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을 여행하는 인간들(Homo Viator)에 보내는 메시지
사람은 여행하는 존재다. 여행을 통해 지혜를 축적하며 점차 우주와 닮아가다 결국 우주의 일부가 된다.
내가 지금의 이 우주, 즉 '이쪽 세상'이라는 곳에 도착하여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온 지 이제 50년이 지나고 있는데, 아쉽게도 지금의 이쪽 세상에 도착하기 이전의 기억이 전혀 없다. 희미하고 뿌연 연기 같은 무언가가 있었던 것 같지만, 아무리 떠올려 보려고 해도 떠올려지지 않는다. '맨 인 블랙'의 영화에서 외계인을 목격한 지구인의 기억을 말끔하게 지우듯이, 아마도, 지금의 우주, 이쪽 세상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이전의 존재에 대한 기억은 반드시 지워져야만 하나보다. 맨 처음으로 나의 두 눈으로 확인한 이 세상은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나는 울 수밖에 없었다. 그저 다시 돌아가고만 싶었다. 그때만 해도 직전의 우주, '저쪽 세상'에 대한 기억이 있었던 듯한데, 아쉽게도 이쪽 세상의 말을 할 수 없었던 나는 울음이라는 형태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이쪽 말을 배워가면서 저쪽 세상에 대한 나의 기억은 급속도로 사라져 갔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상대성'의 특징이 강한 미숙한 이곳에 살고 있는 생명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많았을 텐데, 정말 아쉽다. 때로는 일상 속에서 문득문득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밝은 빛과 같은, 그리고 마치 저쪽 세상에서 얻은 지혜 같은 것이 떠오르기 하지만, 논리적이고 사실적인 증거를 따지는 따지는 아이들 앞에서는 나의 확신은 급속도로 작아진다. 그러면, 나는 침묵을 택한다. 아마 이 녀석은 나와는 다른 우주, 다른 세상에서 왔을 것 같다.
이제부터 나는 소위 '시간'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나의 추측을 이야기할 텐데, 이는 지금의 우주, 이쪽 세상에 내가 머물면서 경험을 통해 알아차린 것들을 정리한 것이니, 반드시 유념하고 읽어야 한다. 이쪽 세상의 인간들은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생물 시계(시신경교차상핵)'라는 것을 내장한 채로 태어난다. 물론 나도 어쩔 수 없이 하나를 가지고 있다. 이 녀석의 기능은 24시간의 행동 리듬에 따라서 단백질의 양을 적절히 조절하여 인간의 몸 구석구석에 시간을 알려준다고 하는데, 외부 환경과 완전히 분리되어도 작동에는 이상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인간의 몸은 적절한 시간에 위산이나 분해 효소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한다. 버섯부터 포유류까지 이런 생물 시계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하니 이곳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시간'으로부터 절대 자유로울 수는 없나 보다.
'익숙해진다'라는 참 섬뜩한 표현이 있다. 같은 것을 자주 대하거나 겪다 보면 너무나 잘 안다고 착각하여 결국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받아들이게 되는 기이한 현상이다. '인간'이라는 모양새도 이쪽 세상의 환경도 처음에는 너무나 충격적이었지만, 50년을 지나는 동안 너무나 익숙해진 나머지 이제는 오히려 버리기가 싫어졌다. 익숙해진 지금의 모습과의 이별은 상상조차 하기 싫어진 것이다. 나보다 일찍 이곳에 도착한 존재들도 같은 생각이었던지 결국 ‘시간’이라는 것을 고안해서 이곳에 도착하고 떠나는 때를 관리하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아쉽게도 이제는 자신들이 발명한 그 '시간'에 스스로 속박된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참 불쌍하다.
