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기억 속 최초의 장소
거실이라는 공간이 있는 걸 보면 그곳은 동네에서 꽤나 넓은 축에 드는 집일 것이다. 거실에는 대여섯 살 즈음의 아이들이 모여 있다. 무엇을 하고 노는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른다. 그저 안개처럼 볕이 희뿌옇게 창가에 스며 들어오고 사람들의 실루엣만 흐릿하게 일렁인다. 앉아 있는 그네들이 누구인지 한 명 한 명 집어가며 말할 순 없지만 그냥 느낌으로 안다. 그곳은 정우의 집이고 앉아 있는 아이들은 정우고 은영이고 혜진이일 것이다. 연산동에서 어울려 놀았다던 내 유년시절의 친구. 그런 친구가 있었다는 것만 기억에 남아 있다. 길을 가다 마주치면 아마 우리는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버릴 것이다. 그것이 내 최초의 기억.
무엇하나 분명하게 남아 있진 않지만 그들의 존재만은 내 기억 속에 뚜렷하게 자리 잡고 있다. 장면만으로 흐릿하게 남아 있지만 그 무렵의 감정은 명확하다. 따뜻하고 편안하다. 볕이 잘 드는 공간이 주는 감정이기도 하고 사람이 주는 감정이기도 할 것이다. 거슬러 거슬러 올라간 내 최초의 기억에는 훈기가 돈다. 나는 훈기를 가진 사람일까, 아니면 훈기를 찾아 헤매는 사람일까.
어렸을 때부터 나는 눈물이 많았다. 8살 때, 학교에서 만들기를 하다가 풀 뚜껑을 잃어버렸다. 아무리 찾아도 뚜껑이 보이지 않았다. 풀 뚜껑이 없다고 누가 나를 크게 혼내는 것도 아니었고 별 큰일이 아닌 걸 아는데 무언가 서러웠다. 짜증이 날 법한 상황이었지만 짜증의 감정은 아니었다. 그냥 서러웠다. 그래서 울었고 선생님은 내가 우는 이유를 듣고는 꾸지람의 몇 마디를 건넸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까지는 드문드문 몇 장면만 기억이 나는데 유달리 그때의 상황은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각인되어 있다. 울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나도 알았다. 그래서 울고 싶지 않았다. 훌쩍이는 나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친구들의 눈도 부끄러웠고 울음을 그쳐보려는데 때마침 떨어지는 선생님의 다그침도 서러웠다. 그중에서도 울음을 그치고 싶은데 그 사소한 것 하나 어쩌지 못해 훌쩍이는 내가 제일 싫었다.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남들에게 어쩔 수 없이 드러냈던, 내 기억 속의 최초의 순간이었다. 그때 나는 내 곁에서 나를 토닥여줄 다정함을 찾아 헤매며 울었을지도 모른다.
복직을 앞두고 인사이동으로 마음이 심란할 때였다. 동네 주변을 걷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3년 전, 같은 부서에서 일했던 동료였다. 인사이동으로 다 같이 심란한 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그는 내가 생각이 났다고 했다. 주고받은 연락이 오래되어 이렇게 스쳐 지나가나 보다고 생각할 무렵에 받은 연락이라 더 반가웠다. 그도 심란했을 텐데 나를 떠올려주고 먼저 나를 물어봐준 그 마음이 고마웠다. 전화를 끊고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그의 이런 면을 내가 참 닮고 싶어 했었지…’
회식자리에서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분위기에 반발자국 정도 떨어진 사람이 있었다. 그는 그런 사람에게 늘 먼저 말을 붙여주고 자연스럽게 손을 건네주는 사람이었다. 그는 무심하게 건네는 몇 마디로 반발자국 떨어진 사람에게 사람들의 시선을 자연스레 끌어다 주었고 누구 하나 소외되지 않는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자신의 존재감을 유감없이 드러내며 모임을 주도하는 것도 아닌데 몇 마디 슬쩍 얹었다가 물러나면서 누군가를 챙겨주는 그가 유독 커 보였다. 그는 바다 같은 사람이었다.
사실 나는 주변에 관심이 별로 없다.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 표정에서 그 사람의 감정이나 분위기를 읽어내는 힘이 좀 부족한 사람이다. 심리학적으로는 이 힘을 사회적 민감성이라고 부르는데 아마도 나는 타고난 사회적 민감성이 약한듯하다. 별 의도 없이 건넨 말이 누군가에게 비수로 꽂히는 경험을 몇 번 해보고 나서는 민감성을 키워보고자 나름대로 노력을 하며 지내온 세월이 어느덧 40년이 다 되어간다. 그래서 다정한 사람을 동경한다. 성숙하지도 않고 늙지도 않은 30대, 그 애매모호한 시절의 끝자락에 서보니 이제는 안다. 다정함이 삶에 주는 의미를. 다정함은 또 다른 다정함으로 이어진다. 유년시절 친구들과 주고받았을 무구하고 따뜻했던 감정이 있었기에 8살 무렵의 나는 다정함의 부재 속에서 다정함을 찾아 울 수 있었고, 삶의 이런저런 길목에서 만났던 바다 같던 사람이 있었기에 나에게는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을 채워야 하는 지를 알 수 있었다.
다정함은 가려진 곳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부터 시작된다. 볕이 드는 곳에서 그늘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그런 삶을 살아낼 것이라고 확신할 순 없지만 그래도 이 마음가짐을 지니며 살아본다. 생각하고 의식하고 바라다보면 어느덧 그것이 내 일부가 되어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보면서.
70대 아버지와 30대 두 딸이 모여 같은 주제의 글을 써내려가는 뉴스레터 땡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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