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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렌디피티 헌터와의 오월의 산책

일상에서 찾은 작은 철학, 아내와 함께한 뜻밖의 하루

5월만큼이나 바쁜 달이 또 있을까. 어린이날을 시작하여, 부처님 오신 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과 부부의 날까지 주인공을 바꿔가며 챙기다 보면 한 달이 훌쩍 지나간다. 어릴 때는 오월이 가장 기다려지는 달이었다. 받기만 하면 됐으니까. 하지만, 세 아이를 둔 중년이 된 지금, 받는 것의 몇 곱절을 내어 주어야 하는 부담스러운 달이 되어 버렸다. 쌀독에 쌀이 계속 줄면 불안해지듯, 마음도 내어 주기만 하면 허무해지나 보다.


"5월 21일이 무슨 날인지 알아요?"

"글쎄, 음..."

"둘이 하나가 되는 부부의 날이래요. 올해는 우리도 챙겨요."


막내가 중학생이 되어 어린이날은 졸업했다며 안도하는 것도 잠시일 뿐, 부부의 날이 되려 커져가고 있었다. 양가 부모님과 아이들을 챙기며 고갈되던 아내의 마음도 이제는 채워야 될 때가 온 것이다. 에너지의 총량이 항상 보존되듯이 부담의 총량도 바뀌지 않나 보다. 아직 나에게는.


아내는 붓꽃(Iris) 같은 사람이다. 초록색 배경을 뒤로한 채 저 혼자만을 드러내는 빨간 장미의 강렬함과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초록 속으로 섞여 들어가 자연스러운 전체의 일부가 되는 사람이다. 어디에 정착하든 그곳의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전체의 뉘앙스를 바꾸는 전체적인 사람이다. 부부의 날을 어떻게 해야 아내가 좋아할까?


복잡한 교통 혼잡을 피해 우리는 주로 달맞이길을 따라 운전해서 집으로 가곤 했다. 달맞이길 시작 지점에는 유달리 우리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가게가 하나가 있다. 초록색 덩굴들이 가게를 감싸고 노란색 실내등은 저녁이면 피어나는 노란색 붓꽃 같은 가게다. 'SERENDIPITY'라는 영어로 된 간판을 내건 맥주집에서는 항상 따뜻한 피아노 연주곡이 흘러나왔다. 우연한 발견, 뜻밖의 행운이라는 가게 이름은 보는 이에게 왠지 모를 기대감을 갖게 만든다.


"부부의 날에 '도모헌'이라는 곳에 가 볼래요?"

"무엇을 도모한다는 거지?" 라며 너스레를 떠는 나에게 아내는 다시,

"우연히 알게 된 곳인데, 부산 시장 관사로 쓰던 곳이래요. 이번 시장님이 들어서면서 시민들 품으로 돌려줬다는데, 전시회도 하고 커피도 맛있다고 해서 한 번 꼭 가보고 싶었어요." 한다.


바닷길을 산책할까 온천에서 피로를 풀어볼까 하며 혼자 고민하던 것을 아내는 이 한마디로 정리해 주었다. 더없이 고맙다. 행복이 어디 멀리 있을까, 원하는 것을 알고 또 선택할 줄 아는 아내와 함께하는 이 순간이 행복이다. 놓치지 않고 붙잡을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화창한 오전 11시. 브런치를 먹어 아직 속은 든든하고, 그곳에서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할 것 같은 기대감에 카메라를 메고 집을 나선다. 지하철을 내려서 도모헌으로 가는 길은 생각 외로 간단하다. 가파른 경사로를 따라 언덕을 올라가면 뒤로는 광안리가 서서히 펼쳐진다. 걸음마다 이마에서는 땀이 흘러내린다. 한 여름에는 힘들겠다고 불평하려는 순간 기다란 담장을 따라 커다란 대문이 나온다. 드디어 도착이구나 하는 안도도 잠시일 뿐, 이제부터 산책길이 시작된단다.


