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과 기계가 모든 걸 대체할 수 있는 세상
과학과 최신 기술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 과학 뉴스는 항상 나를 설레게 한다. 불과 1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스스로 달리는 자동차를 도로에서 볼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2016년 3월로 시간을 거슬로 올라가 보자.
당시 구글은 딥러닝 기반의 인공지능(AI) 알파고를 앞세워 세계 최고의 바둑기사 이세돌 9단을 꺾어버렸다. 바야흐로 인간의 지능이 인공지능 앞에서 무릎 꿇은 참담한 날이었다. 사람들은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으며, 마치 터미네이터의 skynet 이 등장해 내일 당장이라도 인류를 집어삼킬 것 같은 막연한 불안감이 극에 달하는 사건이었다. 6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2021년 인류는 펜데믹이라는 수백 년에 한 번 겪기도 힘든 역사적인 이벤트를 경험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경험하고 있다.
유래 없는 전인류 단위의 백신 접종을 계기로 우리는 곧 covid19으로 대표되는 팬데믹을 벗어날 것이라 기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은 단 시간 동안 너무 극적으로 바뀌고 있다. 사람들은 점점 비대면 만남을 익숙하게 느끼고, 기업들은 단계별로 더 재택근무 늘리거나 원격근무의 장점을 십분 활용하고 있다. 첨단 기술을 앞세운 기업들 역시 인간이 배제된 자율화된 서비스를 속속 내놓고 있다.
최근 또 한 가지 흥미로운 뉴스는 컴퓨터 코딩을 인공지능이 직접 해석하여 인간의 언어를 컴퓨터 코드로 바꿔준다는 뉴스였다. 또 다른 하나는 AI가 직접 사용할 반도체의 설계를 AI 스스로 설계했다는 뉴스였다.
위 두 가지 뉴스가 시사하는 바는 명확하다. 창의력과 지능의 영역에서조차 점점 더 인간이 배제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과학자들과 인류학자들은 애써 인류 존재의 의의를 부각하려 노력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내 눈에는 그들의 변명은 이세돌 9단이 알파고와의 대결 직전 많은 언론사들이 확신하던 인류 지능의 우월성을 찬양하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본다.
처음 인공지능이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우리가 인식하던 그렇지 않던 대중은 서서히 그 편리함에 매료되어 익숙해지고 무감각해진다. 불과 15년 전 스마트폰이 없던 2G 폰의 시절이 기억나는가? 아마 스마트폰에 오직 숫자키만 존재하고 어떤 다른 화면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지금 젊은 세대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울 것이다.
인간의 자율성과 창의력이 점점 무의미해지는 시대에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어디인가?
의외로 답은 간단하다. 우리 스스로 인간의 가치에 집중하는 것이다.
지금은 가속화되가고 있는 문과계열의 천대는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 교육과정에서 인문계열과 공대 계열을 두부 자르듯 나누는 행위는 위험하기 그지없는 사고방식이다.
소위 잘 나가는 IT회사에서 몸값이 치솟고 있는 개발자들은 공대 출신의 코딩에 최적화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위에 서술한 인공지능의 범위가 코딩의 영역을 침범하는 순간 이들 대부분이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마치 현재 우리 주변의 운전기사들이나 공장의 오퍼레이터가 그들의 일자리를 위협받듯 말이다.
근 3년 이내로 앞서 언급한 기술직 종사자들의 전문성은 의미가 없어지기 시작할 것이고 10년 이내에 지금 고급 일자리로 취급받는 대부분의 기술 관련 일자리는 인공지능에 대체될 것이다. 여기에는 전문직도 해당된다.
코딩 교육이나 소프트웨어 개발 교육은 기초 교육분야에 필수교육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지만 이것만으로 먹고사는 시대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인문학과 예술 그리고 공학의 경계가 무너지고 이것을 통합적으로 다룰 수 있는 사람들이 미래의 먹거리를 거머쥐는 주인공들이다.
2031년 고소득을 올릴 수 있는 직종은 다음과 같다.
시인, 화가, 행위예술가, 철학자, 심리상담사, 유아교육자
여러분은 무엇이 떠오르는가? 지금 우리 주변에서 가장 영위하기 어려운 직업군들이다. 한마디로 돈 벌기 제일 어려운 직업군에 속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위 직업군이 왜 10년 후 가장 유망한 직종이 되는지 하나씩 설명해보자.
시인.
소프트웨어 코딩에 있어서 가장 핵심은 코드를 간단명료하고 직관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복잡한 코드는 많은 오류를 동반하고, 다른 프로그래머들이 만들어 놓은 패키지와 접목 시 예상 불가능한 문제점들을 야기시킨다. 물론 단순한 코드가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필요한 기능과 의미를 함축할 수 있어야 진정 높은 가치의 코딩이 된다. 만약 인간이 활용하는 자연어와 인공지능의 코딩 기술이 일정 수준을 넘어가면 프로그래머는 굳이 컴퓨터 언어로 된 복잡한 수식을 가지고 코딩을 진행할 필요가 없어진다. 프로그래머는 그저 대화하듯 인공지능에게 이런저런 코딩을 맡기면 그만이다. 그것을 기계어로 해석하는 것은 그저 단순한 반복 작업이 될 테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과정은 마치 장문의 문장을 단 몇 줄의 시구로 압축하는 시인의 작업과 매우 비슷하다. 결국 기술의 진보는 시인을 매우 훌륭한 프로그래머로 만들어 준다.
