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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선재 선재

마음에 휴식이 필요할 때는 혼자서 걷자.


마음이 더위를 먹었다.

2024년의 기록적인 폭염은 모든 땀구멍을 함부로 개방시키고 말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구멍들에서조차 쉴 새 없이 땀이 뿜어져 나온다. 시큼한 땀냄새가 코에 밴 것인지 아니면 세상이 시큼해진 것인지 헛갈릴 때 즈음 나는 감기에 걸렸다. 이렇게 더운 무더위에 감기라니! 며칠을 혼자서 부정하며 시름하다 결국 병원으로 향한다.

“온갖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있어 감기에 많이들 걸립니다.”

‘나 혼자가 아니구나.’ 마지못해 감기를 인정한다. 외려 마음이 편해졌다. 하지만, 한동안 산을 오르지 못한 탓에 종아리 근육이 물러지는 듯하더니 어느새 허리통증도 스멀스멀 올라온다. 나는 늘어진 카세트테이프처럼 처참한 몰골이었고, 무더위의 끝은 아득하기만 했다. 이러다가 가을을 건너뛰고 바로 겨울로 이어져 사상 최대의 기후재난이라고 호들갑을 떨지도 모르겠다. 말도 안 되는 걸 알지만, 우스갯거리로 잠시 시름을 닦아낸다.


벌써 1년. 평범한 것 이상으로 평범한 일상이 거품 빠진 맥주처럼 반복된다. 세상에서 멀찍이 떨어져 반복되는 나의 일상. 시간이 흘러도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회사 단합대회인지 대학교 수련대회였는지 가물가물하지만, 코끼리코를 열 번 돌고 나서 혼자 비틀거리다 동료들의 웃음 속에서 쓰러진 적이 있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 너무나 빠르게 돌고 있고 아무리 애를 써도 어지러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결국 포기하고 흙바닥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무더운 밤 호프집, 땀과 맥주가 뒤엉킨 바닥에 함부러 내팽개쳐진 땅콩껍데기같은 기분이랄까. 무력감과 무료함을 스스로 자책하다 보면 마음은 졸아서 움츠려든다. 안으로 식은땀을 흘리다가 이내 맥이 풀려 털썩 쓰러지고 만다. 자책이 길어 질수록 바닥은 더욱 흥건해지고 마음은 회색빛 막막한 두려움으로 물들어 버린다. 움츠려든 마음엔 조바심과 불안이 막무가내로 쳐들어온다. 이러다가 돈과 시간만 까먹는 것은 아닐까. 조금도 예상치 못했다. 마음이 더위를 먹었다.

다시 출발선으로

예리한 칼끝 같은 햇살이 인정사정없이 세상을 내리꽂는 오후 1시에도 그늘진 계곡에서는 여전히 서늘한 골바람이 분다. 피부를 통과한 바람은 뼈속을 지나 몸의 아주 깊은 바닥까지 내려가서는 용오름 하듯 회오리치며 마음을 흔들어댈 때가 있다. 그러면 나지막한 소리가 안에서 웅얼웅얼 들려온다. 이곳을 떠나야 한다. 길을 떠나야 한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 ‘탕’ 출발 소리라도 들은 듯이 내장들은 서로 경쟁하듯 다투어 위로 올라오려 꿈틀거리고, 종아리의 잔근육들이 바짝 긴장한다. 미칠 듯이 뭔가 하고 싶어 온몸이 근질근질한다. 잊었던 욕구가 폭발하듯 살아나고 다시 힘이 느껴진다. 그렇다. 나는 변태(나비와 같이)를 꿈꿨었다. 아주 큰 변화를 말이다.


이럴 땐 걸어야 한다. 할 일 없을 때는 몸이라도 챙겨야 한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논리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나듯이, 내가 뱉은 말이 메아리로 돌아와 전혀 이유 같지 않은 이유가 된다. 걷기 시작하면 다시 뭔가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불어오 마음에 걸린 풍경을 흔든다. 움직임은 에너지를 낳고, 에너지는 움직임을 낳는다. 꽤나 그럴듯 하다. 이유 같지 않던 것이 결국 이유가 되었다. 월정사 전나무길. 그리고, 상원사까지 이어지는 선재길. 이어진 듯 분리된 이 길들을 하루 종일 걸으리라 결심한다. 걷고 싶다. 단지 걷고, 그저 걷고, 혼자서만 걷고 싶다.


채비: 어떤 일이 되기 위하여 필요한 물건, 자세 따위가 미리 갖추어져 차려지거나 그렇게 되게 함.

짐을 가볍게 하려고 일부러 아침을 넉넉히 먹었다. 오늘 걷게 될 전나무길과 선재길에 대한 자문을 구하려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안내 사무실로 향한다.

어떤 코스로 가면 좋은지, 얼마나 걸릴지, 어떤 곳을 꼭 방문하면 좋을지, 두서없는 질문이 마구 터져 나온다. 안내원은 멋쩍은 웃음을 띠며 바로 옆에 계신 스님에게 안내를 부탁한다. 어제저녁 명상을 지도하신 스님이라는 것을 단박에 목소리로 알아본다. 스님도 반가움을 섞어가며 소개를 이어간다. 꼭 방문하면 좋을 다섯 곳이 있고, 그중에는 조선시대 사고를 보관하던 곳, 부처님 진신사리가 있는 적멸보궁, 또 어떤 곳은 사전에 스님과 연락이 되어야만 만날 수 있다고 하신다. 그리고, 바로 옆에는 박물관이 있으니 먼저 둘러보면 여행에 도움이 될거라고 귀뜸해주신다. 걷는 것이 주목적이라는 나의 눈빛을 읽으시고는 아쉬움을 담아 설명을 마무리한다. 아무생각없이 박물관 방향으로 걷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서 깜짝 놀라 멈춰선다. 마음이 많이 앞서 갔나보다. 걸음을 돌려 숙소로 돌아와 채비를 마무리한다.


자연명상마을(옴뷔)에서 월정사까지 걸어서 약 2km, 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 이어지는 ‘선재길’은 약 9km 정도이고, 상원사에서 적멸보궁까지는 약 2km이다. 오늘 걸어야하는 전체 거리를 약 13km 로 정하자 다리가 제일 먼저 긴장을 한다. 몇 번을 다시 고쳐 채비를 마무리한다. 꽃무늬 가득한 작은 등가방, 그 속에는 카메라, 부채, 물 한병, 건빵, 수건, 잔뜩 부푼 기대감과 파란 하늘이 들어있다.

