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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따코 Feb 09. 2021

불행할 권리

제대로 삼켜내지도 뱉어내지도 못한 마음은 식도에 걸려 내뱉는 말에 독을 서리고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그렇게 나는 줄곧 쉽게 불행해진다.


‘가정사’라는 것. 가정사 없는 집 하나 없다지만 어릴 때는 우리 가족만 화목하지 못한 것 같고, 나의 부모만 아주 많이 결핍된 것 같다 생각했었다. 나 말고 주변의 가정은 아무래도 행복해 보이던 때가 있었다.


그럴수록 친구들에게 가족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어려웠다. 특히 오래된 친구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들이 내 가족의 얼굴을 안다는 것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고, 결국 내 얼굴에 침 뱉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앞섰다.


또 어리게도, 나를 잘 아는 만큼, 내가 고민을 털어놓았을 때, 친구가 내 상황에 완전히 공감해주기를, 그 불행의 구렁텅이에서 나를 좀 구해주기를, 혹은 함께 발이라도 살짝 담가주기를 바랐었는지 결국 충분히 공감받지 못했다는 좌절감을 몇 번 맛보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다 한 친구를 만났다. 내 가족의 얼굴을 모르며, 내 가족과 마주칠 일도 없는, 나와는 아주 먼 지역에 살고 있는 친구였다. 그 애 앞에서는 누구에게도 말하기 꺼려지던 이야기들도 자연스럽게 나오곤 했다. 비슷하게 맞닿아 있는 불행의 고리가 우리의 관계를 더욱 끈끈하게 했다.


얼마 전 오랜만에 그 친구를 만났다. 그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에 지쳐 허덕이고 있었다. 그러다 그 친구가 그 말을 한 것이다. “그래도 언니네 가족은 평범하잖아”


그 말에 순간 많은 것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평범’이라는 단어 그리고 내 불행에 비해 당신의 불행은 비할 바 아니라는 ‘비교’의 잣대가 우리의 관계 안에도 들어서 버린 것이다.


다른 이는 몰라도 서로는 서로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비교라는 개념이 들어서자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그저 남에겐 말 못 하는 치부를 쏟아내는 각자의 쓰레기통, 멀리 있어서 보기 싫지도, 냄새가 나지도 않아 편리했던 그런 존재였나.라는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말은 애써 숨겨왔던 나의 콤플렉스 건드렸다. 바로, 이미 나는 나의 불행을 늘 남의 불행과 비교해 왔다는 것.


내가 가지는 불행은 그렇게 큰 것이 아니다. 나의 상황은 ‘남’에 비해 매우 호전적이며 겨우 이만큼의 불행에 굴복하는 자신은 꽤나 나약한 인간일지 모른다. 나는 배부른 행동을 하고 있고, 내가 유난이고, 약한 소리 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혼자 내 불행을 저울질하다 이따금 아니 자주 억울해졌다는 것. 나는 누구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일까? 나는 지금 당장 목에 가시가 걸린 듯, 손끝이 갈라지듯, 너무 아파 어쩔 줄을 모르겠는데. 내가 아님 누가 나의 불행을 존중해주지? 아파해주지? 치료해주지?


그래서 나만큼은 꼭 내가 아닌 이의 불행을 그대로 존중해주고 싶었다. 누군가도 분명 자신이 충분히 불행하지 않아서 불행해하고 있을 테니까.


그 친구가 나의 불행의 무게를 함부로 가늠했을 때, 나는

“내가 평범하다고? 그래 그렇다면 네가 가진 불행도 평범한 것에 지나지 않아. 우리는 다 똑같이 힘들고, 자기의 아픔만이 가장 크다고 생각하지. 너와 같은 고민을 가진 애들 내 주변에 널렸어”

치졸한 반격이었다. 남의 불행을 존중해주겠단 야무진 결심은 치사한 방어기제 앞에 가뿐히 허물렸다.


나는 그의 불행을 아주 고귀하게 지켜주고 싶었다. 그의 기쁨보다, 행복보다, 그 어떤 환희보다 더 소중하게, 절대 부서지거나 깨지지 않게, 어긋나지 않고 모나지 않게 최대한 둥글 거리는 모양이 되도록 어루만져 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최악의 방어로 공격을 택한 나였다. 그냥 솔직히 말했어야 했다.

 “나는 너와 나의 불행을 어떠한 비교 선상에 두고 싶지 않아. 우리 서로 그 자체로 온전히 불행해. 나는 나의 그 어떤 감정도 너에게서 폄하받고 싶지 않아, 나도 그렇듯 너도 그래주겠니? 우린 친구잖아. 그게 친구잖아”


아마 그 친구도 그날의 대화를 가슴 아파하고 있을지 모른다. 나의 가족이라도, 친구라도, 연인이라도 누군가 당신의 불행을 함부로 대한다면, 당신은 그것을 거부하고 비판해야 한다.


내 불행을 남과 비교하기 시작할 때 진짜 지옥이 시작된다. 저 사람보다 내가 더 불행해서, 그래도 그 사람보단 내가 덜 불행해서, 내 불행은 그 자리에 고이고, 썩고, 악취를 풍긴다.


비교로 시작한 불행은 또 다른 비교로 이어진다. 나보다 더 비참하거나 잔혹한 남의 상황을  들이대며, ‘그래 그에 비하면 나는 행복한 거야’라는 경솔한 방식으로, 우월감으로 우울감을 이겨내는 이기적인 흐름이다. 그 흐름대로라면 분명 본인은 더 끝없는 비교의 늪으로 빠지게 된다.


불행을 비교한다는 일은 여러모로 위험한 일이다. 비교함으로써 극복한 불행은 완전한 극복이 아니며, 비교하며 도출해낸 궁극의 불행은 자기 연민이며, 그저 드라마다. 누구든 마주치고 싶지 않은 ‘내가 세상에서 제일 힘들고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류(類)의 인간이 되는 것이다.


내 불행은 내 것이다. 행복추구권이 헌법에 보장되어 있듯, 내 불행 또한 불가침의 영역이다. 누가 뭐래도 나는 내 마음대로 불행할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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