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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모 Apr 21. 2024

마법의 주문: 아닛짜, 아닛짜

담마코리아 위빳사나 10일 과정을 다녀와서

겨울, 망설임과 기다림

첫 직장을 떠난 후 2013년의 봄이 왔다. 회사원의 삶보다는 좀 더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었다. 사람들의 삶에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어주는 코칭과 NLP에 매료되었고, 변화는 나에게 먼저 일어났다. 안개가 걷히고 길이 보이는 듯했다. 프로그램을 참여하면서 명상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그해 말, 부산 코치협회 회장님이 위빳사나 수행을 하고 왔다는 말씀을 들을 때만 해도 나에게 별다른 울림은 없었다. 그때는 그랬었다.


두 번째 회사, 5년 차에 많은 고민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인지, 그리고 뭔가 모를 허전함과 공허함이 항상 가슴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철학, 노장자, 논어 그리고 마음 챙김을 찾아 읽으며 공허함을 채우려 했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 많은 사색이 일어났던 때였다. 명상을 해보고 싶었다. 늦은 가을 저녁 바람에 서점으로 달려가서 초보자를 위한 단학책을 구입했다. 쉽게 읽힌 탓인지 금세 시들해졌다. 그래도 일어날 것은 일어나게 마련이다. 친하게 지내던 회사 선배가 힘들었을 때 도움받았다며  MBSR 프로그램을 소개해 주었다. 내 안에서 꿈틀거림이 느껴졌다. 드디어 시작된 것이다.  


봄, 시작

하고 싶은 것이 생겼을 때 어떻게 시작하는가?

나의 경우는 그것에 대해 세밀히 알아보는 단계를 반드시 거친다. 사전 조사를 한다고 해야 할까.


풀프레임 카메라를 살 때도 그러했다. 몇 년 정도 지속적으로 사진을 찍다 보면 왠지 모를 답답함이 느껴지고, 이 답답함은 자연스럽게 풀프레임 DSLR 카메라로 이어지게 된다. 구입할지 말지가 아니라 어떤 브랜드를 선택할 것인지가 고민이었다. 전문가들의 추천도 때에 따라서 다르다 보니, 결국 나 스스로 의사결정의 논리를 정하고 또 스스로 검증해 보는 부밖에 없다. 매장을 방문해서 비교하고, 인터넷이 올라온 사진들을 비교하고, 관련 책들도 찾아본다. 그런 시간을 거치다 보면 자연스레 내 안에서 울리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다. 봄부터 시작된 고민은 가을이 지날 때 즈음에 결정이 내려진다. 마지막 단계는 합리적인 가격으로 구입하는 기술적인 부분만 남는다. 할인 정책들과 다양한 프로모션, 해외 직구와 국내 정발, 끼워주는 상품들과 서비스. 겨울이 지나고 나서야 내 손에  니콘 D750이 들려졌다. 우리 가족 역사를 기록할 든든한 조력자가 생긴 것이다.


명상을 시작하려 마음먹을 때도 같은 고민이 일어났다. 여러 가지 프로그램들이 있다 보니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지 고민이 된 것이다.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이 언급하고 또 국제적으로도 알려진 프로그램이 신뢰할만하다고 나름의 논리를 먼저 세웠다. 조계종에서 진행하는 명상 프로그램, 한국명상협회, 담마코리아, 호두마을 등도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비교해야만 했다. 나름의 특색과 장단점이 있었다. 장기적으로 수련을 하여 지도자로 성장하고, 삶의 후반부를 채워나갈 사다리로서 국제적으로 넓게 알려진 프로그램이 나의 욕구에는 더 잘 맞아 들었다. 과감하게 결정한다. 육아휴직 기간 동안 MBSR 8주 일반과정에 참여를 하고, 내친김에 국제 지도자 과정까지 마치게 된다.


일 년 후, 담마코리아를 다녀온 동료의 후기를 전해 들으면서 내 안에서 뭔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명상에 깊이를 더하고 싶은 욕구를 위해서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행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던 말대로 2월까지는 전혀 자리가 없어서, 2024년 3월 7일부터 시작되는 과정에 등록해야만 했다. 기나긴 겨울 지나 새싹이 움트는 3월이라 마음은 더욱 놓였다. 시간이 걸려도 일어날 것은 반드시 일어난다.


오랜 기다림에서 설렘으로

여행은 익숙함이 아니라 낯섦을 맞이하는 것이다. 여행안내 웹페이지의 설명을 읽어보고 전화로 문의를 하더라도 항상 예기치 않은 낯섦과 마주하는 것이 바로 여행이다. 낯선 나의 모습, 새로운 나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렇게 나에게로 여행을 한다. 낯선 틈새로 '새로움’이 비집고 들어온다. 설렌다.


친숙함의 공간, 일상의 습관들이 묻어있는 집에서 진행했던 이전의 집중 수련들과는 달리, 이번엔 모든 것들이 새롭다. 기대도 덩달아 커진다. MBSR과는 어떻게 다른지, 왜 그래야 하는지도 궁금하다. 프로그램 일정부터 숙소나 식당, 주변 환경까지, 모든 것들이 나의 관심 대상이다. 알아차림의 대상이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호기심, 그것이 바로 이번 경험의 실체였다.


10일 코스이지만, 입소일과 퇴소일을 합치면 전체 일정이 12일로 자연스레 늘어나게 된다. 입퇴소 및 이동시 입을 옷가지, 머무르는 기간 동안에 입을 평상복 겸 명상복 두 벌, 양말과 속옷 다섯 세트, 수건 세 개, 손수건 하나, 무릎 담요 두 개, 휴대용 헤어드라이어, 여행용 칫솔, 치약, 비누, 샴푸와 린스, 거울과 빗, 휴지, 물티슈, 로션, 약, 슬리퍼, 보온병 등을 챙기다 보니 제법 규모가 있는 여행가방이 꾸려졌다. 긴 이동 시간을 고려하면 여행용 캐리어보다는 어깨에 멜 수 있는 가방이 더 편리해 보인다. 혼자 가는 여행, 그것도 내 안으로의 탐험에 이렇게 많은 물품이 필요하다니 그저 놀랍기만 하다. 누구에게 잘 보이려고 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처음이라 그런 것이라고 애써 위로해 본다.


괜한 걱정, 기우라는 것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이미 충분히 경험했지만, 막상 새로운 변화가 오면 기대보다는 걱정이 앞선다. 내가 없는 동안에 우리 가족은 아무 일이 없어야 할 텐데. 부모님께 알려드리지 않아서 걱정하실 수도 있을 텐데. 걱정은 발이 워낙 빨라서 눈 깜짝할 새에 이미 내 옆으로 다가와 나보다 더욱더 커져만 간다. 뭘 먹고 그렇게 빠르고 또 그렇게 잘 자라는지. 아내에게 출발과 도착 시간을 알려주고, 프로그램의 주요 내용과 연락처도 미리 알려 준다. 아내에게는 없던 걱정도 새로 생긴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운전해서 가면 센터까지는 두 시간 반이면 충분하지만, 버스로는 족히 여섯 시간은 더 걸린다. 소중한 차는 가족을 위해 양보하고 나는 버스를 탈 예정이다. 혼자만의 버스 여행에 가슴이 설렌다.