'시간'이란 것은 무엇일까? 시간이 무엇이길래 인간들은 그것을 그토록 소중히 여기면서도 안쓰러울 정도로 그것에 얽매여 살아가는 것일까? 근원적인 이해는 아직 요원할지 모르지만, 몇몇 탁월한 인간들(물리학자들)이 언급하는 '시간'의 특성만이라도 이해해 보려고 애쓰는 중이다. 이유인즉, 평균적으로 83년 동안 이 세상에 머물 수 있다고들 하는데, 시간을 잘 조절하면 이곳에 좀 더 오래 머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좀 더 재미있게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의미가 있는 '시간'의 몇 가지의 특징들은 이러하다. 시간은 한 방향으로 흘러간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때로는 더 빠르게, 때로는 더 느리게 흐르기도 한다고 과학자들이 밝혀냈다. 인간은 시간의 변화를 오감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다. 다만 오감이란 것이 개인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해 해석한 시간의 흐름은 결국 개인마다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서울역에 걸려있는 시계와 각자의 손목시계의 시간이 다를 수 있듯이, 시간에는 세상의 시간과 개인의 시간이 따로 존재하는 것 같다. 물론 내가 관심이 있어하는 것은 나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개인의 시간'이다. 여러분들도 이미 알아차렸을 수도 있겠지만, 특히 이쪽 세상을 여행 중이라면, 개인의 시간은 때로는 더 빠르게, 그리고 더 느리게 흘러갈 수 있고, 심지어 거꾸로 흐르거나 멈추기도 한다. 참 오묘하다. 오늘은 내가 알아낸 몇 가지를 살펴보고 어떻게 하면 좀 더 재미있게 이곳에 머무를 수 있을지 내가 고민한 내용을 알려 주겠다. 여러분이 고민한 내용도 알려 주길 간절히 바란다.
물리학자들이 말하길, 태초에 한 점이 있었으며, 어떤 이유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 한 점이 폭발을 하여 흩어지며 지금의 우주가 만들어졌다고 추측한다. 그 대폭발 이후 지금의 138억 년 동안에 공동의 시간은 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고, 공간은 식어가면서 점점 커져만 가고 있다고 한다. 그 한 점이 있기 이전이 어떠했는지는 그들도 아직은 알 수가 없지만, 아마도 정말 아무것도 없는 절대적인 '무'의 상태라고 짐작만 하고 있다.
내가 알아차린 폭발 이전의 모습은 이러하다.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호기심, 그 호기심에 붙어있는 욕구들, 그리고, 그 모든 욕구를 향한 상상할 수 없이 큰 에너지는 작디작은 한 점에 담아두기란 절대 불가능하다. 스스로 감당할 수 없어 어떡할지 모르는 무한에 가까운 에너지들은 그 한 점 안에서 흔들리고 서로 부딪히고, 어떤 것들은 사라지고 또 다른 어떤 것들은 다시 뭉쳐지기를 반복한다. 커져만 가는 욕구와 에너지들로 그 한 점은 커지고 커지다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게 된 순간 폭발하였고, 그리고 개인의 시간도 빠르게 흘러왔다.
정말 빨리 흘러갔던 때를 돌이켜보면, 취업하고 처음 2년 동안의 시간과 두 번째 직장에서 참여했던 대형 프로젝트 기간이었다. 얼떨결에 잘못 내린 기차역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있는 것처럼, 이전의 익숙함 들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낯섦들로만 가득했던 기간. '나'라는 존재도 망각한 채 그저 낯선 환경에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해 모든 것들에 집중하고 또 집중했다. 너무나 빨리 흘러간 탓에, 모든 곳으로 흩어진 나의 모습들로 인해 그 순간들이 어떠했는지 이제는 기억조차 잘 나지 않는다.
나의 결론 1: 이미 폭발했다면 되돌릴 수는 없어 보인다. 다만, 흩어지는 그 에너지의 가짓수만큼이나 나의 시간도 빨리 흘러가는 것 같다. 에너지를 쏟아야 할 대상을 한두 가지 줄이면, 그만큼 나의 시간도 좀 더 잘 보이고 관리할 수 있는 것 같다. 항상 그러했듯이, 결국, 선택과 집중이 중요하다. 어차피 이쪽 세상을 떠나 내가 가야 할 저쪽 세상은 남들과 다른 곳일 게 분명하기에, 이제는 남들의 훈수에 기대지 말고, 내 마음이 가는 곳으로 가자. 그곳이 내 세상이다.
