안 된다.


누구나 삶에 대해 말할 수 있고, 내가 겪고 있는 인생에 대해서 말해볼 수 있어야 한다. 그 의견에 꼭 동의할 필요 없다. 공감할 필요도 없다. 그저 그의 의견을 묵살하거나 비하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조건적인 비난과 판단이 ‘라떼의 삶’에서 어떤 상처가 됐었는지, 어떤 이정표를 당신에게 제시했었는지 잘 생각해 봐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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