출근하듯 아침 일찍 집에서 나와 지하철을 타고 한 시간을 달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다. 8시 20분 고속버스를 타고 전주로 간다. 전주 하면 비빔밥이 아니던가. 원조, 전통 간판이 붙은 집은 하필 오늘 쉬는 날이라서, 터미널 옆 분식집에서 비빔밥을 먹어본다. 인스턴트 같은 맛이다. 따뜻한 점심 햇볕을 맞으며 산책하는 직장인들을 바라본다. 삼삼오오 걸어가는 모습에 눈길이 간다. 회사가 아니라 사람이 그립다. 진안으로 가는 한 시간 내내 창밖을 보며 허전함을 달래 본다.  


진안 시외버스 터미널. 휴가 나왔다가 복귀하던 때가 떠오른다. 허전하고, 아쉽고, 망설여지고, 그리워지면서 무거워지는 발걸음. 백다방의 아메리카노 한잔으로 기분을 달래다 보니 어느새 40분이 훌쩍 지나간다. 콜택시도 택시도 잡히지 않아 마음이 급하던 차에 지나가던 택시가 서서 창문을 내린다. 뒷좌석에 이미 손님이 있지만, 같이 타고 가자고 한다. 뒷자리에 앉아 계시는 할머니의 인심이 후하다.


택시에서는 목적지를 말해야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된다. 기사님도 담마코리아 센터를 잘 아시는 눈치다. 아시는 분도 참석했다고 하시고, 꽤나 자주 손님을 모시고 있는데, 외국분들도 종종 온다고 하신다. 담마코리아에 대한 호감이 생겨난다. 백 마디 글자보다는 한 두 마디의 직접 들은 이야기가 더 효과가 있는 법이다. 나의 기대를 채우려 기사님의 말씀을 곧이 곧데로 믿어 댄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첫인상, 긴장감

입소 절차는 꽤나 간단하다. 쭈뼛쭈뼛 처음온 태를 내며 표지판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안내하시는 분이 말을 건네온다. 단문으로만 이루어진 대화. 미사여구와 사족을 모두 깎아내고 핵심만 남긴 조각 작품처럼 필요한 최소한의 말들로만 대화가 일어난다. 겉치레는 어디서든 찾아볼 수 없다. 평소 나의 미소와 너스레도 모두 증발해 버리고 필요한 말 이상은 나오지 않는다. 적응은 인간의 본능이다.


식당에 놓인 입소원서를 작성한다. 인터넷으로 프로그램 신청을 할 때 물어보았던 질문들과 많이 겹치고 반복적인 질문들이 있다. 비상시 연락해야 할 가족이나 친구 정보, 그리고, 그 사람들도 명상을 하고 있는지 여부, 10일간의 프로그램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하겠냐는 등, 의아한 질문들에도 한 번 더 생각을 해 보고 답을 한 후, 사무실에 제출한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가시는 분들도 왕왕 있다고 한다. 이 먼 길을 와서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가는 마음은 또 얼마나 아팠으랴. 아마도 그런 아픔을 미리 헤아리는 것이겠지.


어수선한 사무실, 눈동자를 몇 번 굴리면서 입소원소를 제출하면 내 손에는 번호가 적힌 열쇠 두 개가 놓인다. 하나는 귀중품을 보관하는 라커 열쇠이고, 다른 하나는 방 열쇠이다. 필요한 연락을 마저 한 후에 휴대폰 전원을 꺼야 한다고 안내를 받는다. 나는 한줄기 망설임도 없이 휴대폰 전원을 끈다. 성큼성큼 라커로 걸어가서 지갑과 반지를 함께 넣고 잠근다. 낯선 나의 모습. 흠칫 놀란다. 어쩌면 이 순간을 고대했던 건 아닐까.   


환경 적응

몇 가지 주의 사항을 듣고 나서 방으로 향한다. 초등학교 건물을 개조해서 만든 숙소로서 남자 숙소는 단층 건물로 되어었다. 두 평 남짓한 방 한 칸에는 침대 하나, 옷을 걸 수 있는 행거, 작은 좌탁과 벽 선반이 전부였고, 문 뒤에는 입소 퇴소 시 해야 할 일들이 빼곡히 나열되어 있다. 제일 먼저 얼룩덜룩한 곰팡이 자국이 있는 방구석, 그리고 쌓여 있는 먼지가 눈에 들어온다. 침대보를 씌우고 걸레를 가져와 바닥을 한 번 닦는다. 별다른 고민 없이 그저 해야 할 지령들을 하나하나 완수해 나간다. 이런 새로움(?)을 원한 건 아니었지만, 뭐 어때, 명상만 할 건데 하며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이곳은 수수하고 검소한 곳이다. 그리고, 명상하는 곳이다 하며 걱정들을 닦아낸다.


갖가지 물건들이 가득한 창고, 한눈에 용도를 알 수 있는 스펀지 쿠션과 매트가 눈에 들어온다. 작은 것 두 개와 큰 것 하나를 가져와서 방에 설치해 본다. 꽤 편안한 명상 방석이 완성되었다.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 스스로 주위 환경을 바꾸거나 조정할 수 있는 권한은 경험을 주도적으로 만들어준다. 왠지 여유가 생기고 가슴이 넓어진다. 가방의 풀고 짐을 흩어 배치한다. 드디어 나의 공간이 완성되었다.


남자 숙소에는 개인별로 배정된 방과 공동 화장실 겸 샤워장이 있다. 정수기, 휴지, 상비약, 손톱깎이, 걸레 등이 잘 구비되어 있는 복도와 진공청소기를 포함하여 여분의 담요와 청소도구들이 구비된 창고. 이 모든 것들이 코스 참석자들의 기부금에 의존해서 운영되고 있고, 식사부터 청소까지 구수련생들의 노력 봉사로 운영되고 있음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세상의 얄팍한 이해관계에 얽히지 않고 원래 목적만을 추구하려는 의지가 드러나는 환경이다. 이해하게 되면 나도 그것의 일원이 되어 버린다. 그러면 사소한 불편 따위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 받아들임의 시작은 이해이다.


저녁식사 시간까지는 아직 멀었다. 바깥으로 산책을 나간다. 따뜻한 햇살을 맞으며 산책을 하지만 어떠한 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어색함으로 굳어 있는 얼굴들은 서로의 눈길을 피하려 항상 무언가를 응시한다. 다행이고 또 고맙기도 하다. 고귀한 침묵. 수련의 핵심이다. 타인과의 침묵도 중요하지만 자기 자신과의 침묵이 더욱더 중요하다. 쉼 없이 떠들어대는 마음속의 해설자 목소리, 그 너머에 있는 고요함을 맞이하러 온 것이다.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나의 침묵은 이미 시작되었다.


명상 홀, 안도감

명상 방석 때문일까 아니면 넓은 공간, 아니면 많은 사람들 때문일까. 어두컴컴한 명상홀에서는 묵직하고 차분한 냄새가 난다. 홀 중간에 놓인 지도법사(assistant teacher)의 높은 자리가 보이고, 그 양 옆으로 자원봉사를 위해 참석한 구수련생들이 보인다. 수련생들은 적당한 간격을 두고 놓인 명상 방석 위에 하나 둘 착석을 한다. 한쪽은 남자, 반대쪽은 여자 수련생들이 앉는다. 얼추 60명은 되어 보인다. 긴장된 공기가 느껴진다.


