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드러내 주는 것에 마음을 여는 연습
한때는 너무나 평범해 보였던 것들도 시간이 지나면 특별함으로 바뀌나 보다. 아버지의 삶을 떠올리다 보면, 눈에 잘 보이지 않던 순간들이 오히려 가장 선명하게 다가오곤 한다. 평범한 일상 속에도 저마다의 결이 숨어 있다는 걸, 나도 나이가 들어서야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1939년 봄,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시골 마을에서 한 사내가 태어났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장차 농부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흑백 사진 속 20대 초반의 청년은 소매를 걷은 양손을 허리춤에 올리고 턱을 조금 치켜세운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사진을 보는 내 얼굴에 미소가 번지는 걸 보니, 사진 속 훈남도 분명 미소 짓고 있었을 것이다. 과연 이 청년은 어떤 꿈을 꾸고 또 무엇을 버텼을까?
앞집이 아재고 옆집이 아지매인 집성촌에는 50여 가구가 넘은 안동 김 씨와 진성 이 씨가 터를 잡고 살고 있었는데, 훈남의 이 청년은 같은 마을의 한 살 아래 처자를 아내로 맞아 살림을 차리게 된다. 한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니 서로의 존재를 몰랐을 리 만무하다. 단옷날 그네 바람에 실려왔을 여인의 향기를 맡았을 테고, 한여름 풀지게에 배인 땀냄새도 콧등을 지났을 것이다. 우물가에서 물 바가지를 서로 나눴을지도 모른다.
아랫마을 총각과 윗마을 처녀라는 사실도, 두 성씨를 이어주는 부부가 되었단 소식도 이웃 마을에서는 그저 시큰둥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사람들의 관심은 연애였는지, 중매였는지 정도였을 테니. 이 결혼으로 인해, 마을 사람들은 단번에 서로 사돈 간이 되어 버렸고, 이 풋사과 같은 부부가 결코 녹록지 않을 마을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하게 될 걸 절대 몰랐을 것이다.
결혼 한지 얼마 되지 않아 새색시를 남겨 둔 채 젊은 남편은 입대를 하고 만다. 휴가를 나와서 애기가 생겼다는 것을 알았다고 하니 새색시에게는 얼마나 갑작스럽고 오랜 이별이었을까. 시댁에서 눈칫밥 먹으며 기다린 남편의 첫 휴가, 살가운 위로 한마디 건넬 줄 모르고 복귀한 남편이 얼마나 야속했는지 여든이 훨씬 지난 오늘까지도 되새김질 거리가 되었다.
3년의 군생활을 마무리할 시점에 발생한 끔찍한 지뢰 사고. 갑자기 사라져 버린 왼쪽 아래쪽 다리는 젊은 남편의 기개와 꿈을 모두 가져가 버린다. 목발을 짚은 팔은 연신 아파오고 오른쪽 다리에만 의지한 걸음은 더디기만 하다. 훗날 남편은 고향으로 돌아오는 이 길이 제일 힘들었다고 회상을 했다. 백리나 되는 산길을 가득 채운 울분과 창피함, 절망감. 땀에 절어 생경한 몰골을 마주한 새색시는 드러내고 울지도 못했다.
다친 아우가 안돼보여 양지바른 땅을 양보한 형은 도시로 터전을 옮기고, 그때부터 아우는 붙박이 장처럼 고향에 눌러앉아 어쩌면 당연했을 농부가 되어 살아간다. 인근 도시로의 탈출을 시도한 몇 차례의 도전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왔다. 지뢰 사고로 인한 청력 손상은 업무 전화 통화를 힘들게 했고, 단 두 차례 국민학교 교문까지 가 본 것이 전부였던 학력은 자신감을 떨어 뜨렸다.
다시 돌아온 고향, 무엇을 더 다르게 할 수 있었을까. 별 수 없이 받아들이는 수밖에, 잘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열심히 억척같이 일하는 것이 전부였다. 동네 구판장을 하며 아내는 몸통만 한 막걸리 통을 머리에 이고 날랐고, 군에서 배운 남편의 미용기술은 동네 사람들의 중요한 대소사에 요긴하게 쓰였다. 고추값이 좋을 때면 고추 농사를 많이 짓고, 콩이 좋을 때면 콩을 많이 심었고, 한동안 과수원도 하면서 땅뙈기도 조금씩 늘어갔다.
남편과 아내의 타고난 천성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들르는 모든 이들이 일가친척 이어서 그랬을까. 집 마루는 동네 사랑방이 되어 오가는 이들에게 술 한잔 대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그래서였겠지. 겨우 나무를 하는 날이면 마을의 모든 이들이 찾아와 한두 짐씩 나무를 해왔고, 맛난 비빔밥에 술 한잔이 오고 갔다. 그렇게 두 사람은 마을의 중심이 되어갔다.
