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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 생각, 말하지 않은 이야기들

노래 한 자락에 피어난 삶의 이야기

그럴 때가 있지 않은가? 어느 날 문득, 아무 이유 없이 몸에서 노래가 흘러나오고 절로 어깨가 들썩여지는 순간. 제목도 가사도 필요 없이 그저 콧노래로 흥얼거리는 노래 하나. 흥얼거리다 보면, 지난 기억과 함께 그때 그 친구는 잘 지내는지 궁금해지는 노래가 있다. 나에게는 '동무 생각(이은상 작사, 박태준 작곡)'이 그러하다. 친구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노래, 노래를 흥얼거리면 다시 떠오르는 친구. 콧노래와 친구와 기억은 서로 상승작용을 하여 나의 기분을 붕 띄워준다. - 화창한 오전이라면 더 좋고.


중학교 음악 시간에 배웠던 이 노래는 어느 화창하고 따뜻한 봄날의 향기와 풍경을 품은 채 그리움과 우정을 잇는 나만의 선율이다. 향긋한 커피 한잔을 내리는 내내 코를 간지럽히고 몸을 들썩거리게 만드는 노래는 이렇게 시작한다.


동무 생각 (1절)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적에 나는 흰 나리꽃 향기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어느 12월의 마지막을 함께 보내려 대구에 있는 친구집으로 우리 식구가 모두 출동했다. 그와 나는 참 오랜 친구다. 초등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함께 몰려다녔고, 고등학교 때는 독서실을 함께 다녔다. 직장은 어떤지, 누구를 사귀는지, 살림집은 어디로 구했는지, 아이들은 어떻게 커가는지 모든 것을 서로 궁금해하며 삶을 나누었다. 꾸밈없는 그와의 대화가 편했고 숨김이 없어 마음이 편안했다.


그는 만두를 참 잘 빚었다. 집안 내력으로 명절이면 온 가족이 만두를 빚는다고 하지만, 그 친구의 만두는 격을 달리 한다. 잘 익어 잘게 썬 김치와 신선한 돼지고기, 당면과 각종 양념이 잘 버무려진 만두 속은 집안 내력을 말해준다. 만두피는 더욱더 놀라운 경지다. 손 위에 얹으면 손금이 비칠 정도로 투명하여 서툰 손위에서는 금세 찢어진다. 밖에는 영하의 찬 바람이 불고, 안에서는 따스한 만두 김이 이야기로 피어올라 겨울밤은 더 깊어진다. 안경 낀 부리부리한 눈에 발그레한 그의 얼굴, 활짝 웃을 때면 미소가 얼굴보다 더 크게 보였다. 늘 서로를 지켜보고 또 기대온 인연에 이제는 가족들까지 함께 들어왔다. 그 친구 덕에 대구에는 고향냄새가 났다.


너무나 맛나게 먹은 만두에 자극받아 나도 집에서 만두를 빚은 적이 있었다. 어떻게든 될 거야 하는 초긍정의 마인드로 일단 시작부터 했다. 익은 김치와 돼지고기로 시작해서 만두 속이야 어떻게든 맛을 내 보았지만, 만두 피는 차원이 달랐다. 고르게 얇게 펴는 일은 흉내도 낼 수 없었다. 두꺼운 만두피는 찌면서 더 두꺼워졌고 결국 초대형 만두가 되어 냄비에 가득 찼다. 아이는 만두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지경이 되었고, 그날 저녁 우리는 만두로 넉다운되었다.


한 번은 그의 가족과 함께 대구 근대골목을 둘러보게 되었다. 골목길 양쪽으로 줄지어 선 낡은 건물들은 자기들의 오래된 이야기를 조곤조곤 전해주며 우리를 1920년대 대구로 데려간다. 그 시절 예술가들의 힘든 삶과 고뇌를 들어주다 보면 발걸음 마저 무거워진다. 이마의 땀을 닦으며 잠시 멈춰 선 곳에 갑자기 '청라언덕'이라는 표지판이 나타난다. 설마, 설마 진짜일까? 청라언덕은 단지 노랫말 속 환상인 줄로만 알았다. 꼭 만나봤으면 하던 옛 친구를 마주하듯, 따뜻한 봄 볕 가득한 청라언덕은 단번에 나를 학창 시절로 데려갔다. 어느새 나는 까만색 교복을 입고 옆구리에 가방을 낀 채로 버스에 올라 있다. 살짝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 바로 앞에 앉아 있는 교복 입은 여학생의 하얀 카라 위에 빛나는 햇볕이 내 눈으로 들어온다. 눈을 지그시 찡그려본다. 애써 내색하지 않은 채 가족들을 먼저 보낸 후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푸르름 가득한 미지의 장소에서 혼자만의 시간 여행을 하면서.