초기 인간들의 농사법은 자연의 변화에 크게 영향을 받았던 탓에, 언제 싹이 터서 자라고, 비와 홍수와 눈이 오는 시기를 아는 것이 중요했다. 해마다 반복되는 이러한 사건들에 좀 더 잘 대처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낮과 밤, 그리고 하늘을 가로지르는 태양과 달의 움직임에 의존하여 시기를 정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일 년, 한 달, 하루, 한 시간, 일 분 그리고 일 초. 우리는 잘게 나누어진 시간들에 기대어 일상을 반복하고 있다.
나에게 반복되는 매일의 활동들은 아이들의 식사와 간식, 설거지, 집사람의 출근, 산책과 명상, 커피 내리기, 책 읽기, 글쓰기, 등산하기, 기타 연주, 그리고 가끔씩 메일 열어 보기 정도이다. 반복된 행위들 속에서 가끔은 특별한 순간도 생겨나는데, 매일 아침 커피 내릴 때처럼 나의 모든 세포가 살아 있음을 경험하는 때가 특히 그러하다. 200g 포장된 원두를 여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풍겨오는 고소한 커피 향.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10g 또는 15g의 원두를 분쇄기에 넣는다. 손으로 분쇄기를 돌린다. 사각사각 경쾌하게 돌아가는 소리는 양쪽 귀를 타고 돌며 기대감을 만들어 낸다. 적당한 크기로 갈려진 원두는 좀 더 진한 향기를 풍긴다. 커피를 내릴 주전자에 드리퍼를 올리고 필터를 잘 접어서 넣는다. 한 동작 한 동작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그러고는 잘 갈려진 커피 가루를 필터 속에 편평하게 채워 넣는다. 적당히 데워진 뜨거운 물이 담긴 S자 모양의 가는 목이 달린 물 주전자. 손에 긴장감이 감돈다. 물을 조금 붓고 30초 동안 커피를 불린다. 커피는 보글보글 거리며 빵처럼 부풀어 오른 후, 하얀 김과 함께 커피 향이 사방에 퍼진다. 그리고는 아주 적당하게 그리고 일정하게 물을 조금씩 붓는다. 500원짜리 동전 크기만 한 원을 그리며 물을 붓는다. 너무 빨리 부어도 곤란하고 너무 늦어도 곤란하다. 물이 너무 뜨거우면 쓴맛이 강해지고, 3분의 시간이 넘어가면 맛이 더 써진다. 나의 두 눈과 귀, 코, 두 손, 그리고 직감까지 동원하여 커피 한 잔을 내린다. 이 시간 동안에 나는 커피가 되고 시간은 멈춘다.
나의 결론 2: 이곳에서는 반복되는 활동들이 모여 삶이 되어가는 것 같다. 그렇다면 싫고 지루한 것보다는 좀 더 재미있는 것을 반복하여 집중하면 나의 모습과 삶도 좀 더 재미있어지지 않을까. 다만, 지구의 움직임이 서서히 느려지고 있다고 한다. 언젠가 먼 미래에는 하루가 무지 길어진 때가 올 텐데, 그러면 그때 이곳에 도착할 존재들은 어떻게 일상을 반복하여 스스로를 만들어갈지 참 궁금해진다.
상대적으로 빠르게 운동하는 사람에게는 시간의 흐름이 느려진다고 한다. 그리고, 블랙홀처럼 중력이 강한 곳에서는 시간이 멈춘다고 하며, 심지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미시의 세계에서는 과거로도 갈 수 있다고도 추측한다.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면, 먼지가 가득한 지구를 떠나 우주여행을 하고 돌아온 젊은 아버지와 백발이 된 딸의 재회 장면이 나온다. 빛의 속도와 가깝게 움직이는 우주선을 타고 블랙홀을 지나는 동안 우주선 안에서 아빠의 시간은 거의 흐르지 않은 것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빛과 연관되어 있다.