다섯 아이를 모두 시집장가보내고, 다시 단 둘이만 남은 고향. 한쪽 다리로 무리하며 살아온 남편은 치매까지 얻어 이젠 마음마저 약해지고, 남편의 빈 다리를 대신하려 갖은 고생을 한 아내 또한 병원약 없이는 편히 잠잘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시골 고향은 아픈 부부를 편히 품어주기에 더 이상 안전하지 못했다. 결국, 여든 중반을 넘긴 나이에 도시로, 병원가까이로 터전을 옮겼다.
농사를 떠나 도시에서 살아보고 싶은 남편의 오랜 소망. 너무 늦은 나이에 실현된 탓일까 즐거움도 오래가지 못했다. 남편은 도시 생활을 힘들어했다. 도시의 분주함은 오히려 더욱 외롭게 했다. 여름밤 소쩍새 울음소리도, 문을 열면 눈앞을 가득 채우던 장엄한 불티재 고개도 서늘한 산바람도 이곳엔 없다. 보청기마저 벗으면 얼마 없던 소음마저 사라지고, 혼자만의 외로운 고요 속으로 잠긴다.
삶의 고됨을 받아들이고 묵묵히 걸어온 젊은 시절과는 달리, 눈앞에 펼쳐진 힘든 현실을 피하고 숨고 싶은 마음, 나약해진 본인의 모습에 적잖이 실망했을 것이다. 어쩌다 한 번씩 찾아와 주는 자식들을 빼고 나면 남편에게는 너무나 고요한 도시. 야속하고 또 불안한 도시가 되어 버렸다. 지금 여기를 살아 내는 것이 이토록 힘든 일일 줄이야.
아버지를 모시고 시골에서 나오던 길이었다. 댐을 지으며 수몰된 마을의 옛이야기가 궁금해서 물어본 질문에 아버지는 헛웃음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신다.
”예전엔 이 마을에 소전(우시장)이 크게 열렸지. 집집마다 소를 키웠으니, 장날이 되면 백리 산길을 소를 몰고 다녔지. 소 값이 맘에 들지 않으면 소도 못 팔고 다시 돌아가는데, 한밤중이 되어야 집에 도착했거든. 소가 길을 잘 알아서 아무리 깜깜해도 소만 따라가면 집에 가는 거야. “
그러곤 본인의 옛이야기를 풀어놓으신다. 즐거운 일은 오래된 사진처럼 색이 바래고, 힘들고 후회스러웠던 일들은 컬러 사진처럼 또렷해지나 보다.
"국민학교만 다녔어도 내가 이러고 안 살았을 텐데... 다리만 성했어도... 군대 동기 말대로 부산에서 호떡장사를 시작했더라면... 그때 밭을 물려받지만 않았어도... 그때 낡은 아파트만 처리하지 않았다면... 도시로 이사 가지 않았다면,,,"
그러고는 한 말씀 더 하신다.
"잘 되면 내 덕이고 못 되면 남탓한다더니, 내가 그러고 있네."
어머니가 술동이를 이고 나르고, 아버지가 다친 다리로 돌아오던 바로 그 길은 이제 도로가 놓였다. 그 도로 위를 막내아들과 함께 달리는 지금 아버지는 그때의 힘든 땀냄새가 올라오는지 부쩍 말씀이 많아졌다. 특별함 없이 말하는 아버지가 유난히 특별해 보였다.
한밤중 음속으로 날아가던 전투기가 아무 이유 없이 추락한 적이 있다고 한다. 땅 위에 반짝이는 불빛을 별로 착각했을 것이라고 모두들 추측했다. 지금 어디쯤 날아가고 있는지 조차 가늠할 수 없는 막막한 시간에는 별만큼 무수한 빛들이 땅 위에서도 반짝인다. 산골에 켜진 불빛이든 도시의 가로등 불빛이든 반짝이는 건 매 한 가지다.
아버지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평범함이 얼마나 깊은 결을 품고 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과거의 후회와 아쉬움 속에서도 한 사람의 삶은 여전히 ‘지금 여기’에서 의미를 발한다. 평범한 삶이란 결코 없다. 겉으론 평범해 보여도, 어떤 삶도 그 자체로 하나의 이야기이며 빛이다. 밤하늘의 별처럼 스스로 반짝이는 이야기들. 그것이 우리가 밤하늘의 별을 우러러보는 이유다. 언젠가 빛날 자신의 이야기도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