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할 수 없으면, 알아차려라.
월요일 아침 7시 45분, 내비게이션을 켜지 않고 차를 출발시킨다. 행선지는 건강검진센터. 오전에 모든 검사를 마치려면 서둘러야 한다. 다행히 광안대교 입구는 아직 여유가 있어 보인다. 바다는 잔잔한 햇살물결로 반짝이고 날씨도 이만하면 화창한 편이다. 오후에는 남천동 벚꽃길을 걸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옆에 앉은 아내도 반쯤은 동의하는 눈치다. 광안리 해수욕장이 눈에 들어올 때 즈음부터 차가 막히기 시작한다. 출근시간이니 으레 그럴 수 있으려니 하는 너그러움도 채 5분이 가지 않는다. 평소 30분도 걸리지 않는 목적지가 내비게이션에서는 1시간 10분을 가리킨다. 9시경에 도착하면 12시 정도에는 마칠 수 있겠지 하며 한걸음 물러난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른 경로를 찾아보지만 도착 시간은 달라지지 않는다.
답답해하는 나를 챙기려 아내는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하며 넌지시 권한다. 사실 나는 이 말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싫은 것을 어떻게 즐기라는 말인가. 아직 철이 덜 든 것인지 아니면 속이 좁은 탓인지, 싫어하는 것을 즐길만한 내공을 아직 쌓지는 못했다. 게다가 내가 운전하는 2차선만 유난히 느리게 움직인다. 1차선에 나란히 달리던 차는 벌써 사라지고 없다. 앞을 가로막은 배송트럭은 시야까지 가린다. 게다가 3차선에서 내 앞쪽으로 끼어드는 차량들만 늘어나고 있다. 차선을 바꿔볼까 하는 유혹도 잠시, '오늘은 건강 검진하는 날이니 더 조심해야지' 하고 마음을 고쳐먹는다. 내 옆에 앉아있는 사람이 자꾸만 신경 쓰인다.
가다 서기를 벌써 30분 동안 반복하고 있다. 내비게이션은 아직 50분이나 남았다고 야속하게 말한다. 차량은 더 많아지고 답답함은 커져만 간다. 급하게 끼어드는 외제차에 최대한 틈을 좁혀 화난 마음을 간접적으로 과시한다. 그러다 이내 공간을 내준다. 차는 여전히 잰걸음이고, 옆차선은 여전히 잘 빠진다. 걸어가도 이것보다는 빠르겠다. 이번에는 컨테이너 트럭이 내 앞을 가로막더니, 양 옆으로도 큰 트럭이 지나간다. 트럭의 거대함은 두려움을 넘어 위험으로 다가온다. 나는 완전히 갇혔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애써 창밖을 바라본다. 먼바다 위로 구름이 떠 있고 바다는 아직 출렁거리고 있다. 답답함을 억지로 즐겨보려 했지만, 마음은 솔직했다. 도무지 이 상황을 즐길 수가 없다, 아니 이 상황을 절대 즐기고 싶지 않다. 미리 교통량을 확인해야 했는데. 진작에 차선을 바꿀걸. 7시에 출발했어야 하는데. 검진이 늦게 끝나면 아내가 힘들 텐데. 내가 너무 안일했군. 또 실수를 하고 말았어. 운전을 그렇게 오래 했어도 아직 이렇게 미숙하군. 모든 게 내 탓이다. 옆에 앉은 사람의 얼굴은 아직 밝아 보여서 나는 더욱 화가 난다. 급할 때는 서로 좀 챙겨주지 하며 속으로 아내를 탓한다. 들킬까 봐 아내의 눈치를 살핀다.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거다.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괜히 화내봐야 나만 손해라는 생각이 든다. 차라리 이 답답함과 이 엄청난 불편함에 마음챙김을 하기로 한다. 묵직한 긴장감이 왼쪽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와 뒷목을 지나 머리 뒤로 이어진다. 허리는 뒤로 밀려나가 쓸데없는 힘을 주고 있었다. 양 어깨도 힘이 들어가 무겁고, 호흡도 짧다. 마음은 계속 조바심을 내고, 이제는 아내까지 탓하고 있다. 지금 나는 화가 나고 있다. 운전대를 꽉 쥐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선 살짝 힘을 빼본다. 화가 조금은 누그러졌다.
결국 평소보다 세배나 오래 걸려서 검진센터에 도착했다. 검진 시작하기 전에 이미 피곤해져 버렸다. 차가 느리게 달릴수록 마음은 더 많이 방황했다. 쓸데없이, 말이다.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 아침의 내 모습을 잠시 돌아본다.
왜 그토록 옆 차선과 나를 비교하며 괴로워했을까? 습관처럼 비교할 때마다 나는 '비교병'이 도졌다고 말했다. 오늘 아침에는 옆차선과 나를 비교했다. 예약 시간과 나를 비교했고, 아내와 나를 비교했다. 돌이켜보면 훨씬 어릴 때부터 그랬던 것 같다. 친구들의 옷차림과 비교하고, 집을 비교하고, 성적, 성격과 외모, 심지어 나의 꿈과 목표와도 비교했다. 더 나아지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비교는 나를 더욱 작게 만들었고, 때로는 불안하게 만들었다. 순간의 우쭐함도 오래가지 않았다. 나는 늘 비교의 중심에 서 있었다. 알고 나면 달라지려나 싶지만, 습관은 고래 힘줄처럼 질기다. 잘 끊어 지지도 않고, 뿌리도 깊다. 마음의 습관이 그래서 더 무섭다.
