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글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곽재구, ≪사평역에서≫, 전문
국어 시험시간 학생들에게 시험지를 나누어 주고 교탁에 서서 문제를 읽어 보다가 곽재구의 시가 눈에 들어왔다. '야 이 시 정말로 좋구나!'하고는 시험지를 걷어 철을 하고 담당과에 내면서 “시험문제에 출제된 시 좋던데요!” 하니까 출제 교사가 “어떤 시가요?” 하여 “사평역에서” 라고 답을 하니 “맞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평생 함께 해온 취미는 사진이다. 사진은 '이미지로 표현한 시'라고 본다. 사진이 시이고 시가 사진이다. 사진은 촬영대상인 눈에 보이는 것에서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줄이고 줄이는 뺄셈이며 압축이고 생략이기 때문이다. 이미지를 재창조해야 한다. 문자로 표현한 사진이 시이고, 이미지로 표현한 시가 곧 사진이다.
많은 말 중에 내가 좋아하는 말을 한 마디로 농축하기 위해 나는 “사평역에서”라는 시 한편을 예로 나의 내면을 이야기 해보려 한다.
이 시의 어디가 좋았을까? 내 정서를 섞어 분석을 해본다.
‘막차’, 처음부터 탁 튀어나오는 말, 막차가 좋다. 난 '마지막'이라는 말이 주는 분위기를 좋아한다. ‘마지막’은 더 지체할 것도, 더 희망할 것도 없는 절멸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좀처럼 오지 않는다’는 말. 기다리면 오지 않는다. 기다리며 애타는 그 순간을 젊을 때는 얼마나 가슴 졸이며 시간이 가는 것에 애타했나? 기다림은 그런 것이다. 절박하게 기다리면 더 오지 않는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 그르친 것으로 판단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면 모든게 허무해진다. 몰려드는 그 쓸쓸한 느낌, 다시는 어떻게 해 볼 수도 없다. 그냥 막막함이다. 절박하면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그 반대로 오히려 더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되지 않는 것을 기대한 허무이고 허망이 남는다.
‘대합실’은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이 대기하는 장소이다. 목적을 갖고 떠나든 그냥 무작정 떠나든, 하여튼 ‘떠나는 자리’임이 분명하다. 물론 돌아오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돌아올 때 대합실에 앉는 사람은 없다. 떠나는 사람들만 모여있다. 그래서 좋다! 가슴 설렌다! 어디로 떠난다는 것은 일면 '해방'이기도 하다. 나중에 어쩔 수 없이 돌아오더라도 지금은 해방이다. 대합실은 기차의 대합실이 제격이지만 배의 대합실, 일반 시외버스 대합실도 좋다. 들고 이고, 지고 떠나는 사람들이 모두 기다리고 있는 이 곳은 기다리던 시간이 지나면 그냥 빈 공간이 된다.
떠난 사람 가고 난 뒤 남는 텅 빈 공간에 적막, 고요, 외로움과 슬픔이 그 공간을 채운다. 그런 대합실의 안도 아니고 바깥 풍경을 보고 있다. 바깥은 배척이고 격리이며 분리이고 대상이다. 내가 바라보는 바깥은 선택이 아니고 그냥 나의 눈속으로 풍경이 들어와 주는 것이다. 의지를 갖고 보는 것이 아니라 나와는 상관없이 눈속으로 들어온다. 무관한 누구의 시선 속으로 아무런 인과관계 없이 들어간다는 것은 무감각하고 무관심한 것이다. 무관심은 슬픔이다. 하지만 안과 밖, 나와 너를 구분하는 경계, 그 경계를 넘어서서 밖의 모습을 보고, 느끼려 하는 것은 관심이고 배려이며 공감이다. 경계 넘어 차창 너머의 눈 온 정경은 포근하고 따뜻하며 아름답다. 그래서 이를 보는 사람의 마음은 대조적으로 외롭고 괴롭고 춥고 슬프다. 결국에는 녹고 없어질 눈이기 때문에 원래 대로 평상으로 돌아갈 눈녹은 풍경을 생각하면 허무하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이 구절에 시선이 모인다.
힘들게 살아온 사람들은 말없이 자신의 상처를 가슴 속에 묻어 두고 드러내지를 않는다. 드러내지 않는 너의 상처를 애써 묻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아픔을 가슴에 안고 살기 때문이다. 가난, 폭력, 이별, 실연, 가족갈등, 병, 차별 생각하면 상처 아닌 것이 없다. '어떻게 그렇게 살았을까?'하고 혼자말처럼 내뱉으니 친구는 이렇게 답한다. “그때는 다 그냥 그렇게 살았어!” 그랬다. 그렇게 스스로 위로하며 지금까지 왔다. 주변 친구들에게 간혹 물어본다. “너는 옛날로 돌아가면 언제로 가고싶노?” 하면 답들이 “그냥 지금이 좋다!” 괴로운 시절을 관통하여 힘겹게 지나와서 그나마 “그때보다는 평온한 지금이 행복하다.”고 한다. 평온이 이어지는 것이 행복이다. 그렇게 우리들의 과거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괴로움 가득한 날들이다. 괴로웠던 옛날은 상처이고 그 상처는 드러내어 이야기 하고 싶지 않기 때문 늘 듣기만 할 뿐 침묵한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 낮술을 좋아하는 기독교 모태신앙을 믿는 친구가 있다 그는 늘 하는 말이 “술을 마시고 어리해지는 그 순간이 영령이 강림하는 순간”이라고 한다. 자로 재듯 명료하고 확실하게 정리하고 생활한다면 우리는 살기가 어렵다. 때로 술에 취한 듯 어리하게 시간을 보내는 순간이 있어야 한다. 우리 주변 도처에 흩어져 있는 모순과 갈등을 보고 그 하나 하나 옳고 그름을 가려서 해결하려 마음을 쓴다면 우리는 미쳐 버릴 것이다.