동무 생각 (2절)

더운 백사장에 밀려들 오는 저녁 조수 위에 흰 새 뜰 적에 나는 멀리 산천 바라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저녁 조수와 같은 내 맘에 흰 새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떠돌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봄 햇살 가득한 오전이었다. 라디오 클래식 방송을 즐겨 듣던 나는 '입춘'을 맞이하여 청취자들의 신청곡을 받는다는 멘트를 접하고 갑자기 손이 바빠졌다. 나의 봄노래가 간절히 듣고 싶어졌다. 늘 부르던 노래여서 가사는 생각이 났는데 제목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다. 급하게 인터넷 검색을 해 본다.


동무생각(1922). 일제강점기 민족의 아픔을 품은 작곡가 이태준 님이 동료 교사였던 이은상 님에게 노랫말을 부탁해서 완성했다고 한다. '청라(靑蘿)'에는 푸른 쑥과 같은 꿋꿋한 민초들의 마음을 담고, 백합에는 짝사랑했던 여학생을 담은 우리들의 이야기였다. 몇 해 전 '청라언덕'을 걸으면서도, 거친 역사 속에 예술가들의 고뇌를 읽어보면서도, 나는 '동무생각'의 진정한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늘 눈에 보이는 것에 머물렀을 뿐 그 뒤에 가려진 깊은 이야기를 놓치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오랜 시간 교우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우리는 늘 깊은 이야기를 아꼈다. 나의 깊은 고뇌를 그의 앞에 꺼낸 적이 없었고, '난 괜찮아' 하며 밝게 웃는 그의 미소 뒤에 가려져 있을 그의 깊은 이야기를 아직 읽어주지 못했다. 우리는 아직 해야 할 이야기가 많다. 침묵 속에 감춰둔 이야기들, 그것들이 우리를 더욱 단단하게 이어 줄 것이다.


요즘은 노래를 들을 때면 노래를 만든 사람은 누구인지, 어떤 생각과 어떤 에피소드가 담긴 건지 궁금해진다. 사람을 만날 때면 대화 내용 너머에 있을 그 사람의 배경과 맥락이 궁금해진다. 보이는 것 너머에는 우리가 진정으로 알고 싶은 그 사람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들이 놓여 있다. 그런 진짜 이야기들만이 내 안으로 들어와 나의 이야기와 얽힌다. 노래를 듣던 어린 날의 순수함이, 세상을 향해 소리치던 젊음이, 늘 곁에서 지켜봐 주는 친구들과 오늘의 고민과 함께 어우러지며 새로운 이야기가 된다.


살아간다는 것은 하얀 빈 종이를 나만의 이야기로 가득 채워 가는 여정이다. 잊힌 장갑처럼 동무생각처럼 어딘가에 고스란히 숨어있다가 새로운 이야기로 피어나 종이 위에 옮겨지기도 하고, 아직 듣지 못한 친구와 나의 깊은 속내가 다음 장의 주제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삶의 이야기가 모여 한 권의 책이 된다. 다만 바라는 것이 있다면, 전문적인 대학 서적이나 흥미로운 단편 소설이 아니라 소소하지만 나의 전체를 담은 책이면 좋겠다. 미지근한 여름 바람, 아이들이 다투는 소리, 부모님 얼굴의 주름, 밤늦은 걱정과 한 잔의 소주까지, 내 삶의 일상이 있는 그대로 엮인 '이야기'책이면 좋겠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또 누군가의 이야기로 다시 태어나면 더없이 좋겠다.


오늘도 나는 마음의 문을 조용히 열어 둔다. 갓 내린 고소한 커피 향이 창문으로 들어온 상쾌한 바람에 실려 내 안으로 스며든다. 그리고 나는 내 안의 이야기들이 꽃을 피우길 고요히 기다린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아침, 그 속에서도 새로운 이야기가 피어나길 기다리며.


(3절)
서리바람 부는 낙엽동산 속 꽃 진 연당에서 금세 뛸 적에 나는 깊이 물속 굽어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꽃 진 연당과 같은 내 맘에 금세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뛰놀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4절)
소리 없이 오는 눈빛 사이로 밤의 장안에서 가등 빛날 때 나는 높이 성궁 쳐다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밤의 장안과 같은 내 맘에 가등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빛날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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