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골목
1992년, 일곱살이 되었던 해였다. 그 전에도 이사를 다녔다고 했지만 너무 어릴 때라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는 첫 이사는 92년도였다. 새로 이사한 집은 주거지라기에는 다소 산만한 시장 골목에 위치해 있었다. 우리가 이사한 곳은 가게와 집이 붙어있는 구조였다. 가게 문을 열면 홀이 있었고 홀이 끝나는 자리에는 여닫이문이 있었다. 그 문을 열면 2개의 방과 부엌이 있는 생활 공간이 나타났다. 이사하는 당일, 홀에는 커다란 사진기와 조명, 가판대, 소파 등이 들어왔다. 동네사람들은 나를 '사진관집 딸내미'로 불렀다.
엄마한테 전해 듣기를, 갓 이사 온 나는 새로운 유치원에 잘 적응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사 오기 전의 유치원은 숲에 위치해 있던 곳으로 사슴이나 여러 가지 동물들을 키우는 제법 규모가 큰 곳이었다. 자유롭게 숲에서 동물들과 함께 뛰어 놀던 7살짜리 아이는 모래밭에 철봉과 그네 몇 개가 전부인 초라한 유치원이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엄마한테 전에 살던 곳으로 가자고 유치원 그네에 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엄마와 아버지는 요즘도 가끔 그때의 이야기를 하곤 한다. 그리고 꼭 마지막에 한마디를 덧붙인다. '그 때, 네가 어찌나 안됐던지…'
직장에서 해직이 되었던 아버지는 94년도에 복직을 하였다. 그 전까지도 나는 누군가가 아버지의 직업을 물으면 선생님이라고 대답했다. 아버지가 뭐하는 사람이냐고 물으면 엄마의 대답은 늘 선생님이었으니까. 선생님인 아버지가 다시 선생님이 되었다고 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엄마가 환하게 웃으며 말하니 그저 좋은 일인가 보다 싶었다. 그 골목에서 살았을 때는 몰랐지만 나이를 먹고 한참 뒤에 알았다. 아, 그 때 우리 집은 망해서(?) 반여동으로 이사를 간 것이었다.
부산의 해운대구에 속해 있는 반여동은 1979년 부산의 서구, 중구, 동구 일대의 철거민들이 대거 이동하면서 형성된 동네이다. 종합운동장과 수원지를 조성하기 위한 사업으로 집터를 잃은 이재민들이 먼저 건너와 자리를 잡았다. 그 이후 정부의 고지대 주거지역 철거 정책으로 인해 갈 곳을 잃은 서부산 사람들이 동쪽으로 밀려 들어와 자리 잡은 곳이 반여동이다. 집과 집 사이의 공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반여동의 집은 다닥다닥 붙어 있다. 옆집에서의 변기 물 내리는 소리가 다 들릴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곳에서 나는 일곱 살부터 열세 살까지 살았다.
엄마와 아버지에겐 그 시절의 생활이 힘에 부친 기억으로 남아 있을지 모르겠지만 사실 나는 집이 그렇게 어려운지 모르고 컸다. 초등학교 때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두다다 뛰어가면 엄마가 늘 계란물을 입히고 설탕을 발라준 식빵을 꺼내주곤 했었다. 간식을 든든하게 먹으면 동생과 함께 속옷 가게를 하고 있는 쌍방울집(당시의 유명한 속옷 브랜드 이름이 ‘쌍방울‘이었다.) 아들과 함께 온 동네를 쑤시고 다니며 동네 탐방을 하곤 했다. 어스름이 지기 시작하면 숙제를 하기 위해 책이 많았던 2층의 이웃집에 올라가서 위인전을 읽었다. 엄마가 저녁을 먹으라고 밑에서 큰 소리로 외치면 2층집 아줌마가 나를 배웅해 주었다.
한 번은 동생의 반에서 머릿니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그 무렵 우리집의 일과는 집 앞 골목에 앉아 동생의 머리카락을 참빗으로 빗어 내리는 작업으로 마무리 되었다. 엄마가 짧게 단발로 자른 동생의 머리를 빗으면 머릿니가 툭툭 떨어졌다. 그럼 나는 재빨리 손톱으로 머릿니를 눌렀다. '딱'하는 소리와 함께 납작해지는 머릿니를 보며 나름의 희열감을 느꼈다. '이 잡이' 의식이 끝나면 엄마는 수박을 잘라 나왔다. 여름 저녁, 선선하게 부는 바람을 맞으며 수박을 물고 골목길 위를 바라봤다. '이 잡이' 의식은 우리집만의 풍경이 아니었다. 고개를 들어보면 골목에 우리와 비슷한 작업을 하는 집이 몇몇 더 있었다. 같은 학교였고 같이 어울려 놀았던 아이들이었다. 골목으로 연결된 이웃들과 함께 삶을 두렁치게 엮어가던 시절이었다.
