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산에서 다시 찾은 나의 중심, 마음챙김
해운대에 장산(萇山)이 있다. 부족국가 시대의 장산국(萇山國)의 설화가 전해오는 이곳의 공식 명칭은 '장산구립공원', 전국 자치구 최초의 구립 공원이라고 한다. 국립에서 도립, 시립을 거쳐 이제는 해운대구까지, 자연을 보호하려는 의지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해운대라는 이름을 보고 이사 온 나로서는 장산구립공원은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었다. 10년을 넘게 살아오면서 삶에서도 많은 변화가 생겼는데, 그중의 하나가 '산'이 나의 삶으로 돌아온 것이다.
산은 고향처럼 아련한 존재다. 날씨와 상관없이 계절이 지나가도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키고 앉아 나를 바라봐주던 산. 향긋한 나무들, 서늘한 흙냄새, 철마다 색깔을 바꾸는 꽃과 단풍, 황혼에 물든 능선과 깜깜한 밤에도 보이는 산의 실루엣. 말 그대로의 자연의 품에서 태어나고 뛰어놀며 온몸으로 익힌 산이었다. 나의 정서는 산을 닮은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거저 주어진 것들은 쉽게 지겨워지기 마련이다. 커가면서 바다를 더 동경했고, 삶의 터전은 아파트와 차들이 가득한 도시 한 복판으로 옮겨졌다. 나는 그곳에서 안정을 찾으려 애썼다. 직장 생활에 흥미가 사라지고 의무감만 남게 되자 몸은 굳어가고, 마음속의 색깔도 서서히 빛을 바래는 것이 느껴졌다. 치열함과 간절함을 내려놓자, 텅 빈 공허함이 찾아왔다. 휴식과 새로운 시작에 대한 갈망이 요동치기 시작하던 그때 산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다시 만난 산은 기억 속의 모습과는 달랐다. 정서적인 안정감은 배경으로 물러나고, 건강을 위한 체력 단련장의 모습이 전면으로 등장했다. 사방이 막힌 곳이 아니라 탁 트인 자연의 상쾌한 공기 속에서 운동을 하는 것이 더 끌렸고, 나무 향기와 부드러운 능선보다는 다리와 허리 근육과 땀의 양이 나의 주의를 더 끌었다. 나의 목표는 매일 산에서 운동을 하여 심폐 능력을 키우고 허리 통증을 없애는 것, 그게 전부였다.
먼저 가벼운 산책부터 시작했다. 늘 지나다니는 달맞이 길로 향했다. 터널을 이룬 벚꽃나무 그늘 아래 차를 대고 데크로 된 갓길을 걷기 시작했다. 왕복 3킬로미터 정도 오르막이 포함된 거리는 상큼한 사스레피 나무 향과 데크 중간을 뚫고 올라온 나무들로 가득하다. 피부를 감싸는 서늘한 공기는 집에서부터 따라온 고민들을 뒤로 물러나게 한다. 정신이 맑아지고 그제야 나는 걷고 있다는 것을 온전하게 알아차린다. 걸을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 감사하고 기쁘다. 그렇게 2주일 정도 지나고 나면, 땀 흘리지 않고 올라갈 정도로 익숙해진다. 호기심도, 재미도 반으로 줄어든다. '차라리 다른 걸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루틴을 짧은 등산으로 변경해 본다. 달맞이 길 바로 옆에는 송정옛길과 연결된 해발 100미터가 채 되지 않은 야트막한 산이 있는데, 이곳이 다음 목표가 되었다. 초입에 유난히 가파른 계단이 있다. 얼마 올라가지 않아 숨이 차고 정신은 몽롱해지고 다리도 당기게 된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될까, 신발도 미끄러워 위험해 보이는데, 차라리 계단 없는 곳으로 택할까 하는 잡음들이 매 걸음마다 올라온다. 계단 중턱에서 걸음이 저절로 멈춰진다. 내가 너무 서두르고 있나 보다. 이제부터는 한 번에 한 걸음씩 옮겨야지. 한걸음에 숨을 들이마시고 다음 걸음에 숨을 내 쉰다. 달려가던 마음도 이제 걷기 시작한다.
그렇게 10분 정도 더 올라가다 땀이 턱으로 흘러내릴 때 즈음에 전망대에 도착하게 된다. 이곳에서는 송정 해수욕장이 눈에 훤히 들어온다. 옥빛 바다과 길게 굽어진 해안선을 넋 놓고 보다 보면 시원한 산 바람이 밑에서부터 불어온다. 5분 정도 더 걸어서 산꼭대기를 스치듯이 지나서 내려오면 짧은 1시간의 등산이 마무리된다. 후련하고 적당한 운동양이다. 뭔가 해낸듯한 성취감, 이런 것이 삶의 에너지가 된다. 우리는 삶의 에너지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자가 발전소다.