시장님이 결코 이곳을 걸어서 올라왔을 리 없다. 검은색 관용차를 타고, 반쯤 내린 차창밖 멀리 광안리가 보이고, 오월의 따스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을 차 안으로 들어왔으리라. 길 양쪽으로 벚나무, 매화나무, 소나무들이 사열하듯 서있고, 그 뒤로는 이름도 알 수 없는 다양한 나무들이 싱그러움을 뽐내는 이 길 위에서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 올라가고 있다. 더 일찍 집을 나설걸 하는 아쉬움은 도모헌 정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해소된다.


멀리 보이는 광안대교는 10월의 불꽃놀이를 떠올리기에 충분하고, 족히 백 년은 되어 보이는 느티나무와 작은 연못, 갖가지 꽃들은 이곳에서 한 개인의 삶의 흔적이 있을 거라는 상상을 쉽게 물리친다. 군사정권 때는 대통령의 지방숙소로 사용되었다고 하니 나 같은 일반인은 들어올 엄두조차 낼 수도 없던 곳으로, '재벌집 막내아들' 촬영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에도 자연스럽게 고개가 끄덕여진다. 괜한 자격지심에 송중기가 앉았을 법한 하얀 의자에 한참을 앉아 본다.


커피가 맛있기로 소문난 카페여서인지 앉을자리는 하나도 없다. 전시회 관람을 할 겸 건물 이곳저곳을 둘러보기로 한다. '도모하다'에서 '도모헌'의 이름을 따오면서 건물 전체를 갤러리와 회의 및 교육을 위한 공간을 채웠다고 한다. 경치를 즐길 수 있게 탁 트인 통창과 넓고 편안한 의자들을 보며 언젠가 한적한 곳에 세울 나의 집을 겹쳐 본다. 한쪽 벽을 시집으로 가득 채운 작은 방에서는 에드가 엘런 포의 갈까마귀와 애너벨 리의 이야기에 빠진 채로 시원한 바람을 맞았다. 나의 집에는 이런 서재도 하나 있으면 좋겠다. 내가 산 책들과 내가 써 내려갈 책들을 꽂아둘 작은 책방 같은 서재면 더 좋겠다. 게다가 웬만한 회사의 중역회의실을 옮겨 놓은 듯한 넓은 회의실은 말 그대로 압권이다. 회의실을 내 집과 겹치기엔 너무할 듯하여 얼른 포기한다.


오후 2시가 지나 1층 카페로 향한다. 자리 뺏기 눈치 싸움은 이 시간에도 한창이다. 주문을 하는 동안에도 우리의 시선은 어디서 일어설지 모르는 손님들에게로 향한다. 여유를 즐기러 온 사람들이 쉽게 일어서 떠날리는 만무하다. 나무 그늘 어디쯤에 앉아 커피를 마시자며 나서려는 순간 빈 테이블이 떡하니 하나 생긴다. 다행이다. 주문하는 줄은 여전히 긴데도 우리는 요행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옆 테이블의 대화가 우리에게로 넘어올수록 우리는 더 작게 속삭인다. 마치 비밀 대화라도 하는 듯이 바로 옆에 나란히 앉아서.


뜻밖의 행운 같은 여행을 마무리하려 건물을 크게 돌아 산책을 하려고 나선다. 건물 뒤로 갈수록 더욱 높아지는 담장 끝에는 감시탑도 보인다. 괜한 이야기가 새어나갈까 머리 위 까마귀 소리 보다도 더 작게 대화를 하며 걸어간다. 문득, 길 옆 배수로를 따라 검은 줄 하나가 길게 놓인 것이 눈에 들어온다. 아질아질 거리는 검은 줄은 수많은 개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리가 걸어온 반대방향으로 끝없이 늘어선 개미 행렬은 피켓 하나 구호 하나도 없다. 이 단순한 이동 하나만으로 뭔가를 말하려 한다. 과연 무엇을 도모하려는 것일까?