뭔가를 시작할 때는 마치 그 결과를 모두 아는 듯이 계획하고 준비하지만, 맘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다. TV 드라마처럼 결과를 미리 알 수는 없을까? 미리 알면 좋은 것일까? 나는 의도적으로 결론에 대해서 문을 살짝 열어두는 편이다. 예상치 못한 새로움과 놀라움이 비집고 들어올 틈을 주는 것이다.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총 걸음은 3만보였고, 땀에 잔뜩 절은 수건마냥 나는 녹초가 되었다. 저녁 명상은 포기해야 했지만 오히려 속은 후련해졌고 마음은 가벼워졌다.


월정사 전나무길: 걷기 명상

숙소랑 지척에 있는 성보박물관(월정사 박물관)이 첫번째 목적지다. 신라 자장율사와 조선 세조, 문수보살, 선재동자, 적멸보궁 등의 설명을 읽으며 대략적인 분위기를 파악한다. 벼락치기 공부하듯 눈에 훑어 넣고 나와서는 박물관 앞에 핀 연꽃에서 걸음이 멈춘다. 검붉은 꽃잎과 노란 꽃대의 연꽃의 마법에 걸린채 카메라 셔터와 휴대폰을 정신없이 눌러댄다. 구도를 바꿔고 빛의 방향과 색감을 고른다. 상업성과 예술성, 돈과 감동 사이의 그 어딘가로 시선을 고정한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 목덜미에 내리는 햇볓이 따가워 질 때 쯤 그 곳을 벗어났다. 찻길 옆에서는 키작은 들꽃이 바람에 흔들려.차란차란 나의 걸음을 스친다. 이름은 무언지, 얘네들이 여기에서 나를 맞이하는 경위는 무엇인지, 나에게 어떤 의도가 있는건 아닌지 하는 터무니없는 상상을 하며 사뿐사뿐 걸어간다. 당장 휴대폰으로 이 꽃들의 정체를 밝혀 내려다 참는다. 오늘은 그런 날이다. 있는 그대로 경험하는 날이다.

십분 정도 걷고 나서 눈앞에 월정사 전나무 길이 나타난다. 뒤를 돌아보니 내가 걸어온 차도 바깥쪽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히죽거리듯 둘레길이 나를 바라본다. 시작부터 엉뚱한 길로 들어서다니. 이미 벌어진 일에 탓을 해본 들 무슨 소용이겠나, 쿨하게 웃어넘길 수밖에. ‘월정사 가람’이라 적힌 일주문 뒤로 전나무길이 시작한다. 두손을 허리춤에 걸치고 긴 다리를 벌린채 장엄하게 서서있는 전나무들 아래로 꾸불꾸불 1 킬로미터정도 길이 이어져있다. 아득히 높은 우듬지의 그늘 속에서 경건함과 신비로움이 서늘한 공기를 통해 전해진다. 이 서늘함은 내가 잘한 것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못한 것을 꾸짖는 듯하여 웬지모르게 어깨가 겸손해지도 주눅이 든다. 무엇을 참회해야 할까. 내가 한 것에 대한 것일까, 아니면 하지 않은 것에 대한 것일까.


세 대의 차가 나란히 달릴 수 있는 폭을 가진 흙길. 반복되는 일상에 찌들어 잔뜩 주눅이 든 맨발들이 누가볼까 조심조심 걷고 있다. 넓은 길 위에서 부끄럽도록 허연 발들이 어색해한다. 이들에게 익숙한 곳은 땅굴처럼 어둡고 축축한 신발 속 깊은 곳이다. 철저히 고립된 채 오직 간접적으로 전해지는 진동과 압력을 통해서만 더듬더듬 세사을 알아가던 곳이다. 그러나 이순간, 갑옷같은 족쇄들을 훌훌 벗어 버리고 잔뜩이나 부끄러워 창백하고 보드라운 맨살로 세상을 경험한다. 분명 당혹스러울 것이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박하같이 화끈한 숲속 공기와 축축하지만 단단한 흙길. 익숙함이라는 굴레를 벗어나면 한동안의 어색한 적응기를 지나야만 겨우 자유로움에 가까이 갈 수 있다. 무척이나 망설였을 맨발의 인생들이다. 손가락 길이만한 작은 발, 거무튀튀한 볼넓은 발, 속살처럼 하얗고 투명한 발, 검붉은 핏줄이 드러난 주름이 가득한 발. 세상의 모든 발들이 이 길 위에서 함께 걸어 간다. 흙길에 따뜻한 온기를 넘겨주는 대신, 축축하고 견고한, 그리고 경쾌한 대지의 활기를 얻어온다. 그렇게 대지와 흙길이 다져지고, 우리의 삶이 다져진다.


걸을 때는 그저 걸으라는 스님의 당부가 떠오른다. 평소에 무겁게 짓누르던 생각과 고민들을 모두 내려놓고, 걷는 순간은 그저 걸음이 되고, 나무가 되고 공기가 되고 냄새와 소리가 되어 걸으면, 어느덧 가벼워져 스스로 치유되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걷기 프로그램에 참가한 어떤 분은 다리 수술을 앞두고 있을 정도로 힘들었는데, 이 프로그램을 참여하다보니 어느덧 가볍게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면서 기적같은 걷기 명상이라고도 하였다.

맨발과 맨살이 자연스러웠던, 그렇게 세상과 자연을 직접 경험하며 지혜를 쌓아온 인간들이었지만, 우리들은 잊어버렸다. 머리로만 이해한 것을 마치 다 아는 양 떠벌리는 아마추어같은 가벼움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언제든지 AI에 접속해서 답을 구할 수 있는 요즘, 하지만 손쉽게 얻어진 것은 손쉽게 사라져버린다. 단기 기억의 무더기 맨 위를 겨우 올라탄 가벼운 앎은 한숨보다도 더 가는 바람에도 멀리 날아가 버린다. 그래서 주먹만한 돌이라도 주워 그 위에 올려 두어야 한다. 경험과 노력이 뭉쳐진 돌에 고정되면 지식은 지혜로 바뀌어 기억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언제든 필요한 때에 스스로 일어선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상처가 나면 젖(우유)이 나온다고 하여 젖나무로 불리다가 전나무로 되었다는 설명을 보고나니 웅장하고 서늘하던 공기가 친밀함, 아늑함, 편안함으로 바뀐다.