그렇게 여름이 지나면, 다시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 온다. 다리 근육들이 더 큰 것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더 가파른 곳, 더 길고 오래 걸을 수 있는 곳, 더 높은 곳으로의 욕구가 종아리에서부터 올라온다. 드디어 다음으로 넘어갈 때가 온 것이다. 해발 600미터를 조금 넘는 장산, 일상 생활권 안에 있는 제일 높은 산이다. 입구에 큰 호수를 안고 있는 대천공원이 있고, 조금 더 지나면 폭포사를 비롯한 사찰들이 줄지어 서 있다. 산책하듯 가벼운 차림의 사람들, 유치원생부터 노년의 인생 선배들까지 섞여서 걷는 곳, 맨발로 정상까지 오르는 사람들까지, 장산은 동네 뒷산처럼 친근하고 부담 없는 산이다.
낮아 보여도 결코 한 번에 오를 수는 없는 산이다. 특히 최단 코스인 옥녀봉은 가파르기가 만만찮다. 처음부터 시작되는 오르막은 쉽게 그치지 않고, 중봉을 지나서 길게 이어진 나무 계단들은 한 번에 절대 올라갈 수 없다. 땀과 다리 근력을 쏙 빼놓는다. 마지막 관문은 정상 직전에 만나는 경사로인데, 바위 사이로 난 좁은 길은 기어올라가듯 해야만 지날 수 있다. 숨은 거칠어지고 시야는 가까운 발끝에만 머문다. 끝이 안 보이기 때문일까, 조바심이 앞서기 때문일까. 발걸음마다 지구의 무게가 얹힌다.
몸이 힘들수록 마음은 수다스러워진다. ‘내가 왜 이런 고생을 일부러 하는 거지?’ ‘이럴 시간에 돈 벌 궁리라도 해야지.’ 아이들 미래 걱정, 부모님 건강 걱정, 노후 생활 걱정까지…
바위보다 무거운 생각들이 나를 짓누르며 나와 함께 걸어간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춘다. 생각도 관성이 있는지 멈춘 발걸음을 지나쳐 주춤하는 것이 느껴진다.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시원하다. 멈춰 선 다리 아래쪽 땅바닥은 의외로 단단하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 내 숨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산의 리듬에 나를 맞추는 순간, 혼란스러운 소음은 조금씩 조용해진다. 그래 절대 서두르면 안 되지. 느긋함, 주의력, 휴식과 회복은 산행의 필수 덕목이다. 옥녀봉, 안부, 중봉, 너덜겅, 억새밭 이들은 숨을 돌릴 틈이 필요한 숨표이자 자연이 걸음을 멈추라 권하는 이정표들이다. 쉴 때는 제대로 쉬어야 한다. 그래야 무사히, 그리고 온전히 다녀올 수 있다.
정상에 올라서면 반대편의 금정산이 제일 먼저 보이고, 눈 아래로는 온천천과 동래를 지나 부산대학교까지 시선이 향한다. 왼쪽으로 조금 돌아서면 광안리, 다대포, 오륙도를 지나 거제도까지 시선이 향하고, 더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맑은 날에는 대마도가 시야에 들어온다. 50킬로미터도 채 안 되는 거리에 일본이 있다니.
오르는 내내 귀 옆에서 속삭이던 잡음들이 정상에 다다르자 비로소 조용해졌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산바람, 탁 트인 전망 그리고 커피 한잔, 아무 설명도 없이 여유가 스며든다. 머리가 맑아지고, 생각의 층이 걷힌다. 걱정도 후회도 물러난 그 자리를 눈앞에 펼쳐진 진짜 세상이 채워나간다. 경계도 흐려지고 시간도 사라진다. 그렇게 나는 산 위에서 산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문다. 산과 내가 하나가 된 순간이다. 어느덧 시작한 지 세 시간이 훌쩍 넘어간다. 이번에는 억새밭이 있는 반대편 완만한 등산로로 발걸음을 옮긴다.
올라갈 때 발걸음에 고정되었던 시선이 이제는 나무와 산 전체로 향한다. 향긋한 나무 내음과 서늘한 흙냄새, 수평선과 맞닿은 능선들, 활짝 핀 진달래와 벚꽃. 어린 시절 익숙했던 모든 것들이 다시 눈에 들어온다. 편안함, 아늑함 그리고 안정감. 반가움에 눈길을 끄는 것이 많아 걷다가 멈추기를 반복한다. 가볍게 걸음을 내 디딜 때마다 기운이 차 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다음에 언제 올까 궁금해하는 사이에 출발지점에 도착한다. 마음을 가득 채워 내려온 산행이었다.
30도가 웃도는 한여름의 더위도 맨살을 할퀴는 겨울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눈에 띄지 않는 복장으로, 말없이 혼자서, 한결같은 표정으로, 자기만의 속도로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잠깐 딴생각을 하는 사이에 그들은 산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등산에 중독된 사람들이 아니라, 산을 자주 올라서 이제는 산의 일부가 되어가는 사람들이다.
산처럼 살아간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나를 이끄는 울림은 깊은 곳에서 잔잔하게 퍼지고, 나를 흔드는 잡음은 가까운 곳에서 속삭이며 방향을 잃게 만든다. 그 사이에서 잠시 멈춰 서고, 듣고, 바라보고, 느끼는 것. 흔들리는 순간마다, 다시 중심으로 돌아오는 것. 그것이 바로, 마음과 삶을 챙기는 방식이다.
산은 여전히 거기에 있었고 나는 또 하나를 얻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