고엔카지님의 법문이 이어진다. 한 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의 법문. 우리는 벽에 기대어 앉거나 자유롭게 자세를 잡을 수 있지만, 서서 듣거나 이탈할 수는 없다. 유쾌하면서도 명쾌한 법문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집중하게 된다. 비록 녹음된 영상이긴 하지만 전해오는 메시지는 10일간의 코스를 이끌어가기에 충분했다. 듣고 있는 내내 감사한 마음이 함께 하고, 이렇게 전 세계적으로 동일한 영상으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코스 끝난 이후에는 구수련생 입장에서 언제든 법문 영상을 재 시청할 수 있는 것도 멋진 일이었다. MBSR관련 책들과 카밧진 박사님의 동영상에서 접할 수 없는 붓다의 원래 의도와 메시지를 접하게 된 것은 나에게 너무나 크게 도웅이 되었다. 현실적인 입장에서 이해하고 전달하는 것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료들에게는 더 잘 와닿을 수 있겠지만, 그 원래의 의도와 취지를 바르게 이해하고 나면 내 안의 목소리에도 힘이 생기기 시작한다. 내 안의 의심들이 이해와 확신으로 나아가게 되고, 사소한 변화나 변경이 필요할 때에도 원래의 취지와 크게 벗어남이 없이 안전하게 수행할 수 있는 탄탄한 기반이 되는 것이다.


너무나도 이른  저녁 9시 30분. 전기장판을 켜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한다. 시골 밤이라 창밖은 유난히 검고, 가끔 산짐승 소리도 들려온다. 유난히 크게 들리는 시계소리. 새벽 4시에 일어날 걱정을 안고 잠이 든다.    


치열한 새벽

알람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뜬다. 4시 정각 복도에서는 수련생들을 깨우는 종소리가 들린다. 구수련생이 종을 치면서 깨우는 것이다. 4시 30분부터 두 시간의 새벽 명상이 시작되기에 허겁지겁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고 옷을 대충 갈아입는다. 가벼운 스트레칭을 마치고 밖으로 나간다. 수련생들이 총총걸음으로 정원을 지나 명상홀로 향하는 것이 보인다. 차가운 새벽 공기, 샛별은 반짝이고 외투 속 나는 움츠려든다. 한마디 말도 없이 그저 같은 목적을 향해 걸어간다. 이 새벽에 무슨 말이 필요하랴.


새벽 명상은 어떠한 안내도 없이 스스로 명상하는 시간이다. MBSR 지도자의 자신감이 명상 방석을 먼저 차지한다. 정좌 명상의 시간. 생각보다 쉽지 않다. 오래지 않아 다리를 바꿔본다. 발과 다리가 저려오고, 허리가 아파온다. 어깨도 결려오고 심지어 졸리기도 하다. 총체적 난국이다. 남들은 몰라도 2년이나 명상을 해 오고 있는 내가 이렇게 고전할 수는 없다. 체면이 말이 아니다. 거룩한 침묵 기간이라 정체가 탄로 나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정말 세상 창피할 뻔했다. 누가 시간은 흐른다고 했던가. 누가 이 또한 지나가리라고 말했던가. 나의 시간은 다리와 허리에서 멈춘 채 꼼지락 거리고만 있다. 불편하고 아프고 답답하고 화난다. 정말 화난다. 나 자신과 치열한 싸움이 시작된다.


이 삼일 즈음이면 몸도 적응해서 한 시간 넘는 좌선도 무리 없이 했던 집중 수련의 경험이 있기에 이번에도 어떻게든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참아 본다. 다리 저린 것도 금세 지나갈 것이다, 허리 아픈 것도 금세 지나갈 것이다. 나에게 주문을 걸고 또 걸어본다. 하지만 이제는 어깨도 아프고 목도 아파온다. 처절한 새벽시간. 매일의 아침이 이런 고통 속에서 탄생하는 것일까?


그렇게 한 시간 반 정도의 사투가 지나자 고엔카지의 챈팅이 시작된다. 빠알리 언어이다 보니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 다만 계속 변하는 목소리의 길이와 높이로 챈팅이 마치 노래처럼 들린다. 분명 고엔카지님은 노래를 잘하셨을 거라고 확신한다. 확실한 고수다.

두 시간의 처절한 사투. 새벽 명상의 패배자는 터벅터벅 걸음으로 식당으로 향한다. 실망감으로 가득한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어느덧 동이 트고 샛별도 사라지고 없다.


침묵의 아침 식사

아침메뉴는 제대로다. 토스트 빵과 세 가지 잼도 있고, 흰쌀 죽, 국, 채소는 기본에 삶은 콩과 요구르트, 견과류, 따뜻한 두유와 차도 있다. 첫날은 모든 것을 맛봐야 지하는 마음이었을까. 일렬로 놓인 수련생들의 식판에는 모든 종류의 음식이 올려져 있다. 그러면 그렇지. 식사하는 내내 토스트 빵 굽는 냄새가 침샘을 자극한다.


말이 사라진 아침 식사, 냄새와 맛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마음 챙김 먹기 명상을 한다. 떠온 음식을 눈으로 먼저 감상한다. 침샘이 요동치는 것을 느낀 후, 잘 구운 빵을 한 입 베어 문다. 바삭바삭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차근차근 씹어 넘기고, 식도를 따라 내려가도록 한참 동안 기다려 준다. 다음 음식으로 숟가락을 옮긴다. 닿을 듯이 옆에 앉아 있는 수련생의 얼굴을 볼 겨를도 없다. 아니 그럴 필요를 못 느낀다. 가까이 앉아 있으면서도 이토록 무관심하기는 난생처음인데, 전혀 불편하지가 않다. 첫 번째 지령인 ‘거룩한 침묵’ 다른 사람과 어떠한 방식으로든 의사소통은 금지다. ‘금지’라는 말이 이토록 편안하고 안전하기는 또 처음이다.


식사를 마치면 각자 사용한 식판과 컵, 수저를 깨끗이 씻어 가지런히 정리해 두어야 한다. 군생활 식판 닦던 기억이 엷은 미소 뒤로 스쳐 지나간다. 여섯 명 정도가 동시에 설거지할 수 있지만 나는 절대 서두르지 않는다. 천천히 먹는 것을 즐기다가, 대부분의 사람이 설거지를 마치고 날 때 즈음에야 비로소 설거지하러 간다. 눈치게임의 정수는 날카로운 느긋함이다. 주위 상황을 주기적으로 살피고, 그동안에는 지금의 경험에 오롯이 머문다. 그렇게 느긋하게 한 시간 동안 아침 식사에만 집중한다. 마무리 의례로 한 스푼의 커피를 엷게 탄 커피차를 만들어 보온병에 담아 식당을 나온다. 하루 종일 내 곁을 지켜줄 차가 완성된다. 준비 완료.