전나무길에 걸린 명상문장

휴식이란 단어를 떠올리지 않았음에도 흙길과 전나무, 공기, 햇살, 벤치와 내가 뒤섞여 휴식 자체가 된다. 전나무길과 나와의 경계를 허문다. 내가 이것을 찾아 왔던가.


황톳길 옆으로 늘어선 전나무 마다 걷기 명상 관련한 글귀가 하나씩 걸려있다. 명령일까, 암시일까, 아니면 부탁일까. 내 안의 무더기를 뒤적여 비슷한 문장들과 경험들을 꺼내 맞춰본다. 정답이라도 맞출 때면 닭살같은 전율과 함께 희열이 올라와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키도 조금 커진다. 너는 제대로 살고 있구나하고 전나무길이 인정과 위로를 건네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에는 피의자처럼 체포당하여 해당 문장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항변해야 한다. 작은 메모지를 꺼내 눈으로 새겨넣고 내 안의 무더기 위에 살포시 올려 둔다. 작은 돌로 눌러 놓아 날아가지 않도록 해야할텐데. ”지금 여기“를 늘 입버릇처럼 외지만 그보다 더 많은 순간에 나는 그것을 잊어버린다. 아직은 한참 멀었다.


마음챙김 스스로 점검하기: 여러분도 한번 해 보시라.

호흡을 가다듬어 마음이 진정되면 여러분 안에 있는 무더기를 뒤적여 보시라. 시험은 아니니 절대, 절대 긴장하지 말고. 혹시 주변에 누가 있을지 모르니 표정관리를 하면서.

- 내가 가야 할 진정한 목적지는 ‘지금 여기’이다. 생의 주소인 ‘지금 여기’로 나를 다시 데려와야 한다.

- 깨어 있는 마음으로 사물의 본성을 들여다보면 그것들 모두의 덧없음이 보일 것이다.

- 걷기 명상은, 지금 내가 걷고 있음을 알아차리면 된다.

- 순간마다 지금 있는 곳에 존재하는 것이다.

- 내가 가야 할 진정한 목적지는 “지금 여기” 입니다.

- 걸어가는 동안 만나는 순간들을 있는 그대로 발견하고 체험한다.

- 멈춤은 억압이 아니다. 멈춘다는 것은 고요해지는 것입니다.

- 이제 더 이상 달려야 할 이유가 없다. 갈 곳도 없고, 할 일도 없다.

- 나의 발이 걸음을 즐길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다는 것을 알아차린다면 이미 깨달은 것입니다.

- 걸음마다 온전히 즐길 수 있다. 걸음마다 안정된 느낌을 만끽하며 걸으라.

- 마음다함과 집중은 즐거움과 통찰을 가져온다.

- 다른 곳에 도착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 크게 호흡하고 숲의 친절함을 느껴보라. 마음이 따뜻해진다.

- 우리는 동떨어져 따로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다.

- 내 몸이 아직 살아 있고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즐기라.

- 휴식은 불교 명상의 중심이다.

- 마치 발로 지구별에 입맞춤하듯 그렇게 걸어보라. 나의 굳건함, 자유와 평화를 지구별 위에 인장 찍듯 걸어보라.

- 한 걸음 걷고 ’여기‘에 도착합니다. 햇빛과 아름다운 나무, 새와 노랫소리가 있습니다.

- 나에게 몸이 있음을 알아차린다면 이미 깨달은 것입니다.

- 행복은 지금 여기에서는 가능하지 않다고 믿기에 행복을 착기 위해 미래로 달려가는 것이다.

- 걸음마다 지금 이 순간에 도착 할 수 있다.

- 마음챙김 에너지는 우리가 길러낼 수 있는 구체적인 무엇이다.

- 침묵은 걷기를 오전히 즐기는 데 도움이 된다.

- 마음다함 수행은 달리기를 멈추고, 네가 그동안 찾았던 모든 것이 이미 여기에 존재함을 알게 해준다.

- 네가 생각하고 느끼고 행하는 모든 것이 우주 전체에 울려 퍼진다.

- 마음챙김 수행을 하는 동안은 말을 하지 마라.

- “지금 이 생각이 맞는가?” 이렇게 한 번 묻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 걸을 때 내가 살아 있음을 알아차린다면 이미 깨달은 것입니다.

- 걸음마다 탄탄한 땅을 딛는 기적을 느껴볼 수 있다.

- 이 지구별 위에서 걷는 한 걸음마다 든든한 대지에 감사해야 한다.

- 삶의 순간마다 평호로움을 즐길 수 있다.

- 발걸음마다 도착하십시오. 그것이 걷기 명상입니다. 그밖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 그저 걸음을 즐기라. 그저 걷는 것이다.

- 우주비행사들이 가장 하고 싶은 일 중 하나가 산책이라고 한다.


월정사는 벌써 추석 준비가 한창이다. 노랑 빨강 살색 연등이 마당과 하늘과 법당을 가득 채우고 그 옆에 멀뚱히 선 나무에는 가을 단풍이 한창이다. 삐뚤빼뚤 손글씨로 눌려쓴 바람들을 가득 담은 노랑 빨강 파랑 초록의 종이 나뭇잎이 알록달록하게 나무를 뒤덮고 있다. 대학입학에 대한 염원과 갈망이 제일 많긴하지만, 그 사이사이로 부모님 건강 기원, 아픈 것 낫기, 일자리 찾기, 자격증 시험합격, 결혼하기, 마음 변치 않기 등 세상의 모든 바람과 기원들로 빼곡하다. 하나 하나 읽어보면 자연스레 가슴이 짠해지고, 이어서 안도감도 올라온다. 모든 것이 나의 바람이었고, 나의 지난 날과 지금, 그리고 앞으로의 삶이 모두 겹쳐진다. 신기하다. 삶이란 지극히 개인적이고 개별적인것 같아도 이렇듯 한 발자국 물러나서보면 보편적인 특징을 띤다. 나 혼자 힘들다며 괴로워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비슷한 고민을 안고 비슷한 길을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나도 뭔가 염원하고 싶다. 세상 모든 일이 노력에 따른 결과임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노력없이 바라기만 하는 것은 도둑놈 심보임을 잘 알지만, 지금 이순간 나는 뭔가 열렬히 바라고 싶다. 나를 위해서, 나의 가족을 위해서. 5천원을 주고 산 노란 종이 나뭇잎의 앞에는 부모님들을 위한 바람을 적고 뒤에는 아내와 아이들을 위한 바람을 적는다. 건강하기를, 하는 일 모두 잘 되기를. 갈망과 염원들로 이미 무거워질데로 무거워진 나무 가지에 노란색 염원을 하나 더한다. 하나쯤 더한다고 무슨일이 있으랴. 제발 들어주시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까지 얹는 바람에 나무 가지가 더 쳐져 늘어졌다.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뒷걸음으로 조용히 물러난다. 이러려고 내가 여기에 온 것이겠지.


