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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따코 Nov 17. 2022

너와 내가 같은 결말에 닿는 방식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 감상문

지신을 이루는 모든 것을 지켜내고 싶은 여자가 있다. 여자가 바라는 바와 상관없이 그녀 주변의 모든 것들은 무너져 간다. 생업인 세탁소는 세무조사에 들어갔고 남편은 이혼 서류를 들이밀고 아버지는 병환에서도 딸을 탐탁지 않아 하고 외동딸이랑은 절연 직전이다.

여자의 기대와 소망을 보란듯이 비껴가는 일련의 결과는 여자를 절망하게 한다. 그 절망을 이해하는 이는 없다. 다 그녀가 자초한 일이기 때문이다. 노래방 기계를 사업비로 구매한 것도 그녀, 남편에게 무심히 군 것도 그녀, 딸의 애인을 인정하지 않은 것도 그녀, 애초에 사랑을 찾겠다며 부모의 품을 떠난 것도 그녀였다. 그녀의 모든 선택이 지금을 이루었다.


그 억겁의 선택들은 촘촘하고, 결연하게 이어져 도대체 언제부터 어디가 엉킴의 시작점인지 가늠할 수 없다. 그래서 그녀가 선택이라기도 뭐하게 생존한 방식은 바로 이해를 멈추는 일이다. 남편이 무능해서, 딸이 레즈비언이라서, 손님이라곤 진상 코쟁이뿐이라서, 자신이 미국에 사는 동양인이라서 등등 세상이 박해할 만한 그녀의 요소들을 그녀라 여기며 붙들고 살아간다.


그 선택은 그가 세상에 박해받는 일을 익숙하게 혹은 타당하게 만들기 위한 몸부림이다. 그러나 그녀가 원하는 것은 박애다. 저 TV 속 여자주인공처럼, 아름다운 것 속에 파묻혀 아름다운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결국 지금에 안주하는 일에는 가장 젬병인 애블린이 ‘가장 최악의 버전의 내’가 되고 싶어서 한 선택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알파’의 세상에서 온 이들은 주인공 에블린에게 말한다. “네가 최악의 애블린이 되었기에, 다른 애블린들이 다양한 삶을 누리고 있는 것이라고”


그러나 그것은 ‘알파’ 세상의 담론일 뿐이다. ‘최적의’ ‘최고 효율의’ 버전만을 찾아 헤매며 그가 아니라면 가차 없이 다른 차선책을 찾으려고 하는 우성들의 사고방식이라는 말이다. 알고 보면 모든 우주의 애블린들은 다 저마다 불행하다. 누가 덜, 누가 더, 라고 판단하는 것은 그를 스크린으로 접하는 관객들이나 할 수 있는 전지적 시점에서의 일이다. 인류의 진화는 고통의 정량을 재는 법과 그 정량대로 고통을 느끼는 법을 미래의 미래에서도 체득하지 못했다.


지금 눈앞에 닥친 에블린에게 집중해보자. 애블린을 움직이는 것은 ‘두려움’이다. 나의 정신이 어지러워 그동안 일궈 놓은 삶의 터전을 모두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나를 꼭 닮은 하나뿐인 딸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같은 실수를 똑같이 대물림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애블린이 집을 나와 느꼈을 고독함과 후회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선택일지 도망일지 헷갈리는 자신의 출가는 가족에 대한 원망과 미움으로 얼룩져 지옥 같은 과거로 남았다. 그 지옥을 딸이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순간의 쾌락은 너무 짧았고 일상의 과오와 회환은 너무 길었다.

그러니 그녀가 영화의 말미에 가서 이룬 것은, 아마도 전과는 다른 화목한 가족을 이룬 것도 아니고 전과 다른 새로운 애블린으로 다시 태어난 것도 아닌,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낸 것이다. 최상위 버전이 아닌 주제에 원하는 바를 이룬 것이다. 정답이라 부르짖는 목소리를 결코 믿지 않은 것이다. 그것이 그녀를 한 명의 히어로처럼 보이게 한다.


어쩔 수 없다, 인생의 진리다" 라고 여겨지는 불행의 고리를 끊어내는 것은 오직 히어로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에 그렇다. 그 당연함을 당연것이 아닌 것으로, 일상으로 희석되면 그만인 것을 일상 밖의 것으로 끌어내기엔 보통인의 생활 이상의 '우주'정도가 필요한 일이기에 그렇다.


기가 막히고도 실재하며 실재한다고 믿기 어려운.


거대한 베이글은 늘 목전에서 수시로 약하고 여린 이들을 빨아들이려고 하겠지만, 내가 지금 빨려들 것 같아서, 곧 사라질 것 같아서 손을 내밀었을 때, 잡아줄 사람이 있다는 것. 그 믿음만으로도 우리는 베이글을 마주할 수 있다. 거대한 인생의 허무와 대적할 수 있다.


맞서 싸우는 것에 중점을 둔다면, 결국 타인을 해치는 일보단 타인을 무력하게, 어떤 살상의 의지도 없게 만드느 것을 필승 방법으로 삼고 있는 이 영화는 지금 우리에게 어떠한 판타지보다 판타지로 다가온다. '그저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나의 가장 어려운 싸움'이라고 말하는 이 영화는 코미디를 빙자한 처절한 외침과도 같다.


가장 힘든 지점에 있을 때야말로 가장 주변인들을 웃기고 싶어질 수밖에 없는 어긋난 인간이어서, 더더욱 그렇게 느끼고 만다.


건물을 부수고 우주를 지키는 어벤져스보다 더, 간절하고 속된 절규로, 더 내밀하고 시끄러운 외침으로 다가오는 이 영화는 아주 오랜만에 극장에서 느껴 본 영화적 쾌감으로 나를 다시 키보드 앞으로 멱살을 잡고 끌고 온 좋은 이야기로 그 값어치를 해냈다.


다 아는 이야기를 너만이 아는 이야기처럼, 너만 아는 이야기를 모두가 알게끔 다시 글로 써낼 수 있는 이야기로 만들어 주는 이는 얼마만큼 더 괴로운 높고 낮음을, 깊고 어둠을, 평안과 어지러움을 견뎌냈을지 체감하게도, 외면하게도, 하는 영화. 모든 것들이 모든 자리에서 한 번에 존재하고 있음을, 또는 절대 그럴 수 없음을 비관하며 온 감각을 마비시키는 이 영화가 나는 아주 마음에 든다.


몇 광년은 떨어진 우주의 것처럼 다르더라도. 죽도록 부딪치더라도. 결국 너와 같은 결말에 닿고 싶다는 그 마음이, 웃음으로 부서지는 아름다운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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