 정원 산책 중에도 지켜야 할 몇 가지 규칙이 있다. 눈에 띄는 운동이나 스트레칭은 다른 수련생들의 주의를 방해할 수 있기에 금지되어 있다. 그리고 위빳사나 수행의 결과를 스스로 체험하기 위해서 10일 기간 내내 다른 명상법의 병행 수련도 금지된다. 명상홀 바로 앞에서는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 나도 마음 챙김 요가는 당분간 하지 않기로 한다. 마음 챙기며 먹기와 걷기 정도는 무리 없어 보인다. 어스름한 정원 산책로에는 뽀얗게 서리가 내려앉아 있다. 하얗게 피어난 서리꽃은 오히려 화려하다. 잔디 위에 앉은 서리와 나뭇가지에 앉은 서리는 모양도 크기도 다르다. 쪼그려 앉아서 한참을 지켜보다 다리가 저려올 때쯤 일어난다. 먼 산 위로 해가 떠오르고 정원에도 날카로운 햇살이 들이닥치면, 마치 스타워즈의 광선검을 맞은 듯 하얀 꽃들은 하염없이 사라지고 만다. 신비로운 아침 현상을 머릿속에 담고 명상홀로 들어간다.


참담한 오전 명상

8시부터 한 시간 동안의 단체 명상이 시작된다.

고엔카지님의 안내 음성을 잠시 듣고 나면, 대부분의 한 시간을 침묵 속에서 스스로 명상한다. 안내 멘트는 간단하고 또 구체적이어서 혼자 수행하기에 무리가 없을 정도이다. 그러다 한 시간이 다 되어갈 때 즈음에 고엔카지님의 음성이 다시 나타난다. 몇 분간의 챈팅에 이어 ‘바와뚜 삽바 망갈람‘이라는 말과 함께 마무리된다. ’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이라는 염원으로 마무리하게 된다. 이에 대한 화답으로 수련생들은 ’사두 사두 사두‘하며 마무리한다. ’참 좋은 말씀입니다 그리고 동감입니다 ‘하는 뜻이다. 이후 알게 된 것이지만, 고엔카지님이 등장하는 모든 세션에는 이렇게 마무리가 된다. 자애의 마음으로 마무리를 하는 것이다. 나를 위한 명상에서 더 나아가 세상을 위한 명상이 되는 것이다.


점심식사 전 11시까지 개인 명상시간이 이어진다. 명상 홀에서 진행할 수도 있고, 아니면 각자의 숙소에 돌아가서 개별적으로 명상을 진행해도 상관이 없지만 개인 숙소로 돌아가는 경우가 더 많아 보였다. 쉴 때에도 5분 이상 침대에 눕지 말라고 고엔카지님의 당부로 비추어볼 때 이번 10일 과정은 수련생의 의지가 제일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수련생의 나이와 배경, 그리고 참가 이유도 다양하기에 하나의 강제된 규율보다 다양한 선택을 스스로 할 수 있도록 하는 자율성이 더 와닿는다. 명상은 수동적이 아니라 오히려 능동적인 것이어야 한다. 숙소에도 명상 방석을 만들어둔 나와는 다르게 다른 분들은 어떻게 수련하시는지 궁금하다. 아마도 침대 머리에 앉아서 수련하시려니 한다.


명상 홀에서든 나의 숙소에서든 아직은 정좌 자세가 가장 큰 고민거리다. 책상다리를 해도, 아니면 버마자세를 해도 통증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짜증과 화만 치밀어 올라 쉬엄쉬엄 할 수밖에 없다. 한 시간을 오롯이 앉아서 명상해 보리라는 처음 결심이 무색하게 20여분이 지나면서부터는 계속해서 몸을 꼬면서 자세가 흐트러지기를 반복한다. 호흡을 지켜보는 아나빠나 수행이지만, 호흡은 온 데 간 데 없고 나의 몸과 마음은 통증으로 가득 채워진다. 친구처럼 환영하고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싸우기에만 급급했다. 비참한 기분은 점점 자괴감으로 바뀐다. 참담하다.


11시 점심식사 시간 종이 울리면 수련생들은 약속한 듯이 밖으로 나와 뭔가에 홀린 듯이 식당으로 향한다. 서로의 눈빛을 찾으려 하지도 않고, 서로의 표정을 읽으려 하지도 않는다. 같은 공간을 나눠 앉을 뿐 어떠한 교류도 없다. 고귀한 침묵은 나를 내 안으로 이끌어 간다. 점심식사는 좀 더 든든하게 해야만 한다. 저녁식사가 차 한잔과 옥수수 및 쌀 튀밥으로만 구성되어 있어 점심 식사가 유일한 에너지원이 된다. 살려면 먹어야 한다. 그러나, 너무 많이 먹으면 소화에 지장이 있다. 특히 하루 종일 앉아서 수행하는 것이 전부여서 변비가 있다면 큰 곤경에 처할 수밖에 없다. 배가 부르면 잠이 오고, 잠은 명상의 큰 훼방꾼이다. 의도치 않게 시작된 간헐적 다이어트. 차라리 잘 된 것이다. 먹을 것에 대한 고민이 덜어진다. 그만큼 자유로워진다.


오후, 굳은 의지

11시부터 1시까지는 여유로움이 이어진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1시까지는 각자의 공간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명상을 이어갈 수도 있고, 빨래나 청소를 하여 주변 정리를 하기도 하고, 지도법사에게 개인적인 면담을 신청해서 질문을 하거나 조언을 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수련생들은 걷는다. 어스름한 새벽과 저녁의 쌀쌀한 공기와는 다르게 한낮의 햇살은 너무나 따뜻하다. 걷고 또 걷는다. 서로의 동선이 겹쳐지지 않게 배려하면서 걷는다. 나란히 걷는 일도 없고, 다른 사람이 걷는 것을 가만히 관찰하지도 않는다. 상대방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최대한 신경 쓴다. 소화를 위해 걷는 사람, 걷기 명상하는 사람, 벤치에 앉아서 차와 햇살을 즐기는 사람. 어느 누구와도 시선을 겹치지 않는다. 날짜가 지나면서 걷는 사람들의 자세에도 변화가 생긴다. 처음에는 자연스럽게 천천히 걷다가도 며칠이 지나면서 속도를 바꾸며 걷는 사람도 있고, 다양한 자세를 취하며 걷는 분들도 생겨난다. 환경에 적응해 가는 것은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생존방식이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기에 아무리 우스꽝스러운 자세라도 가능해진다. 본연의 모습이 드러난다.


오후 단체 명상은 2시 30분부터 시작한다. 10분 일찍 도착해서 정좌자세를 고민한다. 작은 엉덩이 쿠션을 두 개 또는 세 개로 늘여도 본다. 세 개는 오히려 다리에 전해지는 압력이 더 커지는 것 같아 다시 두 개로 줄여본다. 다리도 왼쪽 오른쪽 번갈아 앞으로 내어보면서 바꿔본다. 어떤 수련생은 두꺼운 방석을 반으로 접어서 높이를 조절하기도 하고, 허벅지 아래에 작은 받침대를 넣어서 도움을 받기도 한다. 허리에 통증이 있는 분은 의자를 사용하기도 하고, 외국인은 무릎 의자를 사용해서 앉기도 한다. 맨 처음엔 편평하고 넓었던 방석 위에 작은 엉덩이 쿠션 하나가 전부였는데, 이제는 다양한 쿠션들과 담요가 쌓여 점점 산이 되어 간다. 평균 세네 개로 엉덩이 방석이 늘어나고, 담요를 이용해서 몸 전체를 감싸거나 무릎만 덮기도 하면서 각자의 특색을 띠기 시작한다. 늘어난 방석들은 후반부로 갈수록 서서히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명상하는 내내 여기 저기서 한숨과 신음들이 계속 들려온다. 내 상황과도 같아서 짠하기도 하고, 나는 그 정도는 아니구나 하면서 이기적인 위안을 얻기도 한다. 어쨌든 나의 다리와 허리는 여전히 고통을 받고 있다. 며칠이 지나면 나아질 것을 알지만 지금은 그저 고통스럽기만 하다. 자세를 바꾸기 위해 잠시 눈을 뜨면 앞에 앉은 수련생의 곧게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자괴감과 함께 하염없이 움츠려든다. 괜히 선배 수련생이 아니구나 싶다. 한 시간의 단체 명상에 이어 수련생들의 질의응답이 이어진다. 궁금한 점이나 힘든 점들에 대해서 지도법사에게 질문을 하거나 조언을 구하는 시간이다. 이 시간만이 유일하게 말할 수 있는 시간이다. 진정 필요한 것을 위해서만 말을 한다. 마치 내가 한 질문 인양 귀를 쫑긋 세우고 듣는다. 아무리 사소한 질문이라도 그에 대한 답은 항상 새롭게 들린다. 심지어 명상의 자세에 대한 질문조차도 나에게는 도움이 되었다.