비교는 어쩌면 나만의 병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는 약육강식의 세상에 살고 있다. 나보다 강하고 나를 위협하는 상대는 피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게다가 더 뛰어나고 우월해지고 싶은 본능적인 욕구는 비교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 나 자신과 대상 사이에 놓인 틈은 비교를 통해서 인식할 수 있다. 그렇게 발견한 틈으로 마음의 갈등과 괴로움이 파고든다. 비교를 하든 비교를 당하든 괴로움은 늘 한결같다. 결국 비교는 개별적이고 아주 특별한 행위가 아니라 본능적이고 보편적인 행동 양식이 된다. 비교하지 않을 방법을 억지로 찾거나 배척하기보다는, 삶의 유용한 기술로서 받아들이는 편이 더 현명할 지도 모르겠다.
먼저 내가 비교를 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런 나의 모습을 순순히 받아들이자. '나'는 수용의 대상이지 외면의 대상이 아니다. 지금의 모습이 형편없어 보인다면, 형편없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자. 갓 태어난 아이가 말을 못 한다고 우리는 절대 나무라지 않는다. 성인이 된 지금에도, 우리의 어떤 측면은 아직 갓난아이처럼 미숙하지 않은가? 남들은 알고 있는 나의 면면을 나만 모르고 있다면 오히려 더욱 당황스러울 것이다. 새롭게 드러난 사실은 절망과 비난의 씨앗이 아니라 기회와 가능성의 씨앗을 품고 있다.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이다.
원하는 상태와 현재의 모습 사이의 틈이 클수록 마음의 갈등도 커진다. 틈이 너무나 거대하여 기대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면 우리는 다른 대안을 찾아 이동한다. 하지만, 기대가 아직 살아있는 한 우리는 갈등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갈등에 익숙해져야만 한다. 세상 일이란 게 어디 마음대로 되던가? 나의 경우는 계획된 대로 흘러간 적이 별로 없다. 세상이 거대하여 나를 세상에 맞출 수밖에 없었고, 남들의 요구에 따라 줄 수밖에 없었다. 갈등과 괴로움으로 점철된 시간의 연속. 한두 번의 피해 갈 수 있을지 몰라도 우리는 결코 갈등을 피할 수는 없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여기에선 어울리지 않는다. 적과의 현명한 동침이랄까, 대신, 마음속 갈등과 함께하는 법은 오히려 훌륭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어두운 길에 놓인 나뭇가지를 뱀으로 착각하고 지레 겁먹고 도망간 적이 있는가. 느닷없는 상사의 호출이나 서먹서먹한 친구의 전화에 안절부절못한 적은, 많은 사람 앞에서 발표해야 하는 상황은 또 어떤가? 몸은 거기에 남겨둔 채 마음은 괴로움 속에 달려간다. 걱정과 긴장은 연쇄반응을 일으켜 결국 거대한 눈사태가 되어 우리를 휩쓸어 가버리고 만다.
마음속 갈등과 함께하는 현명한 방법으로 마음챙김을 권한다. 조바심에 휘둘려 습관적인 가정이나 판단 없이,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마음챙김의 방식이다. 발생하는 걱정과 불안조차도 그대로를 알아차리게 되어 그 크기를 키워가지는 않게 된다. 화가 나는 것을 알았다면, 우선 잠시 멈추고, 화가 몸의 어디서 어떻게 느껴지는지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화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럴 수만 있으면 플래시를 비추어 그것이 나뭇가지인 것을 확인할 수도 있고, 미리 겁먹지 않고 상대방이 하는 말부터 차근차근 들어볼 수도 있게 된다. 피할 수 없으면, 알아차리자.
이런 생각을 받아들여도 당장 큰 변화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아는 것과 실천은 전혀 다른 영역이다. 머리에서 가슴까지, 그리고 가슴에서 손과 발까지 도달하는 데는 시간과 연습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스며들 때 비로소 완전한 '나'의 일부가 된다. 그러자면 평소에 조금씩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왜 그랬을까 하며 후회하며 스스로를 비난하는 대신, 따뜻한 차 한잔과 함께 내가 했던 습관적인 반응들을 자세히 돌아보는 것이다. 어떤 감정이 올라왔고, 몸에서 어떤 반응들이 생겼는지, 그리고 어떤 행동으로 이어졌는지를 돌아보는 것이다. 그렇게 몸과 마음의 상호작용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다 보면, 불편한 상황 속에서도 여유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조바심 내지 말자. 조바심은 비교에서 오는 갈등일 뿐이다. 겨우 빠져나온 구렁텅이로 다시 빠져 들지는 말고, 오히려 그때가 몸과 마음을 살펴볼 최적의 기회다.
오늘도 비교하고 있는 나를 보더라도,
그 모습을 더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