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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 두려움과 친해지기까지

웃음을 잃어버린 15년의 진실

하얀 벽면 한가운데, 흰가운을 입고 하얀 미소를 짓는 사진이 걸려 있다. 그 아래, 벽을 따라 길게 놓인 소파에는 긴장한 얼굴들이 말없이 앉아 있다.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는 건지 피하기를 바라는 건지 모를 표정들이다.


"괜찮아요, 편안하게 아~ 해보세요"

"입을 더 크게 벌리세요. 아프면 왼 손을 들면 됩니다."

그리고 어김없이 찾아오는 그 순간, "악!!!!"


치과 생활 30년 동안 치과가 좋아서 제 발로 가는 사람을 아직 보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가야만 하는 사람만 있을 뿐. 나도 그중의 하나이다.

여기서는 칼, 드릴, 망치, 집게, 주사기가 내 입으로 들어온다. 눈은 버젓이 뜬 채로 아무런 소용이 없어지고, 피부와 뼈로 전해지는 감각만이 나를 지배한다. 또렷이 정신 차린 채로 말이다. 치과는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다. 이곳에서는 사회적 지위도 소용이 없다. 돈도, 사랑도, 맑고 화창한 날씨도 마찬가지다.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자백하고 제 발로 벌 받으러 가는 죄인 꼴이 된다. 게다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스스로를 옭아매어 꼼짝달싹하지 않도록 해야만 한다. 젖 먹던 힘까지 아무리 끌어모아도 결국엔 실패자가 되고 만다.


어린 시절 나는 덧니를 뽑는 것이 무서워 치과방문을 마냥 미룰 수밖에 없었다. 중학생 때 이미 치열은 삐뚤빼뚤해지고, 덧니 아래 이빨은 눌려서 왜소한 모습으로 변했다. 게다가 앞니 어금니 가릴 것 없이 충치도 많아, 말 그대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뼈가 약한 탓이라 핑계를 대보고 싶지만 양치질을 소홀히 한 죄를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이빨은 필사적으로 숨겨야만 할 부끄러움이었고, 남들의 하얗고 가지런한 이빨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빵 하나 훔친 장발장은 19년을 감옥살이를 했지만, 나는 15년을 치과를 피해 도망 다녔다. 항상 남들의 시선을 의식했고, 말 수도 줄어 조용한 아이가 되어갔다. 얼굴에서, 사진 속에서, 마음속에서도 웃음이 사라져 버렸다. 양치질을 제대로 하지 않은 죄로 웃음을 빼앗겨 버렸다. 말하는 기능을 줄이면 듣는 능력이 커지는 것일까. 나는 말을 잘 들어주는 편안한 사람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세상엔 나쁘기만 한 일은 없나 보다. 그렇게 치과와의 불편한 동거는 계속되었다.


서른 즈음, 자전거를 타다 앞니가 살짝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부끄러워 앞니만 얼른 치료하려던 계획은 치과 진료를 받으며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말았다. 어금니와 앞니 뒤편의 충치는 물론 사랑니 발치에다 치열교정까지 더해지고 말았다. 앞니는 갑자기 사소한 것이 되어 버렸고, 2주 남짓의 치료계획이 갑자기 1년으로 늘어나버렸다. 제 때의 한 땀이 아홉 땀을 던다는 영국 속담이 있다 (A stitch in time saves nine). 작은 일을 제때 처리하지 않고 미루다 보면 결국 눈덩이처럼 불어나 한꺼번에 닥치나 보다.


충치 치료는 사랑니 발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충치는 단순한 시술이고 사랑니는 수술의 영역이다. 특히 잇몸 아래 숨어서 옆으로 자라는 경우에는 신경 손상 및 잇몸 절개를 포함하는 큰 수술로 발전하고 만다. 사랑니는 보통 사춘기부터 자라기 시작하는데, 그 나이의 종잡을 수 없는 사랑을 닮아 그런지, 반듯하게 나는 경우가 거의 없어 큰 통증을 동반하는 편이다. 나는 사랑니가 비스듬히 자라면서 어금니를 압박하여 통증이 일어나는 경우였다.


