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삼월, 국화와 나 그리고 존재의 순간

경계에 머무르며 연결하기

아침 산책길에 항상 지나가는 커피 가게가 있다. 키 큰 소나무숲에 자리 잡아 마치 산의 일부가 된 듯한 커피 가게가 있다. 사람 키보다 더 큰 통창문, 그 사이로 비치는 커피 내리는 사장님의 분주함, 그것만이 유일한 움직임이다. 햇살이 유난히 눈부시고 따가운 오월의 아침, 살랑이는 바람에 호기심이 일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주인과 나 이렇게 둘, 나는 첫 손님이다.


가게 주인은 식물을 닮아 있다. 살짝 짓는 미소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같다. 가게와 하나가 된 주인은 특별한 향을 내뿜지 않는다. 가게를 둘러싼 소나무의 시원함과 싱그러움만이 살짝 묻어 있을 뿐이다. 유일한 에너지원인 태양의 기운을 받아 따뜻함도 시선에 담겨 있다. 애써 눈길을 주지도 피하지도 않는다. 원래부터 그래왔다는 듯한 무심함. 자연스럽다.

안쪽 벽에는 언제 자기 차례가 오려나 하고 기다리는 책들로 가득하고, 바닥엔 고소한 커피 향이 소나무 껍질같이 갈라져 흩어져 있다. 작은 테이블 위에는 노랗고 빨간 얼굴을 가진 초록색 존재들은 이미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너는 누구니 하며 물어올 것처럼 당당한 표정으로 주인행세를 한다. 지나가는 여행자인 나는 조심스럽게 의자를 빼내고 대상이 누군지도 모른 채, 어색한 눈치 속에서 조심스럽게 자리를 잡는다.


어색함, 속하지 않은 이방인 느낌이 피부부터 스며든다. 온몸이 0.1 밀리미터쯤 수축되는 듯한 감각. 체온이 내려가고 부르르 하며 몸도 조금 떨어본다. 커피가 내려지는 한참 동안을 나를 이곳에 익숙하게 만들려 애쓰고 있다. 나보다 먼저 이곳을 차지하고 앉은 향기와 색깔과 분위기에 익숙해지기를 기다린다.

긴 통창 너머 바깥세상이 눈에 들어온다. 찔리면 따가울 것 같은 소나무 잎들은 반짝거리며 윤이 나고, 땅바닥에 눌러앉아 바람에 흔들리는 민들레 위로 사람들의 발자국들이 넘어 지나간다. 생경하다. 그저 먼 세계 같다. 안과 밖의 두 세계. 닫힌 유리창이 그 경계다. 조금 전까지 저곳에 있던 내가 맞나? 안에서도 밖에서도 나는 불편하다.


커피잔을 반납하는 테이블 옆에는 붉고 푸른 잎으로 가득한 식물이 있다. 흰색 사인펜으로 잎의 가장자리와 줄기를 그려놓은 듯이 재미난 모습을 가진 식물, 이름을 물어보았다.


- 제가 식물을 좋아해서 주기적으로 농원에 직접 가서 골라오곤 하는데요. 사 올 때는 이름을 알았었는데 잊어버렸어요. 손님들이 오실 때마다 물어보곤 하는데 아무리 해도 알 수가 없어요. (안타깝고 실망스럽고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 그렇군요. 답답하셨겠어요.


슬쩍 사진을 찍어 검색해 본다. 하지만 쉽게 나오지 않는다. 커피를 반쯤 마실 때까지 계속 찾는다.


- 검색해 보니 '호야 카이라이'가 그나마 비슷해 보입니다. 호야가 종류가 되게 많은데 아마도 제일 비슷한 이름 같아요.

- 호야... 그래요, 호야. 이제 기억이 났어요. (얼굴이 밝아지고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반년 동안이라 몰랐었는데 이제야 알게 되었네요. 고마워요.


가게 주인은 노란색 접시 위에 고소한 초콜릿 향을 풍기는 바삭한 쿠키 하나를 얹어 고마움을 표시했다.

대화 한 잔을 나누는 사이 나는 편안함과 연결되었다.

따뜻한 여운 속에서 조금 더 쉬고 난 후, 접시에 가득 미소를 담아 감사를 전했다.

가게를 일어섰다. 그리고, 화창한 햇살 속으로 다시 걸어 들어갔다.


그 후로도 긴 유리창 너머로 몇 번이고 시선을 보냈지만, 가게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봄 햇살이 꿈틀거리며 반짝이는 삼월의 오전, 별 기대 없이 돌린 눈길에 활짝 열린 유리문이 들어왔다. 열린 통유리문 바로 앞에서 누런 줄무늬 고양이와 함께 가게 주인은 아침 볕을 쬐고 있었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어울림에 이끌려 가게로 들어간다.


- '자연스러움 위에 포근함이 올려진 안식처 한 잔 주세요'라고 주문하면 안 되겠지?

이곳은 아직 그런 곳이 아니지. 첫 손님은 더더욱 그러면 안 되지. 나만의 해석과 의미를 부여하여 커피 한 잔을 시킨다.


