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뚝거리며 걷는 용기

나는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다.

영화를 보러 갈 때, 결말을 미리 알기를 원하시나요, 아니면, 모르기를 원하시나요?


솔직히 저는 결말을 미리 알고 영화를 보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래서 극장에 가기 전에 영화의 내용을 살펴본다거나 온라인상의 스포일러(spoiler)를 찾아보기도 합니다. 영화의 재미를 망친다며 스포일러에 질색하는 분들도 많지만, 미주알고주알 다 알려주는 정도가 아니라면 오히려 반기는 편에 속합니다.


이를 테면, 어릴 적 애니메이션 속 악당과의 싸움에서 주인공이 결국엔 모든 것을 이겨낸다는 사실만큼은 미리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고 나면, 마음이 놓였고, 영화에 더 깊이 빠져들 수 있었습니다. 때로는 악당 속에서 제 모습을 발견하고 나면 악당이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적당한 수준의 스포일러는 제게 늘 환영이었습니다.


올해, 당신의 삶은 어떻게 바뀌기를 원하시나요?

지금처럼 가면 기대한 대로 되는 걸까요?


저는 아직 미적지근한 어딘가에 서 있습니다. 불확실한 것이 더 많아서 그럴까요, 주변 분들에게 올해 계획을 말하면서도 말끝이 조금은 흐려집니다. 운세라도 한 번 볼까 싶다가도, 혹시 바라는 대로 나오지 않으면 어쩌나 하며 결국 참고 맙니다.


영화의 스포일러와도 같은 운세,

보는 것도 보지 않는 것도 불안하기는 매한가지입니다.


한 조사에 따르면 운세 시장은 여전히 빠르게 성장하고 있으며, 특히 청년층의 상당수가 운세 콘텐츠를 즐긴다고 합니다. AI라는 날개를 단 시대에도 인간이 가진 원초적인 불안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불안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변화가 많아서 불안한가요, 아니면 없어서 불안한가요?


내일도 태양은 다시 떠오를 테고, 세상은 오늘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속도라면 수년 내에 AI가 우리의 삶을 아주 크게 바꿀 거라는 말도 들립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제가 바라는 것은 이런 거대한 흐름과는 조금 다릅니다. 올해 계획한 것들이 제 일상 안에서 조금 더 빨리 자리 잡았으면 좋겠고, 세상의 변화는 제게 도움 되는 방식으로 적당히 나타났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갈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헛된 기대를 품는 모습이 낯설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운세를 믿지 않으면서도 늘 궁금해합니다. 참으로 모순적입니다.




아직 회사에 다니던 시절, 저는 힘들어하는 회사 동료들에게 타로카드를 읽어 주곤 했습니다. 카드의 신비로움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한 발 떨어져서 넌지시 삶을 바라보는 방식 때문이었을까요. 그들은 누르고 감춰 두었던 마음속의 짐을 꺼내어 바라보는 용기를 보여주었습니다.


물론, 카드 중에는 미래를 말하려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크게 해석해 줄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미래에 대한 스포일러가 아니라, 용기를 내어 스스로 내린 선택과 마주하는 시간이었으니까요. 누군가 함께 해주는 든든함과 위로가 힘이 되었던 것이지요.


미래를 미리 알고 살아가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언제 어떻게 생을 마감하는지 알고 나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까?

톰 히들스톤이 주연한 '척의 일생 (The Life of Chuck)'이라는 영화는 바로 이런 질문을 다룹니다. 한 평범한 인물의 생을 따라가며,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씩 달라집니다. 삶의 방향을 전환하는 저에게는 큰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남겨두고, 저를 뒤흔든 몇 문장들을 함께 나눕니다.


타로카드가 미래를 예언하기보다 선택을 마주하게 했듯이, 어떤 영화는 삶 전체를 다시 바라보게 합니다.


Charles Krantz: 39 great years! Thanks Chuck!
근사한 39년이었어요! 고마워요, 척!



There's an art to it. What I do, all these files here, all these folders, there are all people's lives. Every choice they made.
거기엔 예술이 있어. 내가 하는 일, 이 모든 파일들, 이 모든 폴더. 이게 다 사람들 인생이야, 그들이 한 선택들이고.


모든 선택들이 모여 한 사람의 인생을 이룹니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늘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때 다른 전공을 선택했더라면, 기회가 왔을 때 해외로 나갔더라면,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어쩌면 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글조차 쓰고 있지 않을 수도 있겠군요. 올해 저의 계획들도 이런 아쉬움 위에 세워진 목표들입니다.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애쓰는 것은 본능적인 성장의 방식일 겁니다. 하지만 자신을 보완해야 하는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삶은 지치기 쉽습니다. 남들과 비교하며 쳇바퀴처럼 달리는 일도 불안하기만 합니다.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쉽게 내려놓지 못하는 굴레였습니다.


'모든 삶이 예술이다'라는 말을 하면서도 저에게는 인색했습니다. 더 오래 머물 수 있었던 빛나는 순간들을 그냥 흘려보냈습니다.


지나간 것은 어쩔 수 없겠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모닝커피 한잔도 천천히 음미하고, 아이와의 짧은 대화에 온 마음을 담고, 이렇게 글을 쓰는 순간도 기꺼이 즐기고 싶습니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들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습니다.

I am wonderful, and I have a right to be wonderful.
나는 경이로운 존재이며, 경이로울 자격이 있어.

그렇다고 해서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안정적인 사업을 운영하는 친구가 마냥 부럽기도 한데, 무턱대고 새로운 걸 시도하기엔 책임과 시간이 부담스럽습니다. 지켜야 할 체면과 가족과 노후에 대한 의무도 있습니다. "정신 차려!"라는 현실의 목소리는 충분히 타당합니다.


그렇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다른 목소리가 올라옵니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는 없을지도 몰라, 네 삶을 살아!"

누가 대신 살아주는 것도 아니고, 하나뿐인 인생을 눈치 보며 휘둘릴 수만도 없습니다.


두 목소리 모두 틀리지 않았습니다.


Do I contradict myself? Very well then, I'll contradict myself. I am large, I contain multitudes.
내가 모순되는가? 그렇다면 좋다. 나는 모순될 것이다. 나는 거대하며, 수많은 것을 품고 있다.


결국, 한 발에는 현실을, 다른 발에는 내면의 목소리를 담고 걸어야 할 것 같습니다. 손흥민 선수같이 양 발을 잘 쓰면서 달리고 싶지만, 저는 절뚝거리며 걷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완벽히 균형 잡힌 사람보다, 균형을 찾으려 애쓰는 사람이 더 인간적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변화가 계속될 겁니다. 역경도 오겠지요. 하지만 저는 하나의 정해진 결말이 아니라, 선택에 따라 새롭게 펼쳐질 여러 갈래의 미래를 기대합니다. 열린 결말 속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경이로운 보물을 기다리듯이.


삶을 챙긴다는 것은, 미래를 통제하려 애쓰기는 일이 아니라 지금을 주의 깊게 살피며 나만의 선택을 해가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언제 어떻게 생을 마감하는지 알고 나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지금 제 대답은 이렇습니다.


오늘은 절뚝거리더라도, 두 발로 딛고 서 있기.

결말은 열어둔 채, 매 순간을 호기심으로 맞이하기.


나는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