5시까지 개인 명상을 하고 나면, 저녁시간이 된다.  말이 저녁이지 공식 명칭은 ‘저녁 차 시간’이다.

마치 따뜻한 공깃밥을 퍼 담듯이 빈 그릇에 옥수수와 쌀 튀밥을 가득 담는다. 그리고 식사하듯 진지하게 씹어 넘긴다. 10분이 채 지나지 않아 차 시간이 끝난다. 요식행사가 이런 느낌일까 잠시 상상해 본다.

식사가 달라서 그런지, 물이 달라서 그런지. 화장실에 가는 시간이 잦아졌다. 심지어 저녁 8시가 넘어가면 아랫배에 가스가 차는 것 같아서 점심 식사 양을 조절해 보기도 하고, 또 때로는 저녁 차시간을 건너뛰기도 한다. 첫째 날과 둘째 날은 그릇에 가득 옥수수와 쌀 튀밥을 담았지만, 셋째 날은 아예 건너뛰기도 하고, 넷째 날부터는 차만 마시기도 한다. 음식을 위한 식사가 아니라 명상을 위한 영양 공급의 시간으로 탈바꿈한다. 남는 시간 동안 산책을 한다. 걷고 또 걷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명상 홀에서 방귀를 뀔지도 모른다. 생각만 해도 아찔해진다. 간혹 단체 명상 중에 방귀를 뀌는 분도 있지만 이젠 남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쉬는 시간이 되면 거의 모든 수련생들은 화장실로 향한다. 걷기 위함인지 아니면 배설을 위함인지 알 수는 없으나, 우리는 늘 하나가 되어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친숙한 밤

6시부터 한 시간 동안 단체 명상이 이어진다.

오후보다는 좀 더 몸이 적응해 가는 것 같다. 30여분 동안 앉아 있을 수 있게 된다. 이제는 자세가 균형 잡혀있지 않은 것 같아 고민이다. 보통 왼쪽 다리를 앞으로 내어서 앉는 버마 자세를 선호했는데, 지금은 오른쪽 다리를 앞으로 내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다 보니 허리부터 어깨까지 조금씩 균형이 틀어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임기응변으로 적응한 것이 어디 편할 수 있겠나 싶다. 아직은 멀었지만 불행 중 다행인 건 조금씩 적응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 자체이다.


법문이 끝나고 나면 또다시 질의응답 시간이 진행된다.

법문을 통해서 바른 이해를 얻고, 하루 종일 직접 수행을 해 보고, 그러다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질문들이 쏟아져 나온다. 수련생들은 지도법사 앞으로 나가서 작은 방석 위에 앉아 질문을 한다. 그러면, 지도법사는 질문과 대답을 통해 심화학습을 시켜주려는 듯 또렷하게 정리해서 이야기해 준다. 질문들이 반복된다. 선택적으로만 듣고 있다는 반증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아직 이해하는 못한 상황일 수도 있다. 결코 어리석은 질문은 없다. 누구에게는 단순한 질문이 당사자에게는 매우 심각한 것일 수도 있는 법이다.

다양한 질문들이 쏟아진다. 알아차린다는 것은 무엇인지요, 명상 측면에서는 고통을 바라봐야 한다고 하는데 쉽지가 않아요, 정좌 명상 중 생각에 빠져들어 헤어 나오기 힘들어요, 자꾸만 눈물이 나요.


9시가 되어서 일정이 완료된다. 폐 깊숙이 들어오는 쨍한 밤공기를 느끼며 정원을 가로지른다. 하늘에 박힌 수많은 별들을 우러러보며 일부러 천천히 걷는다. 초저녁 샛별 대신 이제는 북두칠성이 보인다. 멀리서 들리는 고라니소리. 모르고 들으면 비명소리와도 같지만 오늘은 힘내라는 응원처럼 들린다. 그렇게 세상 모든 것을 내 방식으로 받아들인다. 나의 하루가 된다는 말, 이것은 어쩌면 나만의 방식으로 온전히 하루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아닐까. 어쨌든 나의 하루는 잘 끝났다.


작은 진전

어김없이 새벽 4시가 찾아온다.  문득 질문이 생겨났다. 아침 명상을 반드시 명상홀에서 해야 한다는 안내가 있지는 않았기에 오늘은 숙소에서 새벽 명상을 해 보기로 한다. 그래도 확인이 필요했다. 4시 기상종을 울리는 구수련생에게 넌지시 눈짓을 해 보았다. 어떠한 형태의 대화도 허용되지 않는 기간이지만, 구수련생을 내 방으로 잠시 모셔서 한 마디만 물어봤다. 그러자, 자기도 그렇게 알고만 있다고 했다. 나는 확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오늘부터는 숙소에서 아침명상을 하기로 한다. 커튼을 치고 나만의 공간을 만든다. 친밀하고 아늑한 나만의 공간으로 빠져 들어간다. 벽을 뒤로하고, 얇은 담요를 무릎 위에 덮고 아나빠나사티 명상을 한다.  고요하게 고요하게, 그리고, 명징하게 새벽이 시작된다. 다리의 통증도 줄어들고 한 시간이 물 흐르듯 지나간다. 잠시 동안의 휴식을 취하고 또다시 한 시간이 흘러간다. 창문으로 아침 햇살이 비집고 들어온다. 따뜻하다.


절제된 환경 속에서, 고귀한 침묵 속에서는 수행의 진보가 빠르다.

모든 방해물들이 제거되고, 유혹의 요인들이 사라지고, 마음을 흩트리는 말들 조차 사라지고 나면, 작은 용기만으로도 맨몸의 나와 대면할 수 있게 된다.

열흘의 기간이 있기에 서두를 필요도 없다. 그리고, 정해둔 뚜렷한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스스로 검증해 보는 시간이기에 안달하는 마음도 내려놓게 된다.