형형색색의 염원과 갈망이 가득한 법당과 마당을 지나면 수행의 공간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다. 무채색의 적막을 가득 담은 공기가 바닥으로 쫙 깔리며, 조금 전까지의 염원과 갈망들은 이 곳을 넘어가지 못하고 뒤로 물러선다. 아주 조용히 그리고 묵묵히 진행되는 수행은 주변 공기까지 서늘하고 위압적으로 바꾼다. 누가 보기라도 할까봐 마음 졸이며 나는 살금살금 고양이 걸음으로 겨우 빠져 나온다.


객기와 호기

산에서 길을 잃어본 적이 있는가? 나는 퍽이나 자주 길을 잃는다. 처음으로 접한 산길에서 혼자 길을 잃은데다 하늘도 노랗게 물들어가기 시작하면 불안은 겉잡을수 없이 커진다. 처음이라서 길을 잃을 수도 있다거나, 길을 잃어버린 그 때가 바로 새로운 길이 시작되려는 것이라는 위로도 있지만, 나는 늘 위로보다는 책망을 택했었다. 주저없이 그 막막함 속으로 성큼 들어가서 막막함을 확신으로 바꾸어가는 것, 그것이 바로 여행이 가진 신비로움인데도 나는 나를 박하게만 대했다. 여행과 너무나도 흡사한 인생길, 나는 성큼성큼 걷지 못하고 늘 망설임의 잰걸음이었다. 올해는 계절을 지나 망설임이 낙엽처럼 길위에 떨어질 때 즈음에야 걸을 수 있었다.


전나무길을 지나면 오래 기다렸다는 듯이 월정사가 바로 나타난다. 법당앞 마당에 먼지를 일으켜 쓸고 지나는 바람처럼 나는 9층 석탑과 참선공간을 휑하니 지나 사찰 밖으로 걸어 나갔다. 대뜸 눈앞에 ‘여기가 바로 네가 찾던 길의 시작이다’라고 말하듯이 ‘선재길’이라 적힌 푯말이 일주문처럼 나타난다. 제대로 왔다. 발걸음에 확신이 생기고 걸을때마다 땅에서 충전을 받는 듯이 몸이 가벼워진다. 아주 기분좋은 시작이다. ‘길’이란 말과 ‘길다’라는 말이 조화롭게 겹쳐지는 ‘긴 길’을 하루 종일 걷는 것이 오늘의 목표다.


만만하게 볼 길이 결코 아니었건만 나는 너무 호기로왔다. 일반적인 산책로 또는 가벼운 산길 정도로 얕잡아 보고 등산용 스틱(지팡이)를 차에 남겨 두고 출발한 것이다. 편평한 길에서는 괜히 짐만 되었던 경험이 많아 오늘은 그냥 두 다리에 의지해서 올라가 보기로 한 것이다. 하나하나 따져가며 채비를 했건만, 결국엔 괜한 객기가 치밀함을 이겼다. 찜찜했던 마음은 이내 걱정으로 가득차고 결국은 진짜 문제로 나타났다. 십리도 못가서 발병이 난 듯이 오른쪽 발에 물집같은 통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뿔사. 이미 늦었다며 내귀에 고함친다. 후회는 항상 늦다. 어쩔수 없이 길 옆에 부러진 나뭇가지를 골라 지팡이 삼는다. 좋은 지팡를 찾는 것이 느닷없이 가장 중요해졌다. 짓꿎은 도깨비 장난에 홀린 것만 같다. 걸어가야할 길은 이미 관심에서 사라지고 길가에 버려진 나뭇가지들만 계속 눈에 들어온다. 파란 하늘도, 시원한 나무 그늘도, 강변에서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도 모두 나에게서 사라져버렸다. 슬랩스틱 코미디같이 지팡이 바꾸기만 무한 반복하며 1킬로미터 넘게 걸어가야만 했다. 단단한 지팡이가 손에 들려 지고 나서야 비로소 머리 속으로 서늘한 바람 한줄기가 불어왔다. 얕잡아볼 산길은 없으며 결코 인간의 두 다리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며 속삭여주는 바람 한 줄기. 식어가는 땀과 함께 자연에 겸손해야함을 몸에 배어 넣었다.


선재길과 오대천

한강이 시작된다는 이곳 오대천 줄기를 바짝 붙어 나란히 걸어 올라가는 ‘선재길’은 상원사에서 멈춘다. 세조 임금이 피부병을 씻어 나았다는 전설이 흐르는 오대천에는 치유의 기운도 있다. 기도를 위해 상원사로 올라가던 임금이 신하들을 모두 물리고 혼자 오대천물에 목욕을 하려고 할 때 홀연히 동자가 나타난다. 어린 동자는 그 작은 손으로 기꺼이 임금의 등을 씻어 내린다. 임금을 만났다는 말을 하지 말아달라는 요청에 어린 동자는 문수보살을 만났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답하고는 홀연히 사라진다. 임금의 등에 난 피부병도 함께 사라진다. 간절한 요청엔 우연을 가장한 응답이 주어지나보다. 흐르는 물에 발도 담구고 뭔가 씻어내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하지만, 내려올 때를 기약하며 고집스럽게 목뒤로 흘러 내리는 땀만 닦아 내린다.


