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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근두근콩 Feb 28. 2023

아픈 마음에 문구처방 #02 미농지

흐릿하게 보며 아득한 마음에 다가서게

초등학교 6학년때 였던가요. 아마도 지리와 관련된 수업이었을 겁니다. 사회과부도를 펼쳐두고 한반도를 뚫어져라 쳐다봤지요. 어린 눈에도 한반도는 참 예뻤습니다. 선생님께서 어느 날 미농지를 나눠주셨습니다. 뽀얀 속살을 매끄럽게 드러내고 있는 불투명한 종이, 미농지. 종이 너머의 물질을 희미하게 비춰주는 미농지는 그림 위에 두면 굵은 선은 또렷하게 드러내주지만, 얇은 선은 무시할 수 있게 해주었죠. 우리나라 지도를 그리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꼬불꼬불 이어지다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만과 크고 작은 섬들을 담아내는 게 마음같이 되질 않았어요. 북서쪽을 신경쓰고 있으면 남쪽이 찌그러지고, 울릉도는 엉뚱한 곳에 가 있곤 했지요. 삐뚤빼뚤 균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제각각의 우스꽝스런 지도들. 그때 선생님께서 들어보이셨던, 선물같은 미농지.


미농지를 받아든 우리들은 신나게 지도를 그려나갔습니다. 망설일 필요도 없었어요. 간혹 희미한 선들 앞에선 연필이 멈춰섰지만, 그것도 잠시. 미농지 위에서 우리 모두는 한치의 오차도 없는 정확한 지도제작자가 되어 있었지요. 그 후로도 미농지의 활약은 대단했습니다. 친구들은 만화책의 멋진 캐릭터들을 마치 제가 그린 것 마냥 미농지에 그려 넣었지요.   


미농지는 보고싶지 않은 것은 살짝 가려주는 재주가 있어요. 보고 싶은 선들은 어떻게든 따라갈 수 있게 해주지만, 무시하고 싶고 건너뛰고 싶은 것들은 적당히 가려주지요. 그 흐릿함이 가장 큰 무기인 미농지.


불안한 마음을 더이상 견디지 못해 상담실을 찾아온 그녀는 몸과 정신을 안개처럼 감싸고 있는 불안의 정체를 모릅니다. 알고 싶고 치료하고 싶지만 다른 한켠의 마음속에서는 머뭇거려요. 더 알면, 그 심연의 마음을 만나게 되면, 감당할 수 없는 무언가가 속수무책으로 떠올라 지금의 자신을 더 깊은 심연으로 끌고 들어갈까 두렵기만 합니다. 보지 않으려고 애써 꾹꾹 눌러 놓았던 날카로운 기억들이 되살아나 그녀의 보드라움에 다시금 뜨겁고 쓰라린 상처를 남겨 놓을까봐 그녀는 아픈 마음을 아리송하게 가려놓습니다.


그녀의 마음 앞에 미농지를 내밀어봅니다. 기록에서 탈락시켜놓은 부정한 기억을 모두 다 또렷하게 볼 필요가 없다고. 선명하게 바라볼 용기가 차올랐을 때, 그때 미농지를 거둬도 된다고 말입니다. 미농지 위에 일단 보이는 것 만큼만 마음을 그려보자고 합니다. 깊은 마음속에 있는 것과 조금 다른 모양새여도 괜찮습니다. 용기가 불쑥 미농지를 옆으로 밀어놓게 해줄 때, 그때 잘못 그려진 부분을 다시 그리면 됩니다. 그 전까지 미농지는 그녀의 오차를 받아내줄 것이므로. 상처를 가려놓는 것보다, 차라리 미농지 위에 두고 실루엣이라도 들여다 보면 어떻겠냐고 말합니다. 그녀가 미농지를 집어 손바닥 위에 올려 놓네요. 손바닥의 깊게 파인 손금이 미농지 위에 보일막 말락 흐릿하게 드러납니다. 그녀가 그려나갈 최초의 마음 지도는 새벽녘 강위에 앉은 물안개처럼 두루뭉술 하겠지요. 흐릿함을 무기삼아 아득한 마음을 조금씩 그려나갈 겁니다. 그걸로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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