모든 것이 수행에 적합하게 잘 갖춰진 곳, 그런 행운 속에 나를 놓아둔 것이다. 참으로 대담하게도.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아는가? (아나빠나 사띠)

첫 단계는 호흡이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윗입술과 코 위쪽 끝을 잇는 큰 삼각형 부위로 주의를 머물며 호흡이 있음을 알아차린다. 생각이 떠돌고 마음이 방황하면, 그저 알아차리고 다시 큰 삼각형으로 돌아온다. 돌아오고 또 돌아온다. 잊지 않고 돌아오는 여정, 그것이 명상의 첫 번째 여정이다. 마음이 방황하고 있음을 너그러이 받아들인다. 바라는 대로의 세상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알아차리는 것, 그러기 위해서 끊임없이 변하는 호흡의 실제모습을 알아차리려 노력한다. 호흡에 대한 기대도 내려놓고, 달라지기를 원하거나 바꾸려 하지도 않는다. 생명을 유지해 주는 근본적인 행위인 자연스러운 호흡에 감사함을 느낀다. 그것이 전부다.


호흡이 있음을 알아차리는 기술을 익히고 나면, 미세한 호흡으로 주의력을 옮겨간다. 코끝과 윗입술을 연결한 작은 삼각형으로 주의력을 좁히고, 공기와 부딪히는 접촉 지점으로 주의력을 더욱 좁혀간다. 점차 정교해지고 세밀해지는 주의력, 그것이 두 번째 단계의 목표다. 집중력이 커지게 되면서 마음은 더욱 안정되고 호흡 또한 큰 호흡에서 점차 미세한 호흡으로 바뀌어간다. 미세한 호흡에 주의를 기울이는 동안 마음도 더욱더 맑아지고 정교해진다. 작은 소리나 몸의 움직임도 크게 느껴지기에 가능한 방해받지 않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도움 된다.


이 단계를 넘어서면, 코 아래 윗입술 윗부분의 피부로 주의력을 집중한다. 이때부터는 주의를 기울이는 대상이 호흡이 아니라 피부 감각으로 옮겨간다. 좁은 피부 면적에서 일어나는 감각들에 주의를 기울인다. 기다린다. 조용히 기다린다. 미세하고 정교한 주의력으로 기다린다. 미세한 떨림이나 온도의 변화, 공기가 스쳐 지나가는 느낌, 꿈틀거리는 느낌,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느낌, 어떠한 것이든 일어나는 대로 가만히 지켜보기만 한다. 어떤 것이 일어나는지, 일어난 감각들은 또 어떻게 되는지. 호기심을 가지고 가만히 지켜본다. 감각이 없으면 없다고 알고 기다리고, 감각이 생겨나면 생겨난 감각들의 품성과 특성을 알아간다. 이런 방식으로 신체감각에 대한 주의력을 훈련한다. 이것이 위빳사나의 시작이다.


셋째 날의 특징 중의 하나는 ‘강한 결심’이다. 한 시간의 단체 명상 시간 동안 다리나 팔을 움직이거나 눈을 뜨지 않겠다는 강한 결심으로 명상을 대하는 것이다. 대범함으로 작은 어려움을 넘어서는 것이다.

물론 다리가 아프고 허리가 아프다. 힘을 주거나 풀거나 할 수는 있겠으나, 다리나 팔은 처음 그대로의 자세를 유지한다. 아무리 불편하더라도 견뎌보는 것이다. 40분이 지난 시점에서 고비가 찾아왔다. 다리의 감각은 사라지고 허리와 어깨가 긴장감으로 가득 차서 통증도 느껴진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는 마음으로 견뎌본다. 고엔카지님의 챈팅이 들리는 순간 기쁨의 희열이 찾아온다. 이제 곧 끝날 시간이 된 것이다. 지루하고 어색하기만 하던 챈팅이 더없이 즐거운 노랫소리로 바뀌는 순간이다.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변화무쌍하다. 그런 특징을 잘 알기에 마음이 한결같기를 바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변하지 않는다는 착각과 믿음 속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그래서 문제의 원인이 외부에 있고 불만의 대상을 밖에서 찾는 것이다. 당연한 듯이 말이다. 이보다 더 큰 착각이 또 있을까.


법문의 효과

법문을 듣는 시간도 명상의 시간이자 깨달음의 시간이다. 자기 계발 분야에서는 한 동안 ‘아하 moment’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물론 지금도 자주 사용되기는 하지만.

깨달음의 순간이자 그동안의 어리석음이 깨어지는 소리 ‘아하’이다. 머리가 맑아지고 밝아지고 몸이 가벼워지면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과 에너지에 휩싸인다. 삶에서 긍정적인 전환이 일어나는 시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머리로 논리적으로 알게 된 진실은 그리 오래가지는 못한다. 그런 이유로 자기 계발 훈련의 대부분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그래야만 효과가 있는 것이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길이 제일 먼 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생각이 행동으로 이어지고, 그렇게 체화된 이후라야 진정한 효과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법문으로 깨우친 것은 이해하는 데서 그치면 절대 효과를 볼 수 없다. 오히려 돌팔이 의사가 될 위험만 커진다. 논리적인 궁금증은 논리적인 해답을 가져오지만 체험으로 이해하고 나서 얻은 해답은 온전히 내 것이 되어 몸에 흡수된다. 그렇게 체화되는 것이다. 들어서만 이해하는 진리 또는 맹목적으로 믿는 신념을 넘어서 스스로 체험하고 검증해 보라는 것이 법문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인 것이다. 성공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지만, 가장 힘든 부분. 바로 실행력인 것이다. 다음 날 진행해야 할 과제를 저녁 시간에 듣고 나면, 뒷 날 새벽명상부터 스스로 시도해 보게 된다. 그렇게 시도해 가면서 생겨난 궁금증과 어려운 점은 점심시간, 오후 단체 명상 후, 저녁 법문 명상 후에 지도법사에게서 답을 구하고 조언을 구하면서 스스로의 수행에 진전을 가져온다.


하는 만큼 얻어가는 것이고, 걸어간 만큼 결과를 만드는 것이다. 종교적으로는 ‘가피’라는 이름으로 많은 은혜와 은총이 내려진다고 하지만, 내가 경험하고 있는 명상에서는 거저 주어지는 것은 절대 없다. 모든 결과물은 오롯이 나의 힘으로 만들어 내야만 하는 것이다. 스스로의 갈구와 치열한 고민의 결과로 다음의 진보가 일어난다. 그렇게 각자의 수행이 온전해진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의 핵심은 ‘스스로 돕는 것’에 있다.


아닛짜 샤워기

초등학교를 개조한 숙소이다 보니 화장실 칸칸마다 샤워기가 설치되어 있는 구조이다. 그리고, 뜨거운 물이 충분하지 않으니 다른 분을 위해서 가능한 짧은 시간에 샤워를 해 달라는 정중한 부탁이 있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머리를 감다가 갑자기 나오는 차가운 물에 화들짝 놀라곤 한다. 아침저녁으로 서리가 내리는 이 계절에 갑자기 찬물이라니. 온몸에 닭살이 오르고, 닭살마다 화덩이 같은 뭔가가 불끈 치밀어 오르기도 한다. 저녁이 아닌 낮 시간으로 샤워시간을 옮기거나, 얼른 씻고 나오려고 해도 찬물 깜짝 이벤트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러던 차에 나에게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차가운 물에 익숙해졌다는 말이 절대 아니다. 차가운 물에 화들짝 놀라면서 ‘아닛짜’라는 말이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것이다. 이건 뭐지 하면서도 얼굴에 실없는 웃음이 나온다. 차가운 물에도 여유가 생긴 것이다. 믿기 힘들겠지만 ‘아니짜’라고 말을 하면 차가운 물도 덜 차갑게 느껴진다.


