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히 마주하는 방법
아침 일찍부터 떠날 채비를 한다. 네 시간은 족히 달려야 한다는 부담일까, 출발 전부터 피곤함이 넌지시 달라붙는다. 머리는 무겁고, 어깨는 처지고, 발은 무겁다. 무거워진 몸은 마음까지 무겁게 만든다. 급하게 커피 세 잔을 내려서 준비를 마친다. 아내는 내 옆에, 아이는 그 뒤에 앉는다. 그렇게 셋이 집을 나선다.
삼월의 마지막 날, 부산. 벚꽃이 피어 있다. 아파트를 둘러싼 벚나무들은 분홍빛 수줍음을 하얀 꽃잎에 가득 담는다. 내가 너무 빤히 바라보았나, 부끄러워 고개를 돌리는 듯하다. 흩날리는 머릿결에서 날리는 샴푸향처럼, 벚꽃의 풋풋하고 달콤한 향기가 차창을 넘어온다. 나의 봄은 이미 시작하였으니 너도 이제 시작하렴 하고 말하는 듯하다.
“날씨도 맑은데 벚꽃 향기까지 좋네. 다행이다.” (아이가 앉은 뒷자리를 살피며 넌지시 말한다.)
“꽃이 다 떨어졌으면 좋겠다.…” (아이는 고개를 숙여 눈을 감는다.)
“커피도 있으니 언제든 필요하면 말하렴.”
“좀 잘래요.”
눌러쓴 모자창에 가려 아이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나는 대신 벚꽃을 찾는다. 다른 곳에도 벚꽃이 피었을까, 아니면 노란 개나리는? 하며 정면에 놓인 차선과 풍경이 비치는 차창을 번갈아 보면서 운전한다. 차 안은 아이가 좋아하는 노래로 가득하고, 아내와 나는 아이와의 추억을 꺼내어 서로의 기억을 비교한다. 아내의 기억에는 시간과 장소와 스토리가 자세하게 담겨 있지만 나의 기억은 색깔과 감정과 이미지로 되어있기에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언제나 아내의 기억이 큰 목소리를 내지만, 나와 아내의 기억이 합쳐질 때 추억은 더욱 다채로워진다. 생생히 살아난다.
부산에서 활짝 피었던 벚꽃은 남해 고속도로를 타고 진주를 향하며 조금씩 줄어든다. 전주로 올라가는 길에서는 더욱더 뜸해지고 대신 노란 개나리가 눈에 들어온다. 봄이 완전한 도착하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다. 어차피 봄은 오고 꽃은 핀다. 시작의 증거들을 확인하며 우리가 도착한 곳은 논산, 육군 훈련소다. 오늘은 아이의 입대일. 벌써 지쳐버린 몸을 일으켜 차에서 내린다. 입영 장소로 향해 걸어가는 무리들 속으로 섞여 들어간다. 그리고, 애써 미뤄둔 이별을 시작한다.
발걸음이 무겁다, 슬프다.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다시는 못 찾을 것 같아 두렵다. 공허함과 막막함. 이 모든 것이 섞인 발들이 무리 지어 이동한다.
커다란 연병장에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하다. 애틋하고 안타까운 눈빛들을 연신 카메라에 담느라 바쁘다. 포옹하고 눈물을 흘리고 응원을 한다. 예행연습을 위해 훈련병들을 모으는 안내가 나온다. 작별의 신호다. 마음이 바빠지고 감정이 요동친다. 아이의 얼굴은 굳어있고 아내의 눈은 붉어진다. 어색함과 두려움을 포옹으로 다독인다. 괜찮을 거예요, 걱정 마세요. 아이가 엄마를 위로한다. 참 많이 컸다. 큰 아이들이 사방에서 튀어나와 연병장 중앙으로 향한다. 아이의 옷차림과 가방, 눌러쓴 모자에서 시선을 놓치지 않으려 눈에 힘을 준다. 우리 아이만은 알아봐 주리라, 잃어버리지 않으리라 안간힘을 쓴다. 모자를 벗자 말자 아이가 사라지고 만다. 짧게 깎은 머리들 속으로 사라졌다. 대략적인 위치에 시선을 고정하고 초점을 맞추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마음속에 쿵하는 소리에 순간 사방이 조용해진다. 거기에 있는 것은 알지만 찾을 수는 없다. 저기에 있는 모든 아이들이 나의 아이가 된다. 그리고, 나의 아이는 모두의 아이가 된다. 그동안에 모두 안전하기를, 제발 건강하기를 그리고 늠름한 청년으로 모두들 앞에 스스로 나타나기를.