맑은 날 밖에 나가면 태양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 눈에 도착하는 이 태양빛은 사실 8분 19초 전에 태양을 출발하여 1억 5천만 킬로미터를 여행한 후에 우리에게 도착한 것이다. 태양계와 가장 가깝다고 알려진 안드로메다 은하는 빛의 속도로 220만 년이나 걸린다고 한다. 결국 우리가 보고 있는 현실 세계는 때로는 8분 19초 전의 과거와 때로는 220만 년 전의 과거를 같이 보고 있는, 어쩌면 과거가 뒤섞인 현재의 공간에서 살고 있다는 말이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직 지구에 도착하지 않은 빛 들, 그래서 아직 우리가 보지 못한 것들을 '미래'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과거와 미래가 이어진 듯한 괴상한 구조이다.
매년 한 두 차례 만나는 초등학교 동창 모임이 있다. 한 학년에 30여 명이 전부인 시골 학교이다 보니, 6년 내내 같은 반 친구로 시간이 흘러간다. 서로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고 있고, 친구의 누나가 우리 형의 동창이고, 때로는 아재나 고모뻘 친척이 한두 살 아래인 경우도 많은 시골 학교이다. 졸업한 지 벌써 40년도 더 지났지만, 탁자 위의 맥주 서너 잔에 우리는 그 시절 그때로 돌아간다. 서로를 놀리며 싸운 이야기며, 소풍을 가서 보물찾기 한 이야기, 장기 자랑으로 노래 부른 순간들, 그때는 누가 더 잘 달렸는지, 누가 더 예뻤는지 등의 이야기로 가득한 1박 2일의 동창회. 12살 그때로 돌아가 아련한 추억으로 마음을 촉촉하게 적신 후, 나는 감성에너지를 완전히 충전하여 현실로 돌아온다. 공상 과학 영화의 타임머신도 타임스톤도 없이 우리는 스스로 너무나 쉽게 과거로 여행할 수 있다. 인간이란 참 대단한 존재이다.
좀 더 이해하기 힘든, 그래서도 더 오묘한 것은 '현재' 또는 '지금'이라고 하는 것이다. 지나간 순간들인 과거가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고, 아직 오지 않는 미래는 기대와 걱정 속에서만 존재하는 반면, 우리가 살고 있다고 믿는 현재는 깨닫는 순간 이미 과거가 된다는 것이다. 결국 상상으로만 그 길이와 시점을 가늠할 수 있는 모양인데, 굳이 비교하자면 과거나 미래보다는 훨씬 짧아 보인다. 명상 수련 중에 '현재에 존재하기'라는 것이 있는데, 그러면 나는 이 순간에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오감들을 자세히 관찰한다. 부처님의 노하우를 전수받은 것이라고 하는데, 어쩌면 지금 또는 현재라는 것은 생각 저편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내 몸 밖에 또는 내 몸 안에 묻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생각보다 더 가까이 있는 듯하지만 난 여전히 놓치기만 한다.