호기심이 발동한다. 이들의 시작과 끝에는 커다랗고 빛나는 대장 개미가 있지 않을까? 가던 길을 돌려 나도 행렬에 동참한다. 아마도 내가 처음 발견한 곳은 개미 행렬의 중간쯤이었던 듯하다. 세줄 네 줄로 나란히 걸어가는 개미들의 입에는 아무것도 물려있지 않고, 반대로 돌아오는 녀석이 하나도 없는 것으로 보아 분명 누군가의 박해를 받아 삶의 터전을 옮기려는 것이리라. 허리를 굽힌 채 뜀박질을 하며 행렬의 시작을 찾아간다. 눈길 위에 난 발자국을 포개어 딛듯이 뒤에서 따라오는 개미들은 앞에 선 개미의 꽁무니만을 보고 따라가고 있다. 행렬의 처음으로 갈수록 줄은 더 작아지다가 두 줄로 바뀌더니 맨 앞에는 줄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몇 마리의 개미가 이리저리 걸어가고 있다. 중간의 녀석들과 별반 다를 것도 없는 크기며 색깔을 하고 있다. 적잖이 실망하여 부아가 치민다. 맨 앞에선 이 녀석들은 과연 무엇을 도모하고 있는 걸까?


10미터나 되는 거대한 개미 행렬은 과연 자기들이 따르는 선두 그룹이 자기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심지어 자기들 보다 더 볼품이 없을 수도 있고, 기대와는 다른 곳에 도착하더라도 불평을 쏟아낼 상대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따라가는 것일까? 모차르트의 마술피리가 울리는 것도 아닌데 이 녀석들은 배수로를 절대 벗어나지 않고 오직 한 방향으로만 가고 있다. 행렬의 맨 마지막도 맨 앞의 녀석들과 매한가지 모습을 하고 있다. 의도를 알 수 없는 시작과 끝을 제외하면, 중간에 놓인 힘찬 이동만이 의미를 가진다. 이 거대하고 또렷한 검은 줄은 끊임없는 움직임 하나만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인간의 탄생과 소멸은 너무도 미약할 것이기에 지금 벌어지는 삶의 중간을 잘 살아내라는 말일까? 너는 아직도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으니 매사에 겸손하라는 의미일까? 자연이 보여주는 경이로움에는 놀라는 것밖에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걸어서 언덕을 내려와 다시 세상으로 들어온다. 올라갈 때 땀으로 가득했던 이마에 서늘하고 상쾌한 바람이 느껴진다. 다음에 또 와야 지하는 다짐이 허공을 휘젓는 작대기 같다는 것을 알면서도 휴대폰을 꺼내 사진으로 기록한다. 잊지 않으려는 다짐을 나는 그런 식으로 한다.


도모헌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니 허기가 올라온다. 분위기에 취해 잊고 있었던 위장의 본능이 다시 일어난다. 아내도 나와 같은가 보다.


"동양 사라다와 할매손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잔인해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듣고서 뒤를 돌아보니 같은 이름의 가게들이 눈에 들어온다. 사라다는 빵이 들어갈 테니 다이어트가 걱정이고 할매손 국밥은 너무 더울 것 같아 망설이고 있는 사이에 아내가 인터넷 검색을 한다. 그러곤 아주 해맑은 목소리로,


"동양사라다는 빵 순례지래요. 멀리서도 찾아오는 유명한 곳이래요. 가격도 적당하다고 하니 가봅시다."


은근한 아내의 말은 따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힘을 가진다. 아내를 앞세우고 나는 뒤를 따른다. 작은 가게에 손글씨로 예쁘게 적은 메뉴가 친근하다. 세 개를 사면 가격적인 이익이 있어, 각자 먹을 한 개 씩을 고른 후에 나머지 하나는 아이에게 가져다 주기로 한다. 계산하고 나오다 말고,


"우리 여기서 먹고 갈까요?"


내가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는가.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군복무시절에 몸에 새겨진 것 아닌가. 단지 상관이 바뀌었을 뿐. 70년대 분위기의 통창으로는 노란 어린이집 버스가 지나가고, 사라다빵 위에 올려진 빨간 케첩이 향기롭게 입맛을 당긴다. 학창 시절 먹던 그 맛 그대로다. 이곳에 들어오길 참 잘했다. 아내의 말을 듣기 정말 잘했다.


집에서 아내의 별명은 셜록 홈스다. 어디에 뒀는지 몰라 진땀을 빼며 물건을 찾고 있노라면, 아내는 어느새 슬며시 나타나 귀신같이 찾아낸다. 그런 실력이 어디 가겠는가. 밖에서도 뜻밖의 맛집을 이리도 잘 찾아내니. 아내의 별명을 이제는 세렌디피티 헌터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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