때로는 강의 왼쪽, 때로는 오른쪽으로 걸어가는 선재길은 나무다리, 섶다리, 징검다리로 강을 건넌다. 산바람인지 강바람인지, 다리위에서 맞이한 바람은 머리속 모든 생각들도 흩어버린다. 머리속까지 시원함이 바람의 원래 모습이다. 시원함이라면 그늘진 산길도 빼놓을 수 없다. 더운 여름에 등산한다고 말하면 위험하다고 목청을 올려 말리는 사람이 있다. 사실 울창한 산일수록 산길의 대부분이 그늘임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그늘길에서 마주하는 등골까지 서늘하게 만드는 산 바람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이 바람앞에선 어떤 걱정들도 맥없이 흩어져 날아가버린다.

울창한 나무 그늘길 여기 저기에 놓인 명상쉼터는 이곳이 바로 구도의 길임을 자랑스럽게 주장한다. 따갑게 내리 꽂히는 마지막 여름 햇빛을 가려 나를 보호해주는 선재길, 그 그늘길에서 눈을 감고 앉아 호흡을 찾는다. 시원한 바람이 귀를 간질이고 목 뒤에 선물같은 서늘함을 남기고 지나간다. 지금이 기회다 싶어 자신이 이곳의 주인임을 대놓고 외쳐대는 풀벌레 소리만 유일하다. 이곳에서 나는 특별하지 않다. 그저 이곳을 구성하는 아주 작은 부분일 뿐. 이것을 내가 찾아 왔던가.

화엄경에 등장하는 선재동자의 이름을 따라 ‘선재길’이라 부른다. 불도를 구하기 위해 53명의 선지식을 찾아다녔다는 선재동자와 모든 구도자의 모습이 자연스레 겹쳐진다. 월정사와 상원사를 잇는 이 길을 수없이 오갔을 스님들도 겹쳐진다. 반대편에서는 등산복차림의 사람들이 계속해서 걸어 내려오고 있다. 이들은 어떤 마음일까, 무엇을 찾으러 왔을까, 찾으려 하는 것을 결국 찾게 될까. 이름모를 등산객들도 선재동자와 자연스레 겹쳐진다. 모든 것이 겹쳐지는 이 길, 그 길위에 내가 있다. 갈수록 무거워지는 다리와 아파오는 발바닥의 생존욕구는 구도자의 질문들을 머리속에서 계속해서 지워버린다. 오대천에 발을 담구고 마냥 쉬고 싶은 마음도 걸어가는 길만큼 커져만 간다. 힘에 부치는 삶일수록 고민이 많아지고 시간은 부족하다. 야속한 시간을 탓하고 나 자신을 탓하며 나는 그저 서두르기만 한다.


걸어 내려오는 사람이 대부분인 선재길. 그늘속에서 침묵의 길을 홀로 힘겹게 올라가고 있는 나와 대비되어 밝은 햇살 가득한 길을 시끌벅적하게 걸어 내려오는 사람들. 진지함과 경쾌함이 극한의 대조를 이룬다. 게다가 오대천에 몸을 담구고 망중한을 즐기는 사람들은 비현실적이기까지 하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나는 위축되고 만다. 버스를 타고 올라가서 천천히 걸어내려오는 사람이 많다는 스님의 말씀이 이제야 생각난다. 걸어 올라가서 정복하고 말겠다는 고집과 아집이 스님의 친절한 권고를 귀너머로 흘려보낸 것이다. 이질감과 후회 위로 부러움이 내려 앉는다. 구도의 길이 원래 이러한 것이라 애써 마음을 토닥여본다. 굳이 이렇게 힘줘서 걸을 필요가 있는가. 내가 이러려고 여기에 왔던가.


한참을 올라가면 기도도량이 오른쪽에 보이고 왼쪽으로는 징검다리가 오대천을 가로질러 간다. 시원한 강물에 손이 먼저 반응하고, 이어서 발이 따라간다. 몸을 숙여 손을 씻고, 얼굴의 땀도 씻어낸다. 목덜미를 흘러내리는 물 줄기들, 바람과 만나 유난히 시원하다. 햇살아래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물비늘들. 물의 속성은 시원함, 정화, 위안이다. 한참동안 멍하니 물길에 마음과 몸을 빼앗긴다. 시간이 멈추었다가 잠시, 아주 잠시동안 사라져버린다. 망중한이다. 휴식의 진정성은 바쁜 중이라야 비로소 알아볼 수 있다. 문득 아직 갈 길이 멀었음을 깨닫고 다시 길을 재촉한다.


몇해 전 남미의 익스트림 크로스컨트리 대회 우승자와 인터뷰한 것을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렇게 멀고 힘든 길을 어떤 마음으로 걷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우승자는 단지 다음 한 걸음에만 신경쓴다고 대답했다. 힘들고 지칠수록 지금의 한 걸음에만 집중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참된 위대함은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있는 것이다. 한걸음 한걸음이 위대하게 모여 결국 불가능해보이던 결과를 현실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것이 위대함의 비결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위대하게 걸으면 되는 것이다. 한결 가벼워진 다리와 한결 편안해진 발바닥에 고마워하며, 그 우승자처럼 한걸음씩 한걸음씩 걸어간다.


갑자기 선재길 흔적이 사라지고 차도를 걷고 있는 것을 알아차린다. 피부에 난 모든 털에 힘이 들어가고 갑자기 소리가 사라진다. 뒷목도 서늘해진다. 뭔가 잘못되었다. 본능적인 인식과 함께 비상! 비상! 경고 방송이 켜진다. 낯선 길인데다가 시간까지 쫓기기다보니 마음은 사정없이 더 안달한다. 내가 바른 길을 걷고 있는가 하는 의심은 이내 큰일이 일어날 것 같은 두려움으로 바뀌더니, 얼른 정답을 찾아내라고 생떼를 쓰는 소리때문에 머리가 멍해진다. 지면에 착하고 달라붙어야 할 발걸음이 공중에 반쯤 떠서 어설프게 축지법 흉내내며 걷고 있다. 되돌리기엔 이미 너무 멀리왔다. 오늘 벌써 두 번째 어쩔 수가 없게 되었다. 나는 확실히 길을 잃었다.