‘아닛짜 anicca’라는 마법의 단어. 고엔카지 님의 법문에서도 많이 언급되고, 단체 명상 중에도 ’ 아닛짜‘는 반복된다.

’ 무상‘, ’모든 것은 변한다 ‘라는 진리의 말이다. 내가 살아온 경험에 의해서도 이것은 확실히 진리 중의 진리다. 지루한 학교 생활도 지나갔고, 힘든 군생활도 지나갔다.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기 마련이다. 나도 어떻게 할 수 없다. 계절이 바뀌고 얼굴에 주름이 늘어가고 태양과 지구 또한 늘 변하고 있다는 진리이지만, 우리는 늘 착각 속에서 살아간다. 태양은 항상 그대로이고, 어제와 같은 오늘이 반복되고, 나는 예전과 그대로인데 세상은 어찌 계속 변하는지 야속하기만 하다고. 그러나 알고 보면 영원히 변치 않는 나라고 하는 생각조차도 허상이고 착각이다. 매 순간 세포조직이 바뀌고 생각 또한 시시각각 바뀐다. 과연 나라고 하는 어떤 것이 그대로 있다는 것일까? 변치 않는 실체로서의 ‘나’가 존재한다는 착각 속에서 괴로움이 생겨난다. 진실과 실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들에 욕망과 욕구를 덧칠해서 바라고 또 바라며 결코 이룰 수 없는 것들을 추구하는 삶이다. 이런 어리석은 괴로움을 스스로 만들고 그 속에서 힘들어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알고 보면 너무나 쉽게 이해되는 원리다. 종교를 떠나 말 그대로 자연의 진리인 것이다. 진리의 밑바탕에는 바로 ‘무상’이 있는 것이다.  


‘이 또한 지나 가리라’와 같은 긴 문장보다는 오히려 ‘아닛짜’라는 마법의 주문 같은 표현이 훨씬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이 말을 하거나 되뇌면 왠지 모를 마법이 일어날 것만 같다.

명상 중에도 힘든 감각이 올라오거나 감정적으로 어려울 때에는 ‘아니짜’의 지혜를 떠올려 보라고도 권장한다.


몸을 실상을 느껴볼 차례 (위빳사나)

위빳사나 수행법에서는 신체 감각, 특히 피부에서 일어나는 신체감각에 민감한 주의력을 개발하여 알아차리는 것이 가장 기본이자 제일 중요한 부분이라고 강조한다. 몸 구석구석 빠짐없이 피부에서 일어나는 감각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훈련한다. 5~7cm 크기 정도로 전신의 피부를 나누어 순서대로 지나가면서 신체감각 및 일어나는 느낌들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하나의 신체 감각에 너무 오래 머물게 되면 의도치 않게 갈구하거나 화내는 반응으로 이어질 수 있기에 가능한 감각이 있음을 알아차리고는 다음 신체부위로 넘어가는 것이 핵심이다. 이렇게 전체 피부를 단계단계 부분 부분으로 훑어 가는 것은 초심자에게는 약 30분에서 40분 정도, 그리고 능숙한 사람에게는 10여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될 수 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이동한 후에 다시 발끝에서 머리끝으로 돌아오는 한 싸이클로 이루어진다.


우리 몸은 실시간으로 변화에 노출되어 있다. 세포가 죽고 태어나고, 혈액의 흐름, 성장과 쇠퇴, 주위 상황에 반응 및 대응으로 항상 변화하고 있다. 그러한 변화들이 신체감각으로 끊임없이 올라오고 있지만, 우리는 늘 신경 쓰는 곳에만 감각을 느끼고 나머지는 무시하며 살아간다. 살아가는 모습도 그러하다. 내가 모르는 나의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보고 나에게 조언을 해 주는 경우가 있는 반면, 나도 다른 사람도 모르는 나의 모습도 있는 것이다. 외부의 세상은 필터가 끼워진 감각기관을 통해 선택적으로 인식하기에 결코 그 실체에 접근하기 어렵고, 그중에 가장 어려운 것이 우리와 동족인 다른 사람의 마음인 것이다. 우리 자신의 모습은 그나마 좀 더 나은 편이다. 알아차리는 능력만 제대로 계발할 수 있다면 나의 생각과 느낌, 감각들을 좀 더 제대로 알아갈 수 있기에 말이다.


세상과 나를 주관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않고 실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위파사나다. 어떠한 것도 바꾸려 하지 않고 다만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의 실체를 대면하는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좋고 싫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보고, 거기에 어떠한 판단의 잣대로 들이대지 않고, 다만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숨도, 신체 감각도, 감정과 생각도 그러하다. 바로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새로운 시작시점인 것이다.

 

고타마 붓다님이 알아낸 것은,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신체 감각들은 마음의 행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맛난 음식을 보면 먹고 싶다는 욕구와 갈망이 생기고 우리 신체에도 변화가 수반된다는 것이다. 군침이 돌고, 눈이 커지고, 몸이 앞으로 당겨지듯이 말이다. 신체감각이 먼저인지 아니면 욕구와 갈망이 먼저인지에 대해서는 현대 과학에서도 아직 풀고 있는 문제이라고도 한다. 어쨌든, 신체감각을 제대로 알아차리는 것은 의도치 않게 실수하는 행동들을 의도를 가진 바른 행동으로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특히 화가 나는 시점에는 그 중요성이 더 커진다.  살 빼는 것에서부터, 중독을 지나 중범죄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그 순간에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의아해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돌이킬 수 없는 삶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곤 한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서양의 가르침도 이와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위파사나에는 이렇게 올라오는 모든 신체 감각들은 일종의 ‘상카라’ 또는 ‘카르마’라고 알려준다. 반복되어 차곡차곡 쌓여 생기는 것. 그것이 너무 강하게 쌓이면 다음 생으로 이어지는 윤회가 되고, 그것들이 모두 정화되면 윤회가 멈추고 해탈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쌓인 것들은 피부 감각들로 매 순간 올라온다. 그것들에 다시 휩쓸려서 반복하게 되면 불행의 쳇바퀴를 계속 돌리는 꼴이 되고, 발현되는 그것들을 알아차리고 사라지도록 그대로 두고 나면 자연의 법칙에 따라 정화가 되는 것이다. 그것들에 반응하지 않는 것. 갈망하거나 미워하지 않는 것. 그것이 올바른 대응이고 우리가 훈련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정화하다 보면 미세한 것들까지 정화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가장 밑바닥에 쌓여있는 무겁고 힘겨운 것들까지 올라온다. 그래서, 끊임없는 명상의 노력이 필요한 것이라고 한다.


지나가야 할 관문들

위빳사나 명상을 하면서 마주한 두 가지 육체적인 관문이 있었다. 그 첫 번째는 정좌명상의 자세였다. 다리가 저리고, 허리와 어깨, 목도 아파온다. 명상의 목적이 나를 보살피기 위함이라면, 이러한 고통들에 맞서 애써 싸울 필요는 없는 것이다. 적절히 대응하고 보살피면서 명상의 목적을 유지하는 것이 더욱 도움이 되는 태도이다.  젖 먹던 힘까지 다한 ‘강한 결심, 아딧타나’ 단계가 지나면 오랜 시간 동안의 정좌명상이 친숙해지는 단계가 온다. 허리 디스크로 고민이 많았던 나는 오히려 바른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 정말 애쓴(?) 결과로 허리 통증도 사라졌다. 말 그대로 탄력이 붙기 시작하는 것이다. 진정한 탐구의 시작 시점. 마냥 즐겁게 수련할 것만 같았던 순간에 두 번째 관문이 나타났다.


