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땅따코 Dec 13. 2021

나는 그런 순간들을 좋아한다.

말로써 명징하게 깨달아지는 순간들.

지금의 상황이 나의 감정이 혹은 내내 마음에 걸리지만 왜 걸리는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었던 문제들이 언어로 명확하게 정리되는 순간들.

흩어져있던 퍼즐 조각들이 순식간 그림을 완성하듯 일련의 문장으로 일목요연하게 설명되는 순간들.


흔하지 않지만 분명 찾아오는 순간들을 좋아한다.


그런 순간들엔 쾌감이 있다.

그 쾌감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닌데

어떤 때는 오히려 정리된 문장의 파동이 너무 커서 내내 가슴에 남아 후유증을 앓기도 한다. 차라리 영영 모르는 채로, 그냥 애매한 채로 놔둘 걸 하는 깨달음들이 그렇다.

 

대화를 하다 보면 이 대화가 겉돌고 있다는 감상을 지울 수 없는 대화 상대가 있다.

상대가 딱히 싫은 것도 아니고, 서로에 대한 적대감을 가질 만한 상황도 아닌데 왜 그럴까에 대한 고민을 여러 번 하게 했던 상대가 나에겐 있다.

그런데 얼마 전 그 사람과 언쟁을 하던 도중 왜 늘 대화가 원활하게 흘러가지 않는지에 대한 명쾌한 답을 찾아냈다.


"2022년부터 횡단보도 보행자 신호에 우회전하는 차는 과태료를 문대. 진짜 그동안 무분별하게 우회전하는 차들 때문에 짜증 났어"

"네가 횡단보도 건널 일이 얼마나 되는데?"


"차를 갖고 싶어"

"네가 차 타고 갈 데가 어디 있어?"


"엘리베이터가 너무 안 와서 지루하다"

"남들 다 참고 기다리면서 타는 거야"


상대의 빈정거리는 어투에 알게 모르게 내상을 입고 있었고 그에 일일이 반응하는 내 모습이 우스워지고 못나보였다. 나를 깎아내리는 언사에도 제대로 반박하지 못하고 그저 입안에서 불완전한 말만 굴리고 있었다.


이런 대화의 흐름 속에서 나는 그를 '방어'하고 있었다.

상대의 말을 공격으로 인지하고 나는 그 공격에 대한 방어를 위해 대화를 그만두거나 그에 응당한 공격적인 어투와 문장을 선택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대화를 하자는 의욕은 떨어지고, 결국 내밀한 마음속 상처만 얻게 되는 것이었다.


서로에게 반응하는 것이 아닌 공격하고 방어하게 하는 대화는 나를 지치게 했다.

  

그와의 대화가 어긋나는 이유를 명확하게 문장으로 정리하고 나니 그간의 찝찝했던 대화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치며 더 이상 그와는 대화를 하고 싶지 않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또한 그에게 물들어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어투를 사용하진 않았는지, 나는 과연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가고 싶은 대상인지에 대해 또다시 검열이 시작됐다.


말엔 힘이 있다. 기 보단 말하는 사람의 감정엔 힘이 있다. 말에는 화자가 상대에 대해 느끼는 기저의 반감, 불쾌감, 죄책감 같은 것들이 묻어난다. 긍정적인 것들도 묻어나지만, 부정적인 끈적끈적한 마음들은 말에 더 쉽게 달라붙는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괴로웠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지 못했고, 한낱 말 따위에 상처 받고 의연히 넘기지 못했다. 홀로 눈물이 날 걸 같아 마른입에 침만 삼켜댔다.


언제쯤 이러지 않을까. 마음을 다치게 하고 병이 들게 하면  면역이 생길까? 언제쯤 유리조각이 아닌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찔리고 찔려 결국엔 남을 찔러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수백 번 생각하고 한마디 내뱉는 동안 생각 없이 꽂히는 상대의 말을 내가 얼마나 감내해야 하는 걸까?


누군가에겐 그저 받아치는 플라스틱 공 같은 것일지 몰라도 나에게 말이란 마음을 담는 것이고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 영향력을 너무 잘 알아서 늘 두려워하는 것이다. 내가 힘들게 말을 밖으로 꺼낸다면 그 마음은 더 이상 숨기기 힘든 것이어서, 안에 두기엔 너무 벅찬 것이어서 꺼내지는 것이기에 폭발한 말은 크게 진동해 달팽이관을 타고 내 안으로 전보다 더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스민다.


그래서 말하는 행위 자체가 싫어졌던 날들이 있었다. 게다가 타인의 말까지도 혐오하게 됐던 시간들. 그 시간들은 나에게 꽤나 끔찍한 시간들이었다. 만석인 지하철 막차에서 까닭 없이 눈물을 뚝뚝 흘렸고, 극장에 홀로 앉아 눈앞의 스크린을 자기혐오로 가득 채웠고, 매일을 불면에 시달리고, 내 안에 자라나는 말들을 삼켜내느라 속이 곪았었다. 내 목소리가 소름이 끼쳤고 내가 구사하는 언어가 가볍고 천박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말이 나라는 사람을 표현해줄 거라는 믿음을 완전히 잃었던 적이 있었다.


그 과정을 겪고 나서 나는 오히려 말에 대한 집착을 놔버렸다. 이전에는 내가 내뱉은 말들에 대해 일일이 비속어를 쓰진 않았는지, 그 어휘의 정확한 의미를 알고 썼는지, 누군가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혐오하는 표현을 쓰진 않았는지, 상대와 나의 관계를 고려해 적절한 존칭과 호칭을 사용했는지 등등. 일상에서 짧게 말하는 찰나의 순간에도 수많은 판단과 선택을 거쳐야 했다. 그러나 말은 결국 주고받는 모양새로 완성되고 내가 다듬고 다듬어 던져도 저쪽이 발로 까버리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달까.


나에 대한 검열이 극에 달해있던 시절, 그 시절은 아이러니하게도 검열이 내 안에서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을 ‘자기 검열’ ‘혐오’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로 사회가 명쾌하게 정리해주기 시작하던 시점과 일치한다.


말로써 명징해진다. 깨끗하고 맑아진다. 그러나 그렇기에 또다시 괴로워졌다. 탁한 물에 물방울 하나 떨어뜨리니 그 파장의 영향권 안으로 부끄러운 내 얼굴이 비친다. 그러나 곧바로 또다시 혼탁해질 것이다. 그것이 말이다. 말은 금세 혼탁해진다. 그 기저의 흙바닥은 결코 숨길 수 없다. 반드시 다시 수면 위로 부유물들이 떠오른다.


말은 명확해지는 동시에 날이 서서, 그것이 예리할수록 적합할수록 어딘가로 깊숙이 파고들어 갈 수 있다. 그래서 가끔은 그냥 뭉툭하게 있는 채로 그래서 괴로워도 치명적이진 않은 채로 가둬둘 걸 하는 말들이 있다. 왜냐면 제일 괴로운 것은 그 말을 결국 뱉어버린 나 자신이기 때문에.

하지만 말은 되돌릴 수 없다.

그것은 5살짜리 꼬마도 안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울증 자가진단을 해보았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