단, 여기에는 전제조건이 있다. 지금 우리 주변의 시인을 떠올려서는 안 된다. 시인과 같은 문학적 배경도 출중하되 컴퓨터의 하드웨어 그리고 핵심 소프트웨어의 구동 원리도 확실이 꿰고 있는 인재여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이공계열과 문학계열을 칼같이 나눠 공부하는 세대는 여기에 적응할 수 없다.
화가와 행위 예술가.
그림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 중 한 가지다. 그렇다면 그림은 인간만 그릴 수 있을까? 아니다 컴퓨터도 그림을 그릴 수 있고, 심지어 기계의 붓터치는 인간의 그것을 초월해 버린다. 그렇다면 왜 화가는 미래의 유망 직종인가? 아마도 그 행위의 주체가 인간 자신이기 때문일 것이다. 인공지능이나 기계가 모든 일거리와 생산적 활동을 차지해버리면 사람은 잉여 시간을 다른 곳에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그 잉여시간의 목적은 오직 인간 스스로의 행복과 만족을 위한 행위가 될 것이다. 만약 기계가 인간보다 더 수준 높은 그림이나 행위예술을 한다한들 그것을 대하는 인간은 결코 행복하지 않다. 여기서 행복의 기준이 생기게 되는데 이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인간을 대신해 노동력을 수행하는 기계는 '인간을 행복하게 하라'라는 명령어를 해석할 때 가장 즐겁게 그림을 그리거나 인간 스스로 높은 경지의 예술활동을 하는 행위예술가에게 높은 점수를 부과한다. 이것은 마치 우리 뇌에서 도파민을 통해 우리 행동이나 생각에 보상하는 작용과 마찬가지로 이 것 자체를 인간 존재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으로 여기게 될 것이다. 이런 보상 행위는 지금의 돈이나 사회보장 점수처럼 우리 생활에 화폐처럼 사용할 수 있다. 혹은 소셜 네트워크의 조회수나 좋아요 등과도 매우 유사하게 작동하여 우리 생활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게 된다.
철학자.
사회생활을 하면서 문제가 생기면 우리는 법을 찾게 된다. 법이란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 간의 갈등을 합리적으로 해결하는 하나의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컴퓨터 프로그램도 우리 사회의 법과같이 매우 정교한 프로그램을 통해 구동되는데, 이 기본적인 원리는 근본적으로 거의 차이가 없다.
법을 구성하는 가장 근본이 되는 학문은 바로 철학이다. 지금은 입법부의 국회의원들이 철학과 사회 그리고 사법부 및 행정부의 법 집행을 연결 짓는 교각 역할을 하고 있지만, 인공지능과 사회 전반적인 시스템이 자동화되는 시점에서 국회에서의 기술적 행위들은 그저 거추장스러운 걸림돌이다. 매우 빠르게 발전하는 우리 사회에서 법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이유가 입법부의 국회의원들이 법을 개정하고 업데이트하는 행위를 수동으로 처리하기 때문에 그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 사회의 가장 기초 핵심이 되는 법률은 컴퓨터의 운영체제 OS (Operating System)에 비교할 수 있다. 이는 모두 자동화될 것이고 그 핵심에는 기초 철학자들이 컴퓨터와 함께 그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유아 교육사와 심리 상담사.
내가 제품을 사거나 회사의 서비스에 불만이 생기면 그 회사의 전화번호를 찾는다. 뿐만 아니라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음성을 통한 서비스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그런데 만약 상대측의 목소리에서 사람의 냄새가 느껴지지 않고 기계가 응대할 경우 우리는 큰 불편을 느끼게 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상대방을 인식할 때 나와 본질적으로 유사한 특성을 가진 존재를 찾으려는 습성이 있다. 인간의 신체구조가 그리 합리적이지 않은 구조임에도 휴머노이드 로봇을 개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과연 모든 것이 기계와 자동화된 시스템으로 대체될 미래에는 인간이 스스로 제공해야 할 서비스는 다 없어지는 것일까?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기 때문에 굳이 비효율적으로 제공해야 하는 서비스들이 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상대방을 나와 동일한 존재로 인식했을 때 비로소 받아들일 수 있는 범주의 것들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3사짜리 유아의 부모님이라면, 100% 완벽한 인공지능 로봇으로 운영되는 어린이집에 보내서 인격을 형성시키겠는가? 조금은 실수가 난발하더라도 사람이 운영하는 어린이집에 자신의 아이를 맡길 것인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사람에게 맡길 것이다. 대학교육이라면 인공지능이 강의를 해도 되지만 갓 태어난 아기나 아직 인격이 형성되지 않은 영유아는 결코 기계로부터 양육될 수 없다는 인식이 강하게 있다.
그렇지만 역시도 지금의 어린이집 선생님과는 많은 차이점이 있을 것이다. 모든 선생님이 사람일 필요는 없을 것이고, 다른 보조 로봇이나 인공지능을 잘 다룰 수 있는 선생님이 고부가가치 인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지금까지 서술한 내용이 100년 후 미래의 이야기처럼 들린다면 확신하건대 늦어도 30년 안에는 도래할 미래라 말할 수 있다. 과학기술과 사회적 변화는 항상 점점 더 빠르게 바뀌기 때문이다. 보통 미래의 10년 동안의 변화가 과거 100년 동안의 변화의 폭보다 크게 움직인다. 또한 빌 게이츠가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는 1년 후의 일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정작 10년 후의 미래는 간과해버린다.
결국 우리가 지금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 활동의 대부분은 과학기술의 결정체인 그것에게 대부분 양도해야 할 것들이다. 그렇다면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급격하게 변화하는 이 사회에서 과연 우리 스스로의 정체성과 가치를 잃지 않고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가려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가 이 지구 상에 발 딛고 살아가는 한 우리 스스로 인류의 가치를 저버리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