’이 길도 어차피 상원사로 가는 길인데 뭐 어때! 여기도 시원하군, 이길도 선재길인데, 뭐.‘ 라며 우겨대는 목소리가 머리에 가득하지만, 저 깊은 속에서는 정반대의 목소리가 올라와 서로 힘겨루기를 한다. 정말 다시 돌아가면 더 나으려나? 혼란과 미련으로 발걸음이 더 무거워진 것이 확실하다. 운동장 한 가운데에 꽂혀 이리저리 흔들리는 깃발마냥 마음이 갈팡질팡한다. 이럴 때 필요한 게 바로 용기다. 실수할 수 있는 용기 말이다. 실수해도 괜찮다는 믿음이 있다면, 그 어느 순간에라도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고, 또 배워갈 수 있다. 이런 상황이면 나는 늘 앞으로 걸어가는 것을 선택했었던 것 같다. 나는 새로운 길을 경험해 보고 싶었다. 객기라고 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런 객기를 나는 싫어하지 않는다. 쭈뼛쭈뼛하며 한참을 걸어 올라간 후에야 상원사 주차장에 이를 수 있었다. 내 이럴 줄 진작에 알았다. ‘선재길 시작’이라는 푯말이 강 건너편을 향하고 있었다. 아까 손을 씻은 그 자리가 바로 엇갈린 지점이다. 하나를 얻고 배웠으니 하나는 양보해야지. 주거니 받거니는 삶의 특질이니 아쉬워한들 무엇하리, 그저 자연스레 받아들여야지.


상원사

내려 갈 때는 버스를 타고 가리라하며 차시간을 살펴본다. 5시 출발이라는 시간표가 눈에 들어온다. 아직 2시간이나 남았다. 상원사와 적멸보궁을 느긋하게 둘러보고, 기념품으로 손수건을 사서 땀을 식히는 모습을 상상하며 살짝 웃어보는 여유도 부려본다. 상원사로 가는 길은 차길과 산길이 있는데, 일부러 산길을 택해 본다. 점심을 건너뛰려 아침을 많이 먹었지만 배속 주인은 내 맘과는 다른가보다. 쉴때마다 허기가 찾아왔다. 그저께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사둔 제주 보리 건빵을 꺼내서 명상쉼터에 걸터 앉는다. 불교 명상의 핵심은 휴식이라고 했던가. 산길을 등지고 앉아 땀이 가득 배인 가방을 내려놓고 나무들을 바라본다. 이 숲의 주인인 나무와 모기와 날파리의 앵앵거리는 소리만 나를 둘러싼다. 자리세라도 받으려는 듯 내 다리와 두 눈을 노리고 있다. 지금 여기서 나는 한낱 시덥잖은 먹이에 지나지 않는다. 혹은, 잠시 불어 지나가는 바람에 지나지 않는다. 자리를 내어준 주인의 호의에 감사하며, 호흡과 건빵과 모기들의 중간 쯤에 앉아 땀을 식힌다.

발자국 소리에 나도 모르게 눈이 힐끗 뒤를 돌아본다. 아까 주차장에서 잠시 보았던 얼굴들,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던 이들이 지나간다. 나이를 먹어가며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이 재미있어졌다. 호기심이 발동한다. 어떤 사람일까 하며 외모를 관찰하다가 이제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하며 그 사람 안에 놓인 세계가 궁금해진다. 나와는 어떻게 다른 삶을 살고 있을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려 할까. 행여 나에게 도움될만게 있지 않을까. 이미 녹록치 않은 내 삶은 오답이라 치부하고 혹시몰라서 그들에게서 정답을 찾아본다. 이기적인 얄팍한 심보가 호기심을 빙자해 슬쩍 고개를 내밀지만, 비교해보고 혹시라도 내가 상처받을까 싶어 이내 호기심을 거둔다. 남들에게 나를 비춰보며 살아가는 것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인간의 모습이자 습성일 것이다. 스스로의 힘이 약할 수록 남들과 비교하여 나를 확인하려는 것이다. 더욱 초라해져가는 것을 피할 수는 없지만 아주 가끔은 삶의 에너지를 얻기도 한다. 호기심은 삶과 여행의 공통 속성이기도 하다. 이해타산의 얄팍함을 넘어선 순수한 호기심이라면 삶을 새로운 길로 인도해줄지도 모르겠다.


적멸보궁

다음 목적지는 전국에 다섯 곳만 있다는 적멸 보궁이다. 모든 번뇌를 녹여 없애는 이유는 바로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말 그러한지 이 두눈으로 이 몸으로 직접 목격하고 싶는 오기가 발동한다. 몇 걸음도 못가서 이내 걸음이 멈춘다. 차길과 산길로 길이 다시 나눠지는 것이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라는 말은 결코 빈말이 아니다. 아주 사소해 보일지라도 지금 이순간 나는 매우 심각하다. 인생의 기로에 서있다는 말은 확실히 삶의 모든 순간에 적용된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가만히 선 채로 머리는 지구 자전속도만큼 빨리 돌아간다. 발바닥은 물집이 잡히는지 계속해서 아파오고, 다리 근육도 이미 충분히 탱탱해져 있다. 차길은 길어보이고 임도는 가팔라보인다. 버스 출발 시간과 대략적인 소요시간의 비교. 예기치못한 변수에 대한 고려. 쉬운 길은 웬지 오늘 분위기와는 맞지 않아 보인다는 그놈의 객기 아니면 호기. 실수를 한다면 어떤 것을 배웠다고 우길 수 있는지. 수능 시험치듯 모든 지적 능력과 경험과 논리를 긁어 모아 계산에 계산을 거듭한다.현명한 선택을 했는지 그렇지 못했는지는 비록 한참이 지나야만 알게 되겠지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검토를 했다는 것과 남들에게 설명할 수 있는 이유를 찾았다는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면, 실패에 대한 면죄부를 발부해서 뒷주머니에 슬며시 꽂을 수 있다.


아무리 비밀스러운 혼자만의 일일지라도, 특히 실패의 가능성이 있는 경우에는 더더욱 이런 방식의 납득작업이 필요하다. 그렇게 실패에 대한 비난의 화살을 피해갈 수 있다. 상황이 바뀌면 계산식도 계속 바뀌어 가겠지만 계산식의 필요성에는 변함이 없다. 지금 이순간 나의 계산식에는 ’좀 더 나다운‘ 모습, 즉 마음에서의 ’끌림‘이라는 단어가 네온 간판처럼 깜빡인다. 현명한 선택을 위해서는 ’마음‘을 다듬는 수밖에 없다. 그게 내가 여기에 있는 이유이리라.


