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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따코 May 24. 2023

도덕적 인간

어느 날의 고백

1. 한 번에 버스가 서너 대씩 오는 큰 버스정류장에 서있었다. 곧 도착할 버스에 대한 음성 안내가 나오지만 도로의 소음과 사람들의 부산스러움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한 남자가 서있었다. 핸드폰 스피커를 귀에 들이댔다 뗐다 반복하며 도착하는 버스마다 탔다 내렸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남자는 누가 보아도 난처해 보였다. 시각 장애인인 듯했다. 그때 내가 타야 하는 버스가 정류장으로 들어섰다. 나는 그 남자를 등지고 내가 타야 할 버스에 올라타고 그 자리를 떠났다.

2. 한 할머니가 길을 물어왔다. 추위가 거짓말 같이 걷히고 봄보다 익어버린 날씨가 푹푹 찌던 날이었다. 할머니는 ‘전화국’이 어디냐 재차 물었고, 나는 핸드폰 지도에 아무리 찍어도 나오지 않는 ‘전화국’이라는 옛 이름 말고 할머니의 목적지에 대한 다른 단서를 찾아야 했다. 할머니는 슬그머니 카드 하나를 들이미셨는데, 취약계층에게 기부물품들을 전달하는 곳에서 이용하는 것이었다. 카드에 적힌 이름대로 지도를 찍고 길을 안내했다. 아무래도 말로 설명하는 데에 한계가 있을 것 같아, 할머니께 따라오시라 말하곤 같이 길을 걸었다. 할머니는 뒤를 따르시며 그저 길을 알려주면 내가 알아서 찾아가마 하며, 미안하다는 내색을 하셨다. 그러나 나는 꿋꿋이 길을 안내하겠다고 앞장서고 있었다. 그때, 철퍼덕.


할머니가 넘어지셨다. 끌고 온 캐리어형 장바구니의 바퀴도 박살이 나버렸다. 손바닥이 조금 까지셨고 무릎도 부딪히신 것 같았다. 아마, 내 걸음이 빨랐나 보다 했다. 미처 노인의 발걸음 속도가 얼마나 느린지를 헤아리지 못한 탓이었다. 부러진 바퀴를 장바구니에 넣어드리고 마지막 직진 코스까지 안내해 드리고 뒤를 돌아서는데 마음이 무거웠다. 괜히 착한 일을 한다고 나서놓고 누군가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몸을 다치게 한 것은 아닌지. 조금만 더 천천히 걸을 걸.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일 걸 후회가 들었다.

3. 독립 서점에 갔다. 알고 보니 무인으로 운영되는 곳이었다. 원하는 만큼 앉아 책을 볼 수 있는 공간이 있었고, 구입하고 싶은 책이 있으면 주인에게 책 이름을 문자로 보내고, 맞는 가격을 계좌로 이체하는 형식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신기한 공간이었다. 개인의 도덕성을 시험하는 공간 같기도, 믿는 공간 같기도 했다. 독립 서점 이전에 들른 곳이 있었다. 요즘 유행하는 셀프 사진관이었는데, 그곳엔 선글라스 모자 같은 각종 소품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그중 선글라스 하나를 골라 친구들과 사진을 찍었다.

친구들과는 잠시 찢어져 각자만의 시간을 보내보자 했고, 그래서 들른 곳이 독립서점이었다. 그런데, 서점에 도착해 주머니를 만지니, 낯선 물체가 만져졌고 꺼내보니 사진관에 있던 선글라스였다. 결제를 하고 가방을 챙기느 손이 바쁜 사이에 바지 주머니에 넣고는 까먹은 모양이었다. 절대 의도하지 않았지만 도둑질을 한 셈이었다. 솔직히 소품용 선글라스라 그리 값비싸 보이지 않았고 돌아가는 길이 멀어 장난식으로 넘길 셈으로 친구들에게 말하니, 친구들은 ‘네가 한 것은 도둑질’이라며 등기로라도 선글라스를 돌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 ‘도둑질’이라는 말에 괜히 억울해져서는 입을 삐죽 댔지만 다시 돌려주기 위해 수고할 마음이 선뜻 들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쉬이 외면할 수 있는 사람.

애매하게 친절을 베풀다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

타인의 도덕성에 예민하지만 막상 실천에는 둔감한 사람.

개인의 도덕성은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알 수 있다. 모두 바른말을 할 수 있지만 바른 행동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열차 선로에 몸을 던진다던가, 화염 속으로 뛰어든다던가, 아무도 없는 횡단보도에서 무단횡단을 하지 않는다던가, 남에게 상처 입힐 말을 내뱉지 않는다던가. 머리로는 알지만 몸이 쉽사리 따르지 않는 일을 해내는 사람들을 보고 우리는 확실히 ‘도덕적인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판단하기 모호한 정도의 도덕성을 타고난 인간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양심은 어느 쪽으로 조금 더 기울어져 있을까. 그 애매함이 견딜 수 없어 자기혐오로 빠져들 때도 있다. 좀 더 확실하게 구분되지 못해서 자꾸 세상 밖으로 튕겨져 나가려는 원심력을 이기지 못할 것 같을 때가 있다.


언젠가 나의 구심점을 찾을 수 있을까
머리보다 몸으로 하는 일에 익숙해지고 뿌듯해할 나를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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