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골목
광활한 대지가 있는 지역에는 골목이 존재하지 않는다. 드문드문 독립 가옥만 있을 뿐이다. 골목은 좁은 공간에 많은 집들이 모여 있을 때 만들어진다.
골목이 사라져 버렸다. 골목을 잡아먹은 거대한 아파트는 아파트 동과 동 사이의 공간만 남겨둘 뿐 골목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아파트 속 아이들은 꼭 같은 가옥 속에서 규격화된 인간으로 자라고 있다. 각기 다른 모습을 가진 집으로 연결된, 그래서 대문과 대문이 이리저리 서로 맞대고 아침저녁으로 얼굴을 마주하던 골목도 이웃도 없어져 버렸다. 고쳐 쓰는 것이 아니라 우린 아예 없애고 새로 만든다. 새로운 것에는 연륜도 정감도 전통도 무엇도 찾을 수 없다.
진주시 평안동 진주고등학교 정문 앞, 진주시 군청 옆(지금은 KT건물)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어머니가 하숙집을 운영했다. 짧은 골목을 20m쯤 나오면 소방도로가 있고 그 차도를 앞에 두고 좌회전하면 금성국민학교 가는 길이었다. 초등학교 정문까지 500m 정도의 통학 길이었는데 어른이 되어서 가보니 제법 멀리 기억된 그 길이 생각보다 훨씬 짧았다. 골목은 차도에서 비켜나 있기 때문에 안전하다. 아이들이 어울려 놀기 좋은 적당히 좁은 독립된 공간이다. 어린이들의 유년기는 이 골목에서 보내진다. 석패 차기, 딱지치기, 말 타기, 땅따먹기, 구슬치기 이런 놀이에 몰입하다 보면 하루해가 저문다.
아파트 지역과는 달리 단독 주택으로 구성된 지역에서는 골목이 남아 있다. 용호동, 영도, 기장군, 청사포도 동네 안으로 가면 바닷가에서 주워 온 몽돌로 담을 쌓은 골목길이 남아있어 정겹다. 송정에도 대문 입구에 양 옆으로 텃밭이 있고 그 텃밭은 돌로 쌓아 제주도 같은 느낌을 주는 집들이 아직 몇 채 남아 있다. 기장군 만화리에는 초암사로 가는 긴 골목이 있다. 그 골목을 걸어 들어가면 초암사 앞에 우물이 있고 그 우물 뒤에는 새로 손을 봐야 할 듯 오래된 아래채 건물이 있다. 그 건물 뒤에는 큰 감나무 두 그루가 집의 배경으로 자리를 잡아 경관을 알차게 한다. 초암사가 대웅전이라면 이 아래채 건물은 요사채 겸 손님들이 머무는 곳인가 보다.
나는 사라져 가는 것에 유달리 애착을 갖는다. 없어져 가는 것에 대한 미련일까? 난 없어져 가는 집, 가게, 길, 정거장, 돌담, 골목, 포구 마을 이런 것에 별스러운 애정을 가지고 있다. 친구와 함께 절 요사채 건물을 크로키로 그리고 있으니 비구니 주지 스님이 차와 먹을 것을 갖다 주면서 두 사람이 열심히 그리고 있으니 보기도 좋다며 잘 그려지면 보여 달라고 한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2달이 지난 후 다시 그 집을 그리려고 초암사로 갔다. 그런데 요사채 건물과 우물은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고 시멘트가 바닥에 칠해진 주차장으로 변해 있다. 넋을 잃고 한참을 쳐다보았다.
송정천을 따라 내리에서 안적사 가는 길에 괜찮은 한옥 가옥이 몇 채 있고 작은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좁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마을을 이루고 마을의 중심에는 큰길이 있다. 그 길은 안쪽에 있는 집들을 연결하는 핏줄처럼 큰 통행로이자 여러 용도로 사용된다. 마을 아이들이 모이는 놀이터이자 골목길 끝에 있는 마을의 큰 나무를 향해 가는 길이기도 하다. 그 나무는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서낭당이 된다. 나무 주변으로 넓은 공간이 이루어져 마을 행사 때면 이 공간에 사람들이 모여 마을의 중요한 일들을 논의한다. 농경사회의 한 일면이다. 그래서 어느 동네를 가더라도 마을의 수호신 겸 큰 나무가 있다. 그러나 지금은 나무만 보호수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또 일부는 베어져 흔적조차 없다.
안타깝다. 옛것을 없애고 새로 낯선 집들을 만들 것이 아니라 옛집을 고쳐서 예스러움을 유지하며 새롭게 고칠 수는 없는 것일까? 만화리 여기저기 여러 곳에 옛집을 허물고 새로 집들을 짓고 있다. 오래된 낡은 집들 사이로 덩그러니 세워져 있는 이질감 나는 새 건물과 반쯤 쓰러져 가는 옛날 집들이 묘한 대조를 이루며 마을을 변모시키고 있다.
만화리 입구에는 제법 넓고 이쁜 다랑논이 있고 그 다랑논을 전경으로 멀리 동네가 정겹게 보인다. 멀지 않은 장래에 이 다랑논마저도 사라질 것 같다.
- 아버지 못골 글 보러가기 : 깡깡이 마을에서 https://brunch.co.kr/@ddbee/41
- 딸 흔희의 글 보러가기 : 골목의 주인 https://brunch.co.kr/@ddbee/42
- 딸 아난의 글 보러가기 : 골목 https://brunch.co.kr/@ddbee/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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