사람마다 시간은 다르게 흘러가는 것은 주변에서 아주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나의 관찰로는 움직임의 속도보다는 생각의 속도에 더 좌우되는 것 같다. 병원에서 퇴원하신 어머니와 아버지를 모시고 시골로 가던 길이었다. 차로 약 2시간이 넘는 거리였고, 어느덧 점심때가 되어 점심을 사 먹고 가기로 했다. 기력을 보충할 수 있는 갈비탕, 냉면 그리고 육전을 먹을 수 있는 식당이다. 부모님은 입버릇처럼 ‘아무거나 먹지 뭐’라며 어색한 듯이 말씀하신다. 그러면, 두 분께는 갈비탕을 권하고 나는 육전이 올려진 비빔냉면을 시킨다. 어차피 두 분 모두 소식을 하셔서 음식을 다 드시기 힘들기에, 그리고 다른 음식도 맛 보여 드리고 싶은 마음에 나는 늘 부모님과는 다른 메뉴를 시키곤 한다. 음식의 맛을 즐기기보다는 항상 빨리 배를 채우고 일을 해야만 하는 삶을 살아오신 두 분이시기에 음식을 드시는 속도는 참 빠른 편이다. 두 분에 비해 나는 음식을 맛보면서 조금은 더 천천히 먹는 편이어서 상대적으로 속도가 느리다. 어머님은 연신 땀방울을 움치며 식사를 마치시고는 나를, 나의 그릇을 바라보시며 언제 비우려나 궁금해하신다. 나는 이런저런 이야기로 분위기를 달래며 먹고 있지만, 어머니의 안색은 점차 더 굳어진다. 한 시간씩 식사를 하기도 하는 세상인데 좀 더 천천히 쉬다가 나가도 된다고 슬쩍 운을 떼면, 어머니는 역정 내시듯 말씀하신다. ‘음식을 다 먹었으면 얼른 자리를 비켜줘야지’ 하신다.
식당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어머니의 시간은 시한폭탄 마냥 한시도 쉬지 않고 짹깍짹깍 어머니의 귓전에서 보채며 흐른 반면, 나의 시간은 참으로 오랜만의 부모님과의 즐거운 식사 시간이 그저 여유롭기를 바라며 느리게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나의 결론 3: 어차피 상대적으로 흐르는 시간인 만큼, 내 시간은 좀 더 느리게 흐르도록 하자. 그래서 좀 더 오래 이 세상에 머무를 수 있도록 하자. 예를 들면, 쓸데없는 생각으로 과거나 미래로의 여행을 하지 말자. 피곤하다. 가능하면 현재에 머무를 수 있도록 주위를 돌아보고, 이 순간 내가 어떠한지 살펴보자. 그리고, 가끔은 내가 좋아하는 것에 절대적으로 집중을 하여 시간을 멈추기도 해 보자.
시간이 등장을 하고 그 중요성이 더해지면서, 하늘에 있던 시간은 권력자의 힘이었던 때가 있었다. 기술의 발전과 함께 시간은 하늘에서 내려와 개인의 집으로, 손목으로 이동을 하였다. 어쩌면 오늘날의 인간은 까마득한 옛날의 황제와 맞먹는 힘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동차, 카메라, 오디오와 함께 시계도 남자들의 로망에 한 자리를 차지한다. 하얀 셔츠 사이로 빼꼼히 얼굴을 내밀어 한낮의 햇빛을 반사하고, 호프집의 노란 천장등 아래 친구의 얼굴을 비춰주는 은빛 도금을 한 시계. 그 특유의 과묵한 무게로 인해 물건을 들 때면 반드시 왼손으로 하늘을 한 번은 찔러야 했고, 그렇게 왼팔의 일부가 되었던 시계.
나의 첫 시계는 고등학교 입학 선물로 아버지가 주신 작은 시계였다. 가죽 줄에 둥글고 얇았던 모양으로 기억이 난다. 아들이 공부를 잘하길 바라는 마음이 묻어난 선물은 나의 왼 손목에 딱 붙어 같이 공부를 했다. 내가 한눈을 팔 때도 시계는 깨어 있었으니 어쩌면 나보다 더 많은 공부를 했을는지도 모르겠다. 처음으로 내돈내산인 시계는 해외 출장 중에 우연히 고른 시계였다. 핀란드의 높은 하늘을 닮은 파란 바탕에 다소 무게감이 있는 시계였다. 어느 정도의 경제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이 나는 왼팔에 뿌듯함을 감고 다녔다. 그 후 휴대폰의 갑작스러운 진화로 시계가 갖는 상징의 경계를 희미해지고, 나의 시간은 왼팔에서 나와 오른팔에 들려있는 휴대폰 안으로 들어갔다.