때로 갖는 어리하게 술 취한 듯한 생의 순간도 살기 위해서는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 대충 살 수 있다. 과거와 현재가 같은 선상에 놓여 있고 앞으로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삶은 얼마나 춥고 어두운가? 시 속에서 그런 느낌을 우리 모두 공감하고 있는 듯하다. 이 시대 소시민의 삶은 아픔을 일상인 양 하고 체념한 듯 해탈한 듯 도통한 듯 그렇게 살기 위해서도 때로 어리한 낮 술 취한 순간도 필요하다. 아니 그 순간만이 가장 행복한 순간인지도 모른다.
묻지 않아도 말하지 않아도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온도, 압력은 일정 시점을 넘어 버리면 차이는 무의미해진다. 일정한 환경에 도달하면 나이, 재산, 성별, 학력, 직업 이런 차이가 모두 무화(無化)되어진다. 설원이라는 하나된 풍경속으로 모든 것이 녹아 들어가 하나가 되는 일체 그 순간은 모두가 평등하다. 같다. 그래서 설원이 더 아름답다. 자정 지나면 모두 잠들어 하나 되는데 눈까지 내려 나와 세상천지가 일체가 된다. 자정을 지나면 배고파도, 슬퍼도, 서러워도 어른이나 아이나 부자나 가난한 이나 모두 잔다. 그 잠자는 위로 하얀 눈이 내려져 모든 것이 한 세상이 된다. 그래서 그냥 모두 같다. 밤열차 속 나는 현실의 아픔을 벗어나 하나되는 설원 속으로 간다.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밤열차는 풍경없이 그냥 막연하다. 구비를 돌아갈 때 잠시 흔들려도 열차 속 무심한 밤 승객들은 졸고 있다. 다른 무엇에도 관심 갖지 않는다. 그냥 스쳐 흘러간다. 밤열차는 손님이 있든 없든 어디로 가는지 그냥 계속 달린다. 오직 가는 것만이 목적인 듯, 승객들의 관심 따위엔 무심하게 열차는 그냥 흘러 간다. ‘어디로’는 참 막연하고 슬픈 어휘다. 가는 곳을 모르고 그냥 스쳐 흘러간다. 가고 또 가지만 어디로 가는 지는 관심없다.
눈 오는 허공의 어둠속으로 흘러가버린 야간 열차는 다시 내 앞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어떻게 해 볼 수도 없다. 놓친 열차처럼 떠난 밤열차는 돌아올 수 없기 때문에 끝이다. 허망하다. 허망하기 때문에 아름답다.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우리 어릴 때 이발소에 시가 있었다. 지금 확인해보니 푸쉬킨의 ‘삶’이라는 시였다. “생활이 그대를 속이더라도 ~~”하는 시가 사진에도, 액자에도, 집에 책상 앞에도 흔하게 붙어 있던 시절이 있었다.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고 지난 것은 모두 그리워하느니라”
ㅎㅎㅎ 얼마나 많이 보고 살았으면 아직도 기억에 이 시구가 생생할까?. 시에서 반복되는 ‘그리웠던 순간들’ -생각해보면 수없이 실금이 간 필름에 가슴저리는 그리운 순간들이 장면, 장면으로 각인되어 남아있다. 자랑하고 싶은 순간도, 조용히 혼자만 간직하고 싶은 장면도 지나고 보니 기뻐서 슬프다, 보고 싶어서 슬프다. 너무 좋아서 슬프다. 현실에서는 그냥 상상이어도 글속에서는 가능한 현실이 된다. 가난한 자는 문학의 상상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석탄재, 톱밥이 뿌려지면 흩어져 불꽃이 반짝이며 확 피었다가 금방 사라진다. 우리 인생도 그러하다. 한때 환하게 타오르던 청춘도 세월따라 흘러 가버리고 한참 뒤에 서서 돌아보면 남는 것은 연민이고 회환이고 슬픔이다. 눈물은 불꽃이고 불꽃은 환희이다. 그 환한 화려함 뒤에 오는 캄캄한 적막 그 속으로 우리는 가고 있다.
인생은 괴로워서 슬프고 슬퍼서 아름답다. ‘슬프다’는 어떤 어휘보다 진솔하고 순수하게 느껴져 좋다. 허무도 허망도 외로움도 쓸쓸함도 그 밑바닥에는 슬픔이 깔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