나에게 골목은 유년시절의 상징이자 삶의 공간이다. 골목을 통해 집과 집은 이어져 있고 이웃들은 골목을 공유하며 저마다의 서사를 일구어 살아간다. 올해 가을, 동생과 경주에 여행을 간 적이 있다. 이곳 저곳을 둘러본 후 황리단길에서 밥을 먹고 맥주를 간단히 마시기로 했다. 황리단길은 오래된 건물의 외부는 최대한 유지한 채, 내부만 현대적으로 수리하여 주택을 재단장한 상점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가다 보면 다양한 소품을 파는 가게부터 카페, 음식점이 있고 거리에는 인생 사진을 남기고자 핸드폰을 들고 포즈를 취하는 젊은 사람들로 붐빈다. 누군가의 삶의 현장이자 생활 공간이었던 골목은 잠깐 머물다 스쳐가는 명소가 되어버렸다. 깔끔하게 정비되어 쾌적하지만 눈에 담아갈만한 곳은 없다. 그곳에는 누군가의 삶이 진득하게 자리잡기 보다는 거대한 자본의 흐름이 요동치고 있다. 과거 주택가였던 구시가지에 상권이 형성되면서 다시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곳은 황리단길뿐만이 아니다. ‘O리단길’이라는 명칭이 유행하면서 부산에도 구 해운대 역 뒤편의 ‘해리단길’, 망미동의 ‘망리단길’이 유명하다. 비슷한 분위기로 영도의 흰여울마을이 있으며 감천의 감천문화마을이 있다.
과거 집터를 잃고 반여동에 떠밀려 왔던 서부산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이들 명소에도 원래 삶의 뿌리를 내리고 살았던 원주민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높아진 임대료나 관광객들의 소음을 견디지 못하고 골목을 떠나고 있다. 실제로 흰여울마을이나 감천문화마을의 골목길을 걷다보면 관광객들에게 주민들을 배려하여 소음을 삼가해달라는 경고성 팻말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스펙터클 사회’라는 말이있다. 스펙터클(spectacle)의 사전적 정의는 ‘일반적으로 생성된 모습이 기억에 남을 정도의 장면이나 이벤트가 되는 것‘이다. 단어의 뜻만 조합해 놓고 보면 ‘스펙터클 사회’는 이벤트 사회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 용어는 기 드보르가 현대인들의 소비문화를 비판하면서 처음 사용한 것이다. 물신주의가 만연하게 되면서 사람들이 추구하는 무언가(이미지)는 복수에서 단수가 된다. 하나의 이미지를 성취하기 위해 사람들은 앞만 보고 달린다. 사회는 이러한 기조를 반영하여 소비하기에 더 편리한 구조로, 하나의 이미지를 보다 안락하게 가질 수 있는 구조로 움직인다. 삶의 현장은 사라지고 명소로만 존재하는 골목처럼. 명소로서의 골목은 다분히 이벤트 공간으로 전락해 버린다. 상품 가치가 삶을 점령한 사회는 외양은 화려해지지만 그 속에서 발생하는 모순들은 은폐된다. 관광객들의 돈을 착취하기에 안락한 구조인 ’황리단길‘의 화려한 외양 속에서 쫓겨가고 있는 원주민들의 존재는 외면 받는다. 생활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해 골목을 청결하게 정비하고 퇴색되어가는 구시가지에 활기를 불어 넣는 도시재생사업 그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누구를 위한 사업인지 그 목표와 방향성에 대한 재질문이 필요하다. 단일한 이미지만을 추구하며 달려가는 사회에서는 그 이미지를 보유하고 있는 것의 유무에 따라 우와 열이 갈린다. 도시화라는 광풍에 매몰되어 골목에게 ’열‘의 이미지를 부여하지 않길 바란다. 정비된 길도, 정비되지 않은 길도 같이 있기에 장면은 풍부해지는 것이다. 골목이라는 공간이 지니는 의미를 제대로 해석하여 스쳐지나가는 누군가를 위한 골목이 아니라 생활의 터전을 일구고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골목이길 바란다. 소비를 위한 골목이 아니라 생활을 위한 골목으로 ‘재생’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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