나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것은 아메리카노 한 잔이다. 늘 그렇다. 세 줄로 세로로 길게 늘어 뜨려 진 메뉴 속에서도 선택의 여지는 없다. 단맛을 별로 즐기지 않는 나에게, 늘 아랫배가 차가운 나에게, 세상 어디에 가도 아무런 걱정 없이 주문할 수 있는 유일한 메뉴는 따뜻한 커피 한 잔이다. 바깥세상이 불타올라 내 안의 피조차 끓어오르는 한 여름에도 나는 뜨거운 커피를 마신다. 모든 메뉴의 가장 위에 있는, 그리고, 다른 메뉴의 가장 기본이 되는 커피 본연의 한잔이다. 커피잔을 잡은 손을 타고 건너온 온기는 금세 온몸을 타고 내려가고 일렁이는 커피 위로 포근함이 빈 공간으로 흩어진다. 아득한 추억 가득한 방의 낡은 문손잡이 같은 향기, 씁쓸하면서도 상큼하게 입안을 돌아다니는 커피의 근본적인 맛. 그것이 나에게 허용된 자연스러움이다. 나를 알아봐 주는 가게 주인의 옅은 미소에 답례를 하고 커피를 받아 테라스로 나간다. 햇볕이 가득한 야외 탁자는 드디어 나의 안식처가 된다. 잠시 동안의 쉼터.


커피 한 잔에 이어 반갑게 활짝 핀 작은 화분이 나왔다.


- 이건 무슨 꽃이에요? (반가움을 손으로 가리며 물어본다)

- 가을 국화예요. '다알리아 아니에요?' 하면서 물어보시는 손님이 많은데요. 이건 지난가을에 산 가을 국화예요. ('가을'이라는 말에 힘이 실린다.)

- 어떻게 이렇게 잘 키우신 거예요? 집에서는 잘 죽던데... 비결이 뭐예요?

- 다들 신기해하세요. 보통 12월을 넘기기 힘들거든요. 매일 물을 주고 햇볕도 매일 쬐어줘야 해요. 겨울 내내 퇴근할 때나 출근할 때 가게보다 얘네들을 먼저 신경 썼어요. 날씨가 추워지면 따뜻하게 덮어주고, 영양분도 항상 챙겨야 해요. 화분이 작아서 금방 흙의 양분이 사라지거든요. 우유 팩 헹궈낸 물도 부어주고, 주기적으로 영양분도 꽂아도 줬어요. 꽃망울이 꺼멓게 되면 잘라줘야 돼요. 죽은 거거든요. 죽은 줄기도 잘라줘야 돼요. 그랬더니 계속 꽃이 피고 지고 하더니 지금처럼 되었어요. 겨울을 잘 넘기고 봄이 오고 나니 손님들이 제일 반가워하세요. (안타까움과 따뜻함과 자랑스러움이 목소리에 실린다.)

- 들어가는 정성이 반려견 못지않군요.

- 그래요. 반려 식물 같긴 해요. (조금 전에 본 고양이가 가게 주인의 다리에 몸을 비비고 있다.)


가게 주인에게 고양이와 국화는 구분되지 않는다. 살아있는 생명이기에 동일하고 함께 하는 생명이라 한결같다. 소나무 사이에 자리 잡은 가게 건물도 이제는 하나의 풍경이다. 불어오는 바람도 가게를 구분하지 않고 나무 사이 지나가듯 가게를 훑어 지나간다.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자연스럽다. 커피와 국화와 고양이와 가게 주인. 햇살과 새소리와 지나가는 사람들 소리. 서로 구분할 필요도 없이 모든 것이 원래 그랬던 것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는 지금, 여기는 이대로 풍경 하나다. 물론 그 풍경에는 나도 연결되어 담겨 있다.


나는 안식처를 나와 다시 길 위에 선다.

아직 남아있는 햇살을 밟으며, 다시 세상 속으로 걸어간다.

모든 것과 연결된 채로.



- 국화와 나, 그리고 존재의 순간 -

작고 상큼한 바람이 줄기를 타고 올라 꽃잎을 비집고 들어가 흔들어 깨우면,

붉은 국화는 포근한 오전의 햇살에 샤워를 한다.

눈이 시리도록 찬란하다.

들킬까 두려워 숨죽여 국화를 훔쳐보는 사이

테이블 밑 고양이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몰래 훔쳐본다.

국화꽃잎을 세어 본다.

셀 수 없을 만큼 많고, 셀 수 없을 만큼 적다.

갓 준비된 꽃 봉오리 세 개.

여기저기에 잘린 대궁,

바닥엔 알 수 없는 흰색의 흔적들


유난히 따뜻한 햇볕


까마귀와 비둘기 소리

등산객들 발자국과 목소리

소나무잎 흔들리는 소리

조지 윈스턴의 12월의 기쁨 (December, Joy)

눈을 감으면 커지고, 눈을 뜨면 작아진다.


나는 풍경 속으로 들어가 일부가 된다.

국화를 읽고, 듣고, 마신다.


몸을 감싸던 포근함이 흩어지면

가슴 안쪽에 작은 경련이 느껴진다.


그런 순간, 당신도 있지 않나요? 이유를 알 수 없는 어색한 순간이 불쑥 밀려오는 순간이.

위험해, 서둘러야 해, 여기를 벗어나야 해, 도망쳐야 해.

여기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은데,

지금 이러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은데,

여기는 내 자리가 아닌 것 같은데,

어디로 가야 할까, 어떻게 해야 할까

나만 이러는 게 아닌가


어쩌면 당신도 알고 있을 거예요!

도망칠 곳도 숨을 곳도 없는 것을,

지금 이게 내 모습인 것을,

그런 모습을 계속 외면해 왔다는 것을,

더 이상 미룰 수도 없다는 것을,

더 늦기 전에 대면해야 한다는 것을요.


- 새로운 가이드라인 -

결론을 미리 정하지 말고,

이대로 머물러 보아야 한다.

무리하게 밀어붙이지 말고,

지금 이대로 한참 동안.

그래야 알 수 있다.

- 스스로 다짐해야 할 것들 -

나는 지금 살아 있다. 그것이 중요하다.

나에게는 선택이 있다.

나를 따뜻하게 바라본다.

더 이상 나를 밀어내지 않는다.

따뜻한 손길이 드리워질 것이다.

정 기다리기 지겨우면, 내가 직접 하면 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