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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다리아저씨 Nov 15. 2021

언어의 모순

듣고 싶은 것만 들을 권리

노출에 시대에 살고 있는 나는 모든 것에 연결되어 있다.

보고 싶지 않아도 듣고 싶지 않아도 눈과 귀를 통해 많은 것들이 흘러든다. 

정보는 언어라는 매개체를 통해 전달된다. 

우리의 뇌는 언어라는 수조 안에 둥둥 떠있는 셈이다.


언어는 의사소통을 위해서 진화해 왔다. 만약 언어가 없었다면 인간 역시도 여타 동물들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다. 언어는 필연적으로 사고를 동반한다. 그리고 우리는 사고를 통해 좀 더 복잡한 생각을 하게 된다. 가령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처럼 말이다. 생각이라는 게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논리적 사고가 가능한 이유는 언어와 문자가 있기 때문이다.


간단한 사고 실험을 해보자.


당신이 지금 읽고 있는 문장을 머릿속의 목소리를 이용하지 않고, 마음으로만 느끼고 인지해 보라. 혹은 어떠한 다른 생각도 좋다. 언어와 문자를 떠올리지 않고 생각이라는 것이 가능한가?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나는 외국여행을 하거나 외국인들과 어울릴 때 상대적으로 마음이 편안함을 느낀다. 그래서 한때는 외국에 살아볼까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있었다. 그리곤 생각했다.


'도대체 한국 사회는 왜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할까?'


처음에는 대한민국 사회의 많은 문제점이 눈에 보였다. 그러나 천천히 되짚어보니 나의 모국어가 주는 스트레스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한국어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내가 가장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언어이다. 그래서 너무나도 자세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대화를 통해 상대방의 감정을 읽을 수 있고, 반대로 내가 상대에게 그 감정을 전달할 수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지나치며 듣는 욕 한마디에도 내 감정은 요동치게 만들 수 있다. 


결국 가장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언어의 유희가 나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상대적으로 어리숙한 외국어 덕에 외국 생활에서는 대인관계의 스트레스를 피할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지금도 외국어 공부를 계속해서 하고 있다. 더 잘 이해하고 그들의 생각을 읽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언어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사람들과의 관계가 넓어질수록 더 많은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그렇다면 나는 스스로 듣지 않을 권리조차도 점점 포기하고 있는 게 아닐까?


스마트폰의 발명 이후 과거와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인적 네트워크망을 실시간으로 유지하고 있다. 당장에 전화번호부에만도 500명이 넘는 연락처가 있는데,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카카오톡까지 합치면 몇 명 일지 감도 잡히질 않는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과연, 한 명의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대인관계는 몇 명인가?'


당신이 만원 지하철에 타면 느끼게 되는 불쾌함은 모르는 사람과의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이다. 인간은 친근하지 않은 사람이 18인치(약 45cm) 이내로 들어오면 불편함을 느낀다고 한다. 여기서 친함이란 가족이나 연인 수준의 친근함을 이야기한다. 직장동료나 친구 정도는 약 1m 정도의 거리까지를 불편하지 않은 거리로 허용한다고 한다. 그러니 만원 지하철에 있는 당신이 불쾌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정작 친구라는 명목으로 소셜 네트워크에 수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지하철이나 카페에서의 물리적 거리는 어찌해보겠지만, 온라인상의 거리는 물리적으로 통제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잠수'라는 단어가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래서 무인도나 어디 외계 행성 같은 곳에서 혼자 살지는 못한다. 하지만 연결과 소통이 넘치는 현대 사회에서는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물질문명의 끝판왕을 보여준 대량생산의 부작용으로 미니멀라이즘이 대세인 지금 '우리의 인간관계는 공장 찍어내 듯한 대량생산 시대에 살고 있지 않는가' 다시 한번 자문해본다.


이제 듣지 않을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외부와의 소통을 자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Image =  Pixabay로부터 입수된 Couleur님의 이미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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