그렇게 봄과 함께 이별이 왔다. 찬란한 벚꽃 뒤에서 나타난 이별. 그 속에서 삶의 윤곽이 비로소 선명해진다.
아이의 방에서 한참을 앉아 있다. 한 번씩 다녀갈 때만이라도 편히 쉴 수 있게 정리하려 구석구석으로 시선이 향한다. 아이의 손이 지나간 흔적들이 보인다. 서랍장에 가지런히 놓인 물건들, 추억이 담긴 책들, 혼자서 애쓴 고민의 자국들, 아직 듣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조금씩 꼬리를 내밀고 있다. 아이가 보낸 시간의 흔적들 속에서 아이를 발견한다. 그때 나는 어디를 보고 있었을까, 왜 그랬을까. 이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내가 놓친 것이 이리도 많구나. 늘 곁에 있었던 것을 이제야, 비로소 사라진 공간에서 알아본다.
나의 이별은 이제부터 시작인가 보다. 이별 후에는 더욱 멀어져 갈 이별만 있는 줄을 알기에 더욱 슬프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이 봄, 벚꽃 향기만 가득한 잔인한 순간에, 우리는 서로 다른 시작을 하고 있다.
이것은 나의 흐느낌, 나의 슬픔이다. 지금의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것을 그리고 다시 볼 수 없는 것을 알기에, 그 모습이 있던 자리를 무엇이 대신할지 모르기에, 아직 두렵다. 내 마음이 준비하지 않을까 봐 두렵다. 그래서 속으로 흐느낀다. 늘 곁에 있던 아름다움은 이별 앞에서 비로소 알아본다. 그제야 알게 된다. 내 곁에 있던 그 모든 순간들이 얼마나 귀했는지를. 그 순간들은 얼마나 짧은 지를. 소중함은 사라진 후에야 다가온다. 그리고 끝을 알 수 없는 상실의 시간이 온다. 우리는 다시 만날 수는 없는 걸까?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나는 몰랐다.
태어나기 위한 몸부림과 고통을 안타까움과 고마움으로 들었다. 바로 옆에서도 진정 알지 못했다. 아이의 순수함도, 사춘기의 고민도, 대학 진학의 두려움도 나는 커가는 과정이다, 당연하다 말했다. 심지어 입대하는 순간까지도. 나는 제대로 보지 못했다.
아이도, 나도, 그 아름다움도
단단한 껍질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는 존재가 있다.
바깥세상의 위험에 대한 보호막,
위험이 올 때마다 덧대어지는 가림막,
그 속에 그만의 세계가 있다.
남들이 절대 알지 못하는,
세상과 분리된,
안전한 세계,
그곳에서 안식을 갖는다.
그곳이 그의 전부다.
위험은 다른 세계와의 접촉, 만남이다.
나를 둘러싼 가림막,
그것을 통해서 본 세계는 반쯤 가려진 세계,
우리는 결코 진정한 만남을 가질 수 없다.
제대로 보기 위해서, 진정한 만남을 위해서는
가림막을 제거해야 한다.
한 겹 사라진 자리에 눌러앉은 상실과 두려움,
그것이 슬픔의 이유다.
이 빈자리의 결말을 알고 나면
조금은 달라지려나.
며칠이 더 지난 오늘 벚꽃 잎이 벌써 흩날린다. 미련 없이 떨어지는 하얀 꽃잎들이 아름답게 반짝거린다.
나의 껍질들도 깨트려 가루로 날리면 이렇게 반짝거리려나. 그러면 진정한 나의 모습으로 만날 수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