차길이 아닌 산길을 택하여 걸어간다. 가파르더라도 더 빨리 도착할 것이라는 예측을 증명하려는 듯 더욱 더 힘을 짜내어 밀어부친다. 이제는 햇볓도 뉘엿뉘엿해져 여유를 부릴 시간도 저물어 간다. 계단 넘어 계단, 울퉁불퉁 돌길과 산길이 번갈아 나타난다. 이 정도일 줄은 예상치 못했다. 의기양양했던 계산식을 이제는 의심과 비난의 눈빛으로 날카롭게 쏘아 본다. 머리로는 계산식을 나무라지만 실망감은 그 너머의 나 자신에게로 향한다. 차라리 차길로 가면 발이라도 덜 아팠겠지.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미련으로 가방을 가득 채우고 걸어가는 내내 짐이 된다. 실망감을 현실로 만들지 않으려고 더욱 용을 쓰며 올라간다. 땀이 비오듯 하고 헐떡거리는 숨과 함께 입에서는 신음만 나온다. 내려오는 사람들은 의하해하며 나를 바라본다. 맑은 저녁 노을빛이 묻어 온화하기까지 얼굴들을 마주한채, 오직 나 혼자만 죽을 애를 쓰며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2킬로미터 남짓한 산길에서 선재길 9킬로미터 버금가는 땀을 애처롭게 쏟아 붓고 있었다. 무엇을 그리 증명해야 했는지, 무엇에 그리 쫓겨야만 했는지.

적멸보궁은 생각보다 더 아담하고 작은 암자였다. 진신사리를 모시는 적멸보궁이라기에 웅장함을 기대했기에 더욱 허탈했다. 암자 뒤쪽에는 작은 나무 모양이 새겨진 비석이 서 있고 그 뒤로는 작은 언덕이 아주 평범하게 자리잡고 있다. 바로 이곳에 너무나도 보편적인 모습으로 돌아가신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묻혀 있다. 매트를 바닥에 깔고 앉는다. 노래처럼 들려오는 불경 소리는 마법의 주문처럼 머리 속 시끄럽던 목소리를 잠재우고 피부에 와닿아 땀을 식히는 바람을 더욱 온전하게 했다. 지금 이대로 충분했다. 이순간 뭘 더 바라겠는가. 유명한 미국의 상담 및 최면치료사가 자신을 찾아온 내담자의 고민을 듣고서는 뒷산을 올라갔다가 오라는 처방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영문도 모르고 산을 오르며 흠뻑 땀을 흘린 내담자는 치료사와 별도의 상담없이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돌아갔다는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본래 자리인 자연에서 자연과 하나가 될 때 치유의 힘도 스스로 드러나게 된다. 바람만이 온전하게 느껴지는 이 순간, 이 곳엔 고민도 걱정도 바람도 기원도 함께할 수 없다. 단지 지금 이대로 충분했다.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어떤 면에서 우리는 항상 이대로 충분하고 또 온전한 것이다.


먼산마루에서부터 붉게 물들어오는 석양에 다시 걸음을 재촉한다. 또 다시 갈림길이다. 차길이냐 산길이냐. 이번에는 차길을 택한다. 총총걸음이 수월해 보였고, 걷지 않은 길을 걸어 내어 완료하겠다는 의지도 덧붙인다. 뒤따르던 아주머니 두 분이 나에게 길을 물어온다. 올라왔던 차길은 계단이 너무 많아 힘들었는데 산길은 어떠냐 하신다. 길이 험하고 계단이 많고 경사가 심하다고 말씀드렸지만 이 두분은 벌써 저만큼 성큼성큼 산길로 걸음을 옮겨간다. ‘더 힘드실텐데요’라는 나의 말은 안으로 먹어서 그들에게 닿지 못한다. 차길을 경험해보지 못한탓에 내 목소리에도 힘이 실리지 않았다. 나는 서둘러 차길로 내려간다. 산길 초입에 만났던 계단보다 갯수가 더 많지만, 속도는 두 배로 빨라졌다. 안전하게 내려가셔야할텐데 하며 걱정스러운 눈빛을 산길로 한 번 더 보내고는 나의 내리막 길에 힘을 보탠다. 저물어가는 차길에 서서히 가로등이 켜지기 시작한다. 걸어 올라오는 사람들에게도 여유있는 눈길을 주며 산세를 관찰하며 내려간다. 올라올 때와는 모든 것이 다르다. 올라올 때 보이지 않던 산마루의 능선들이 또렷이 보이기 시작한다. 땀나지 않는 여유, 애써 성취해야할 것이 없는 자유로움. 발길도 가볍다. 산의 속성은 애씀과 내려 놓음이다. 그리고, 자유로움이다.


선재동자

생각보다 빨리 도착한 상원사 주차장에서 한번 더 버스 시간을 확인한다. 아직 4시40분이어서 20분의 여유가 있으리라 생각한 순간, 또 다시 뒷목이 서늘해 온다. 5시 버스의 출발지는 이곳 상원사가 아니라 진부였던 것이다. 상원사 출발은 4시30분과 5시 40분.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내려오는 길에 가득했던 자유로움과 여유는 한순간에 한심함과 실망감으로 바뀐다. 숙소까지 뛰어서 내려갈까. 9킬로미터 거리이니 두시간은 안걸릴 것이지만, 그래도 저녁 식사와 저녁 명상 모두 놓치게 된다. 5시40분 버스를 타고 내려가더라도 어차피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다. 다시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완전한 체념과 실망이다. 욕심을 내려 놓는 것이 아니라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어졌다. 차라리 에너지 보충을 위해 어묵이나 커피라도 먹을까하는 심정으로 기념품 가게에 들어갔지만 이곳도 문닫을 준비가 한창이다. 손수건을 하나 사면서, 혹시나 태워주지 않을까하는 기대로 버스시간을 물어본다. 간절한 나의 눈빛을 애써 외면하는 주인 아주머니. 차라리 9킬로미터의 차길을 마저 완료하겠다 마음먹고 나니 한결 여유가 생겼다. 늦으면 숙소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면 되니 딱히 문제될 것도 없다며 어깨를 힘주어 펴본다. 등산화 끈을 다시 당겨 매고 가방끈 길이도 조절하고 가볍게 뛰어내려 간다. 자유롭게 뛰어간다. 한걸음씩만 뛰어가면 되는 것이다. 그게 전부다.