오른쪽을 먼저 뽑기로 했다. 한 시간 정도를 예상하고 수술이 시작되었다. 큰 주삿바늘이 입안으로 들어가고 얼마동안의 시간이 지나자 혀와 입술, 볼까지 감각이 무뎌지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발치 작업이 시작되었다. 차갑고 단단한 집게가 먼저 입안으로 들어왔다. "입을 더 크게 벌리세요, 더 크게". 나는 턱이 빠지면 어쩌나 할 정도로 입을 크게 벌렸다. 사랑니를 단단히 잡은 집게의 느낌, 선생님이 집게를 힘껏 당길 때마다 나의 턱도 위로 딸려 올라간다. 선생님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한다.


"사랑니를 조각을 낸 후에 뽑아야겠습니다."


입 속으로 드릴 같은 기구가 들어간다. "윙윙" 진동 소리와 함께 기구 끝에서 물이 뿜어져 나온다. 혀로 목구멍을 단단히 막고 있는 사이에 간호사는 흡입기를 통해서 "치익 치익"하며 침과 물을 빨아들인다. 강렬한 전구 불빛, 귀를 가득 채운 소음, 턱과 볼에 끊임없이 밀려오는 진동. '제발 빨리 끝나기를, 제발, 제발...'


"이제 곧 마취가 풀릴텐데 어쩌죠, 선생님?"

"마취를 좀 더 합시다."


고문을 당하면 이런 느낌일까? 스스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나에 대한 일이지만 나에게는 의사 결정권이 없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의자에 누워, 두 손을 힘주어 맞잡고, 이 두려움과 고통을 어떻게든 이겨내는 것밖에는.


주삿바늘이 들어오고, 한참이 지나서 집게가 다시 입안으로 들어온다. 이빨 뿌리가 휘어져 있다고 한다. 네 개의 뿌리 중 두 개는 한꺼번에 뽑혔는데, 나머지 두 개를 뽑기 위해서는 다시 남겨진 이빨을 반으로 갈라야 했다. 망치와 집게, 드릴과 흡입기, 굵은 땀방울과 강렬한 전등. 한 시간 반 동안의 처절한 시간이 지나고 사랑니 자리에는 하얀 솜이 물렸다. 그제야 나는 결박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오른쪽 볼이 부어올라 왼쪽보다 두 배는 커 보였다. 주말이 바로 이어져서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출근도 못했을 것이다. 부끄러워서, 너무도 부끄러워서.


2주일이 지나 오른쪽 볼의 부기가 가라앉자 원래 치료 계획에 따라 왼쪽 사랑니 발치가 진행되었다. 왼쪽도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걱정이 먼저 찾아왔다. 또 한 시간 반동안 힘들면 어쩌지, 지난번처럼 부어오르면 난감할 텐데. 지난번 내 모습이 너무나 초라해 이번에는 다르게 해 보려고 주먹을 쥐었다. 긴장하지 말고 차분해지자, 마취를 할 테니 아프지는 않을 거야, 어떻게 진행될 건지 이미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천천히 숨을 내쉬며 두려워할 필요 없다고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주삿바늘, 집게, 망치, 드릴, 흡입기,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선생님, 그리고 나.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비릿한 기계 냄새와 입을 헹구는 물 맛도 여전하고, 기구들은 여전히 차갑고 단단했다. 하지만 내 안에서는 작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두려움을 지나 여유로 향하는 마법 같은 순간이 느껴졌다. 긴장이 내려간 자리엔 호기심이 올라왔다. 입을 드나드는 기구들은 차갑지만 선생님의 손은 따뜻했고, 드릴의 움직임과 진동은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두려움 뒤에 숨은 것은 고통이 아니라 불편함뿐이었다. 진실은 결코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왼쪽 사랑니 발치 작업은 금세 끝났고, 다행히 볼도 부어오르지 않았다. 더 이상 치과 가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충치 치료 중에 자주 졸아서 되려 미안해졌다.

내 얼굴에 웃음이 돌아왔다.


요즘엔 아이를 따라 치과에 간다. 여전히 충치가 문제이고 미흡한 양치질이 원인이다. 아이는 무서워서 자꾸만 날짜를 미루고, 나는 치과 로비에 준비된 책과 커피가 기다려져 자꾸만 아이를 채근한다. 기나긴 치과 생활이 이제 시작되는 것이다. 도망자 신세는 면하도록 도와줄 수 있겠지만, 두려움을 여유로 바꾸는 마법은 스스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치과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삶의 교훈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우리는 모든 두려움을 스스로 마주하고 살아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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