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사과
밤중에 책을 읽는데 주인공이 사과를 깎아 자기 엄마에게 건네는 대목이 나왔다.
그제야 엄마가 보내준 사과들이 생각났다.
택배로 받자마자 뭘 이렇게 많이 보냈나 불평불만만 하며 무심히 냉장칸에 처박아 놓았던
사과들.
번뜩 어떻게 그걸 잊었지 하고 냉장고를 열어보니
사과들은 역시나 기다려주지 않았고
잊힘에 대해 시위하듯 검푸르게 짓물러 있었다.
엄마에게 미안해졌다.
밤 산책을 하는데 길에 토마토가 떨어져 있었다.
너무 물러 반쯤 터진 채로 길 위에.
조금 더 걷다 보니 또 다른 토마토가 떨어져 있었다.
아니 무슨 헨젤과 그레텔도 아니고 누가?
근데 자세히 보니 꼭지 모양이 토마토의 것이 아니다.
가로등 불빛 아래서 보니 빛깔도 붉지 않고 주황색이다.
그제야 위를 올려다보니 감이 주렁주렁 매달린 감나무가 서있다.
감이었구나.
깨달음 후 좀 더 걷다가 방심했는지 떨어진 감을 밟았다.
물컹
신발 밑창으로 과육이 짓눌리는 느낌에 작게 탄식했다.
불쾌한 느낌을 애써 몰아내고
다시 걷는데도 진득한 느낌이
발뒤꿈치에 아련히 남았다.
그러다 집에 오는 길에
또 은행을 밟았다.
거리에 지저분하게 떨어진 은행들.
집에 가는 내내 지독한 냄새가 주위를 맴돌았다.
올 가을, 한 번 맛보지도 못한 감과 은행을
발로 밟았다.
내가 못 먹을 걸 알고도 덤으로 얹힌 엄마의 마음도
조금 썩혔다.
그 마음에는 나에 대한 우려와 엄마의 자기 위안이 조금 섞여있었다.
과실들이 길가에 떨어져 있고
나는 그것을 밟는다.
별 의미 없어 보이지만
은근한 죄책감이 느껴진다.
이렇게 의미 없이 지는 과일들은 왜
다 익었는데도 수확하지 않을 것이라면 왜
이 자리에 심어졌는지.
그렇게 방치될 거면 어째서 매연을 마시고 미세먼지를 마시며
악착같이 자라났는지.
그 나무들이 직접 묻지 않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지.
그러나 나는 물을 수 있는 생물이라 불행으로 여겨야 하는지.
제 엄마의 마음도 방치하면서, 저 생물들에 이렇게까지 과過몰입하는 것이 우스운 건 아는지.
걸으며 ‘종현의 소품집 OP.1’ 앨범을 들었다.
매 트랙이 감미로운 목소리의 절규로 다가왔다.
마치 구조요청을 보내는 것처럼.
이제 떨어질 것 같은데
저 밑으로 떨어져 분명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뭉개질 것 같은데
나 좀 어떻게 해달라고, 내가 떨어질 곳에 서서 날 좀 받아달라고
그렇게 외치는 것 같았다.
나의 이기적인 마음은
그 당시 내가 그의 팬이 아니었음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시간이 흐른 지금에서야 그의 목소리를 듣는 내 마음도 이렇게 아팠으니까.
저기 저렇게 짓밟힌 감이, 은행이, 그리고 엄마의 사과가
말을 할 수 없어서, 노래라도 부를 수 없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랬다면 나는 결코 이 거리를 산책할 수 없었을 것이니까.
그렇게 방치된 것들은 어떻게든 흔적을 남긴다.
쉽게 잊혔기에 쉽게 잊히지 않는 방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