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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따코 Jun 12. 2022

가족이 그렇게 간단한 걸까

영화<브로커>리뷰

  베이비 박스 앞. 폭우가 몰아치는데 엄마는 아이를 살릴 박스를 앞에 두고도 차가운 바닥에 아이를 내려놓는다. 그리고 빗속으로 도망친다. 아이의 이름과, 꼭 데리러 올게.라는 약속이 적힌 쪽지를 아이의 품에 꽂아놓고.

  상현(송강호)과 동수(강동원)는 교회 베이비박스에 들어오는 아기들을 몰래 빼돌려 입양이 어려운 부모들에게 넘기는 브로커다. 아이를 되찾으러 온 소영(이지은)에게 아이를 팔아넘기려 했음을 들키자, 소영을 자신들의 계획에 참여시킨다. 그렇게 세 사람은 소영의 아기 우성을  떠나보내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

그 여정엔 배두나와 이주영도 함께 하는데, 둘은 여성청소년과 형사들로 인신매매를 하려는 상현과 동수를 현행범으로 체포하기 위해 잠복하며 그들을 미행한다.


  인물들이 여정을 함께 하며 마음의 벽을 허물고 나아가 함께하는 미래를 꿈꿔 보기도 하는 극의 서사에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 이렇게까지 공감이 안 될 건 뭔가.라고 나 자신한테 반문해 볼 정도로, 극장 안에서 나만 겉도는 느낌까지 들 정도로 극에 공감하지 못했다. 그 이유가 뭘까.


  분명 사람은 살을 붙이고,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쉽게 유대감을 느낀다. 본능적으로 사람의 온기를 반가워한다. 상현, 동수, 소영 모두 저마다 사람에게 상처받아온 이들이기에 그 억눌렀던 본능들이 우성을 매개로 더 강하게 작용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되긴 한다. 그러나 사람의 존재는 분명한 충만함과 동시에 분명한 피로감까지 동반하는 것이 아닌가.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제대로 된 잠을 자지도 못하며, 그렇다고 공동의 목적을 이루지도 못하는, 트렁크도 제대로 닫히지 않은 낡은 봉고차 안에 구겨져야만 하는 여정을 그들은 왜 계속하는가. 그 피로감을 견디는 이유가 무엇인가. 가족이 되는 일에 이유가 필요하지 않음을 역설하기 위함인가? 나는 끝내 그 동기들에 몰입하는 일에 실패했다.

  세상엔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이 나타나고 있지만, 모두가 그렇게 낭만적인 방식으로, 불분명한 동기들로 점철된 채 주먹구구식으로 이루어지진 않음은 당연하다. 아무리 영화라도 납득은 가야 하는 것 아닌가.



  다만 공감한 것은, 한 아이가 적어도 제 힘으로 밥을 넘기고 두 발로 서서 걷기까지엔 정말  많은 사람의 손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결국 아이를 길러내는 일에는 누구도 참여자가 아니 될 수 없음을 일깨운다.

  최근 노키즈존에 대한 논쟁에서 아이를 돌보고 돌보지 않는 일이 선택의 관점이 되는 순간 아이들의 생존과 복지의 문제는 순식간 위기를 맞는다는 의견처럼. 사고할 수 있고 홀로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자란 사람이라면 우리 모두 누군가에 의해 먹여지고 입혀진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 아이에 관한 일이라면 힘닿는 데까지는 모든 손을 빌려 보호하려 사력을 다해야 한다. 사람이 사람을 가까이하려는 처럼. 이웃의 피를 마냥 외면할 수 없는 일처럼. 어른으로서 아이를 보호하는 일은 어떠한 본능처럼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아이를 출산하자마자 모성을 획득하는 여성에 비해 남성이 부성을 갖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에 여성에게도 모성이란 무조건적으로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는 비판이 있었고, 그 비판에 대한 수긍을 반영한 영화를 만들었다. 는 감독의 인터뷰를 접하고 뭔가 다름을 기대했던 내 탓이다.

  따지고 보면, 심지어 친부의 아내까지도 아이를 원한다는 점에서 결국엔 어떤 인물에게도 ‘아이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선택지는 주어지지 않는다. 또, 여성이 아이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을 또 한 번 설득시키고자 하는 시도가 보이지 않다고도 할 수 없다.

  남성 감독이 여성의 이야기를 하려 하는 것은 어렵다. 그것이 특히 모성과 출산에 대한 이야기라면 더더욱 그렇다. ‘낳아서 버리는 죄보다 낳기 전에 지우는 죄가 더 가볍냐’며 소영(이지은)이 수진(배두나)과 갈등하는 부분에서 그냥 탄식만 나왔다. ‘죄’ ‘용서’라는 키워드가 어째서 이렇게 다르게 해석되었나 싶다. <아무도 모른다>나 <바닷마을 다이어리>에선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두 영화에서도 가족에게 버림받은 이들이 나온다. 그러나 두 영화에선 죄를 지은 대상이란 것이 영화 속에 부재한다. 그리고 남은 이들이 그들을 용서해야겠다는 의지를 가지지도 않는다. 그저 그들은 담담히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고 남은 이들끼리의 연대를 통해 슬픔을 씹어 삼킨다. 그것이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주던 울림이 아니었는가. 그런데 <브로커>는 그렇지 않다. 감독이 지나치게 한국에 동화된 것일까.

  죄를 지은 이가 있고, 그 죄를 벌하려는 이가 있고, 선과 악의 사이에서 결국 우리 모두 나쁜 놈이고 우리 모두 착한 놈입니다. 하는 그런 신파. 뚱딴지같은 곳에서 합리화와 용서가 이루어지는 오독. 흔히 한국영화가 답습하는 불쾌감이 <브로커>에 스며있다.  


  남해에서 동해까지 한국의 풍경이 꽤나 아름답게 앵글에 가득 차는데, 음악도 경쾌한 어쿠스틱한 것들이 깔리는데, 왠지 다 따로 논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연기도 마찬가지. 어째서  <밀>도 <박쥐>도 <기생충>도 아닌 이 영화로 송강호가 칸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는지는 송강호 자신도 의문일 것 같다. 기성 배우들의 소금기 쫙 뺀 모습을 보는 재미가 있었던 그런 히로카즈의 연출 실력이 한국 배우들에겐 먹히지 않았던 걸까. 동수, 상현, 소영은 없고, 강동원 송강호 아이유가 나와서 제 몫의 대사를 줄줄 읊다 들어가는 느낌이 너무 아쉬웠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묵직하고 함축적인 대사들이 한국어로 발음되니 확실히 그 힘이 빠진다. 표의문자를 근간으로 해 짧은 말로도 함축이 잘되는 일본어에 비해 문장의 구성과 호응성이 전달력의 대부분을 좌지우지하는 한국어에선 그 ‘말맛’이 잘 살아나지 못했다. 짧게 끊기는 대사들이 상황을 설명해주지 못하고 그렇다고 여운을 남기지도 못하는 애매한 상태로 인물들 사이를 떠다닌다.

  오히려 수진(배두나)의 서사가 가장 극에 붙고 이입할 수 있었는데, 그마저도 아름다운 표백화로 흐지부지 된 것 같아 아쉽다. 차라리 그녀의 이야기로 끌고 갔으면 꽤나 흥미로운 영화가 됐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시선은 확실히 따뜻하다. 근데 그 시선이 왠지 먼나라 이웃나라 이야기일 때가 훨씬 와닿고 아름다웠다는 씁쓸한 감각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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