결혼을 하고 10년이 지나는 시점에 나는 문득 시계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회사의 업무와 인간관계의 번잡함의 주 통로였던 휴대폰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욕구의 발현이었다. 나는 시계를 사기로 마음먹었다. 내 마음이 원하는 시계, 아니 시간은 분초를 다투는 정확성이 아니라, 하루를 그리고 그 흐름을 관조할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이런 나의 의지를 고스란히 담을 디자인은 초침도 분침도 없이 시침만으로 하루에 한 바퀴를 돌아가는 시계였다. 느리게 살아가기를 원했던 나의 마음이 반영된 최적의 모습이었다. 국내에서는 찾을 수가 없고, 대신 이탈리아나 스페인에서 내가 원하는 디자인이 있었지만 결국 구매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또 한참의 시간이 흘러 건강을 고민하는 지금, 나의 왼쪽 손목에는 검지손가락 크기의 작은 똑똑한 시계(스마트와치)가 대신하여 자리 잡고 있다. 세월에 따라 시계와 시간의 모양도 변하나 보다.
이 순간 나는 유리창 가득 은빛 파도가 살아 넘실거리는 송정 해수욕장의 별다방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에 이 글을 쓰고 있다. 천금 같은 여유가 얼마 남지 않음에, 그리고, 회사 후의 나의 발길을 아직 정하지 않음에 내 마음은 요동을 친다. 시간이 제발 멈췄으면, 제발 이 순간 파도를 타고 넘실거리는 행복이 영원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야속하게도 휴대폰의 시간은 자꾸 12시를 향해 달려간다.
나의 결론 4: 중요한 것은 삶의 시기에 따라 계속 바뀐다. 그러니, 지금 나에게 제일 중요한 게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고 그것을 잘 간수할 수 있는 나만의 시계를 찾자. 만약, 이 세상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신경 쓰인다면 지금이 몇 시 몇 분인지 궁금해하지 말고, 오히려 얼마의 시간이 남아 있는지를 알려주는 그런 시계를 가지고 살아가자. 참고로 내가 원하는 나만의 시계는 나의 하루, 나의 일 년, 그리고 이 세상에서 머무는 동안의 나의 인생에서의 좌표를 알려주는 그런 시계이다. 그리고, 지나가는 길가에 핀 코스모스의 꽃잎도 하나하나 세어볼 수 있도록, 가끔은 멈추기도 하고 또 가능하면 천천히 여유 있게 가면 더없이 좋겠다. 어쩌면 이제까지 살아온 시간보다도 더 적게 남았을 시간들. 이젠 세상의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나의 삶이 오롯이 흘러가는 개인의 시간을 관찰하고 또 조절해 가며 살아가고 싶다.
이상, 이 세상에서 내가 관찰하고 또 느낀 시간에 대한 몇 가지를 여러분들께 말씀드렸습니다. 혹시, 나처럼 또 다른 세상으로의 여행 중이신 분들이 있다면, 여러분들이 알아차린 새로운 내용들도 저에게 알려 주세요. 원래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나는 여행자들끼리는 알고 있는 내용을 서로 나누기도 하고, 때로는 같이 여행을 다니기도 하지요. 그게 바로 여행의 묘미이니까요.
오늘도 안전한 여행 되시길.
p.s. '시간은 무엇인가(뉴턴 하이라이트)'를 읽고 난 후, 물리적인 사실들이 어떻게 나의 개인에게 연관이 되는지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우주를 여행하는 우주인의 입장에 나의 삶을 바라본다면, 이 세상의 끝이 저 세상이 아니라 단지 스쳐 지나가는 또 다른 여행지일 뿐이리라. 그래서 여행하듯 설레는 마음을 간직하고, 호기심 가득한 두 눈으로 세상을 보며 또 재미있게 오늘 하루를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