그러면서도 스쳐 지나가는 차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혹시나 하면서 눈빛에 애절함도 담아 보낸다. 작전이 성공했을까. 흰색 SUV 한 대가 멈춰선다. 운전사쪽 창문이 스르르 내려가더니 ’태워줄까요?‘ 하신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던가. 월정사 나무가지에 붙여둔 나뭇잎이 반응한 것인가. 감사한 마음이 앞서지만 하루종일 배인 땀냄새에 미안함이 더 크다. ’감사합니다만 지금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요.‘, ‘괜찮아서, 타세요.‘ 미안함과 고마움을 얼굴에 담아 앞자리에 올라탄다. ’올라가다고 잠시 뵀는데, 헤어스타일이 너무 멋지셔서 기억했어요.‘ ’저도 얼굴은 기억이 납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살다보면 이렇게 놀라운 일도 벌어진다. 십년이 넘게 명리학을 공부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대뜸, ‘운수 한번 봐드릴까요’ 한다. 저는 ‘잘 믿지 않습니다’만 하면서 마지못하는 척 생년일시를 알려준다. 그분은 자신의 휴대폰을 주면서 나더러 직접 입력하라고 하는데, 자세히 보니 사주팔자 어플이었다. 그렇다. AI 시대엔 모든 것은 디지탈로 돌아간다. 데이타 기반이라 객관적이라 뉘앙스를 가득 담은 어플이다. 기본적인 것은 이미 모두 표준화되어 있고, 그 위에 공부하신 분들의 내공을 얹는 것이다. 행간과 뉘앙스를 읽어내는 지혜로 완전한 마무리를 하게된다.


1초도 안되어서 사주팔자가 나온다. 그 분은 힐끗 살펴 보시고는 사주를 읊어 주신다. 조상님들의 보호가 많지 않아서 혼자 노력을 많이 해야한다, 60이 넘어서면 운이 트인다, 가능하면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이 좋겠다. 등등. 명상가의 길을 걸어가려는 나의 모습과 사주팔자가 교묘하게 겹쳐진다. 이런 저런 작은 이야기들로 내려오는 길을 채우고 이른 시간에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녁을 배불리 먹고 그대로 침대에 누워 두어 시간 회복기를 가지다가 결국 저녁 명상시간은 건너뛰게 되었다. 그러나, 마음은 한결 더 가벼워졌다. 선재길에 들어서면 모두가 선재 동자가 되는건 아닐까.


일찍 잠이든 탓에 아침에도 일찍 눈이 떠졌다. 5시 되기 전의 이곳은 안개와 고요만 가득하다. 서둘러 밖에 나가 산책을 한다. 11시에 퇴실이니 지금이 나에게 허락된 유일한 아침 산책시간이다. 명상원 옆에서 시작된 ‘번뇌의 길’을 따라 한참을 걷다보니 어느덧 월정사 앞 전나무 길에 도착해 있었다. 신발을 벗으려다말고 오른쪽으로 난 ‘해탈의 길’에 들어선다. 울창한 나무들 가득한 길에는 인적이 전혀 없다. 걷고 또 걸어본다. 길을 잘못든 것이 아닌지 가끔씩 휴대폰 속의 나의 위치를 찾아 안심을 시켜가며 걷는다. 문득 수목장 묘지가 눈앞에 나타난다. 애도객이 아니면 들어오지 말라는 표지가 이곳 관리인인양 길 중간에서 양팔벌려 나를 막아선다. 산책로가 여기서 끝일지 아니면 이곳을 지나서 이어질지 궁금해하면서 발길을 돌린다. 그러다 다시 발길을 돌려 끝까지 가보기로 한다. 나란히 심어진 수목장 나무들 아래에는 서로 다른 삶들이 묻혀 있다.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삶인지는 알수 없지만, 찬란했던 삶을 졸업한 이들에게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한다. 몇 걸음채 되지도 않아서 이 곳에서 길이 완성되는 종착지임을 알게 된다. ’해탈의 길‘의 의미를 알고 멋적게 웃어본다. 어리석음에 의심이 더해지면 결국 헛걸음이 된다. 또 하나를 배우고 돌아간다. 모르는 길일 수록 안내판을 잘 살펴 읽어야 한다. 다만 제대로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은 이미 거기에 적혀있다.


전나무 길로 다시 돌아와 이번에는 신발을 벗고 맨발로 대지를 맞이한다. 시원하고 축축하고 서늘한 느낌이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올라온다. 어저께 만난 다른 발들처럼 나의 온기를 전해주고 대지의 생명의 기운을 받아온다. 대지의 단단함과 전나무에 걸린 글귀들을 마음속에 새겨넣는다. 마주쳐서 걸어오는 한 둘의 인기척. 서로 눈길을 피하여 발길을 방해하지 않는다. 같은 길 위에 있지만 걸어가야 하는 길은 서로 다른 길이다. 나는 그저 나의 길을 가는 것이다. 하늘을 보고, 전나무의 우듬지 끝을 보고, 줄기와 뿌리를 보고, 나무가 전하려는 말을 들으려 귀를 귀울이고 냄새를 맡는다. 그저 걷는다. 지금 이 순간 이 길이 나의 전부다. 시원한 물에 발을 씻어 내리니 반대로 감사한 마음이 올라온다. 이 길을 맨살로 대하려고 내가 여기에 왔나 보다.



어제 저녁에 만난 선재 동자가 없었다면 지금 이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이른 아침의 번뇌의 숲길도, 해탈의 숲길도, 전나무 길도 없었으리라. 그리고, 지금 발을 스치는 시원한 씻어내림도 없었으리라. 세상엔 저 혼자서 되는 것은 없다. 손과 발이 서로 엉키고 서로 맞잡아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일어난다. 이런 기적같은 순간들로 삶이 채워지고 우리는 그 기적들 사이를 감사함으로 채워야 한다. 매순간 모든 것들에 말이다.

이것을 위해서 내가 여기에 왔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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