5일 차가 지나면서 예상치 못한 증상이 발현되기 시작했다. 바로 왼편 위쪽 등 부분 어디선가 통증이 오십 원짜리 크기 정도로 시작이 되어 움직여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질의응답 시간에 많은 수련생들이 호소한 고민 중의 하나가 예상치 못한 이런 통증 들이었는데, 나에게도 이제 그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지도 법사님은 이런 증상이 ‘상카라’ 또는 ‘카르마’가 올라온 것이라고 설명하셨다. 전생부터 이어진 것들의 결과이기도 하고, 오랜 습관들로 고착화된 고통이라고도 한다.


나에게도 그 순간이 온 것이다. 참을 수 없는 통증. 계속 움직이기에 더욱더 고통이 커진다. 어깨가 빠질 듯이 아프다. 나의 과학적 소신은 아직 이러한 현상들을 ‘상카라’ ‘카르마’라고 믿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그저 오래된  습관적 자세로 인한 것이려니 한다. 왼쪽 어깨와 오른쪽 어깨의 느낌이 다른 것은 이미 잘 알고 있기에 구조적인 그리고 습관적인 문제라고 여기는 것이 나에게는 더 합리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왜 지금 이 시점에 이런 고통이 생기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기가 난처해졌다. 수많은 시간이 있었을 텐데, 왜 지금 이 순간에 이런 고통이 발현되는 것일까? 하필 이런 느낌들이 올라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평소라면 병원에 가 보았을 것을 지금은 ‘상카라’로 받아들이고 나 스스로 정화를 해야 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 뭐 어때, 이런 체험과 검증을 하러 온 것이니, 나에게는 오히려 잘 된 것이다.


지도 법사님의 조언은 제대로 직면할 때가 온 것이라고 하셨다. 다만, 그 움직이는 통증을 따라가지 말고, 우리가 늘 하던, 부분 부분 단계단계로 정해진 순서에 따라 피부에서의 감각을 알아보라는 것이었다. 고통이라고 특별한 관심을 쏟다 보면 오히려 성냄으로 발전하거나 미워할 수 있어, 오히려 예상치 못한 역효과가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아닛짜의 지혜로 대하라는 것이다. 한 번 시작된 통증은 쉴 때와 잠잘 때를 제외하고는 계속되었다. 정좌 자세를 취할 때에만 발생하는 것이기에 나는 더더욱 물리적인 자세 문제로 연결하여 이해하려 했다. 그러면서도 정해진 명상 수행을 계속 이어 나간다. 어떤 때에는 통증이 완전히 사라지고, 새로운 움직임으로 다시 시작되기도 하였다. 신기하게도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통증이 사라졌다. 한 달이 지난 지금도 미세한 통증이 가끔씩 올라온다. 몰라서 무시되던 것이 이제는 중요하게 받아들여지는 상황으로 발전한 것이다. 그렇게 나 스스로를 더욱 잘 보살피게 된다.


바로 옆에 앉아있던 수련생의 경우에는 한 밤중에 다리가 저절로 움직이는 현상이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고 한다. 다소 불편함이 있던 다리였지만 처음 겪는 놀라운 현상이었다고 한다. 누군가는 그것이 기가 통하는 현상이라고도 설명하였지만, 그 수련생은 이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더욱더 명상을 진지하게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침묵에서 해방

10일째가 되면 비로소 고귀한 침묵이 해제가 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수행법과 연관된 대화만 할 수 있도록 안내를 받았다.

따뜻한 점심 햇살에 산책을 하던 중 선배 수련생이 나를 조용히 불렀다. 평소에도 늘 조용히 걷고 수련하시던 모습에서 고수의 느낌을 받아오던 터였다.

‘이제 그만 걸어도 되겠습니다. 이리 오셔서 말씀 좀 나누시지요’ 하시는 말이 너무나 고마웠다. 막연한 걸음을 멈추게 해 주신 놀라운 통찰이었다.

20여 년의 위빳사나 수행에서 이번에는 아내분도 같이 참석했다고 하신다. 그러면서 당부하신 말씀은 명상이 깊어질수록 배우자와 가족의 이해가 중요하다고 하신다. 한평생을 같이 하겠다고 다짐한 두 사람이기에 함께 할 수 없는 순간이 늘어나면 그 관계도 멀어지게 마련이다.  가족에게 어떻게 명상을 전달할까 늘 고민하던 나에게 ’ 숙제‘처럼 메시지를 남겨 주셨다.


그날 저녁에는 밤이 늦도록 대화가 이어졌다. 연극하시는 분, 종교계에 활동하시는 분, 자영업 하시는 분, 외국인 들, 20대에서 70대까지, 삼삼오오 모여서 서로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서로 다른 삶의 궤적에서 풀려나온 실타래 같은 이야기들이지만 명상이라는 말로 서로 엮이고 또 얽힌다. 그렇게 하여 더 큰 하나의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그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서로 다르지 않다. 표현만이 다를 뿐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명상이 관계를 다룬다는 말이 있다. 세상과 나의 관계, 사회와 나, 그리고 나 자신과의 관계. 따뜻한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고 보살펴주는 것, 그것이 좋은 관계의 시작이자 마지막이다.


그 후. 변화

벌써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돌이켜 본다.

고엔카지님의 법문, 위빳사나 10일 코스 책, 아날라요 비쿠의 아나빠나 사티 수행법 등을 찬찬히 읽어보며 되새김했다.

MBSR의 호흡 알아차림 및 바디스캔과 아나빠나 사티와 윗빠사나 명상 테크닉의 차이점도 나름대로 정리해 보고, 아침저녁으로는 위빳사나 수행과 선택 없는 알아차림을 수행한다.

세부 방법은 다를 수 있으나 이들 모두 같은 곳을 향하고 있다. 나에게로, 그리고 더 나은 삶을 향해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최근 나에게 일어난 변화에 대해 스스로 놀란 적이 있다. 가족 간의 사소한 다툼은 서로의 마음을, 서로의 말을 충분히 듣지 못한 오해에서 생겨나서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풀리기 마련이다. 평소에는 그런 다툼을 목격할 때면 수행의 좋은 기회로 여겨 미리 신체감각으로 주의를 분산하곤 하였는데, 이번에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신체 감각으로 주의가 전환됨을 알 수 있었다. 순간적이었다. 답답함이나 화라는 감정에 앞서 뒷목과 어깨의 긴장감이 먼저 느껴졌다. 신체 감각에 대한 민감성이 늘어난 것이다. 참 대견했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아나빠나를 가르쳐주고, 가족들과의 대화에서도 간혹 호흡 알아차림이 등장한다. 그동안 미뤄둔 숙제에도 진도가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명상의 진보는 일상생활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삶이 나아지는 느낌 말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내가 그것을 알아차린다는 것이다.

이른 새벽 서리꽃처럼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사라지던 일상의 짧은 순간들이,

이제는 나의 삶으로 들어와 온전히 기억되어 남는다.   


참 다행이다. 감사하다.

명상하길 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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