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땡비 Apr 23. 2024

두 곳에 동시에 서기(by. 아난)

#16. 우리 동네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

문현 김씨네붴

어린 시절 봤던 영화 '워크투리멤버'의 한 장면이 머릿속에 선명히 남아있다. 바로 ’두 곳에 동시에 서기‘ 장면이다. 남자는 두 개 주의 경계 지역으로 사랑하는 여자를 데리고 가 경계선을 가운데 두고 한쪽씩 발을 두게 한다. 의아해하는 여자에게 남자가 말한다. “너가 죽기 전에 꼭 해 보고 싶은 것들을 적은 목록 중 하나였던 ‘두 곳에 동시에 서기’를 넌 지금 한 거야.” 자신도 잊고 있을 정도로 스치듯 말한 것을 남자가 기억해 낸 것에 감동하며 두 사람은 그 경계에서 활짝 웃으며 서로를 안는다. 그 장면에서 마치 나도 두 곳에 동시에 발을 둔 것처럼 같이 즐거움을 느꼈고 그 잔상이 이어졌다. 한정된 몸으로 구분된 두 곳을 한 번에 설 수 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생경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따뜻한 이불을 뒤집어쓰고서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처럼 전혀 다른 둘을 한 번에 즐길 수 있다는 것은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후회 없이 모든 순간을 즐길 수 있게 해준다.


내게 그런 느낌을 주는 곳이 우리 동네에 있다. 바로 젊은이들이 넘쳐나는 전포카페거리와 신호동 하나를 두고 확 바뀌는 문현동 뒷골목이다. 금요일에는 늘 전포에서 외식을 하고 들어간다. 주말을 앞둔 성대한 전야제 같은 의식이다. 내로라하는 카페들과 술집, 식당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반대편에서 쏟아지는 인파들이 골목을 가득 채운다. 정신없이 뒤바뀌는 전포카페거리를 즐기다 보면 이리저리 사람에 치일 지경이다. 피곤할 정도로 활력 넘치던 전포 카페 거리에서 문현동 뒷골목으로 넘어오면 고요하다. 조용하지만 어딘가 쓸쓸하기도 한 활력을 잃은 철거촌이 있다.


'이 골목 어쩌려고 이렇게 축 쳐지지.' 하는 순간에 드문드문 동네를 지켜나가는 작은 가게들이 눈에 띈다. 동네 터줏대감 같은 고기 집과 곰탕가게, 드문드문 카페와 동네 서점이 자리 잡았다. 오후 6시에 문을 닫거나 툭하면 열지 않는 카페들, 낮에만 영업을 해 열린 모습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카페들도 대부분이다. ‘왜 이곳에 가게를?’ 하는 생각도 들지만 자신만의 느낌대로 개성과 정성이 느껴져 한 번쯤 방문해보고 싶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가게들이다.


그중에 한 달에 한 번은 꼭 가는 식당 ‘김씨네붴’이 있다. 일본식 면 요리인 아부라 소바를 한국적으로 재해석한 곳이다. 인적 드문 골목에 위치해 있어 누가 여길 찾아올까 싶다. 새파란 타이거 맥주 간판만이 ‘여기에 가게 있어요.’라고 외치는 것 같다. 가게 메뉴는 3개밖에 없고 이마저도 기본 소스는 같고 위에 토핑만 바뀌는 요리다. 늘 남편은 수란을, 나는 고기를 추가하여 후추를 듬뿍 뿌려 먹는다. 이 좁디좁은 가게에 앉아 면을 정신없이 먹고 소스에 야무지게 밥까지 비벼 먹으면 에너지가 듬뿍 차오른다. 먹고 돌아서서 정확히 2주 뒤에 계시가 온다. 서로 비장하게 ‘오늘 또 저녁에 김씨네 먹으러 가야겠어!’라고 외치며 가는 식당이다.


이 가게의 특이한 매력은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편안함이다. 영업시간 자체가 짧은 편이고 주말에 열 때도 있다가 요즘은 아예 휴무다. 퇴근 후 7시 30분쯤에 남편과 가서 먹고 나오면 8시가 조금 못 되는 시간이 된다. ‘우리가 마지막 손님이겠다!’ 하는 마음으로 가는데 나가기 무섭게 가게 불이 꺼진다. 매 달 가도 사장님이 아는 척을 한 적도 없고, 나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친절하고 넉살 좋은 사장님을 좋아하는데 이 사장님은 무뚝뚝한 유형에 가깝다. 음식에 집중하고 언제나 모두에게 동일한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귀찮거나 권태로움에서 오는 불친절함이 아니라 필요한 말만 하며 혼자오든 여럿이 오든 부담 주지 않고자 하는 사장님의 마음이 잘 전달된다. 건너편 화려한 부산국제금융센터에 2호점을 내어 깨끗하고 번듯한 매장도 있지만 이 골목 속 허름한 식당의 편안함을 뛰어넘을 수 없다.


오늘도 아부라 소바를 남편과 퇴근길에 맛보고 왔다. 골목을 꺾어 파란 타이거 맥주 간판이 보이면 벌써 설렌다. 밥을 먹고 나면 동네 탐험을 하듯 이 골목 저 골목에서 가볼 만한 곳을 찾아다닌다. 쨍하게 다른 색깔을 가진 두 곳의 경계에서 동시에 서 있는 듯 한 기쁨을 만끽할 수 있는 이 골목이 내겐 이 동네에 살아가는 큰 이유가 된다. 유행 속도에 맞춰 바삐 돌아가는 곳과 언제나 변함없는 골목이 저마다의 개성을 펼치며 함께 살아나가면 좋겠다. 번화가의 놀라운 기세가 이 조용한 골목을 집어삼킬까? 이 동네를 떠나게 되는 순간을 상상해 보면 뒷골목들이 사라질까 벌써부터 걱정된다. 작은 가게들이 급류에 휩쓸려가지 않고 단단히 뿌리를 내렸으면 하는 마음에서 번화가의 번잡함을 살짝 맛보고서는 오늘도 문현 뒷골목을 향해 걸어간다.



70대 아버지와 30대 두 딸이 모여 같은 주제의 글을 써내려가는 뉴스레터 땡비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땡비] #16.우리 동네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 

 - 못골 글 보러가기 : 장산 https://brunch.co.kr/@ddbee/71

 - 흔희의 글 보러가기 : 덧칠 https://brunch.co.kr/@ddbee/70

 - 아난의 글 보러가기 : 두 곳에 동시에 서기 https://brunch.co.kr/@ddbee/69



못골, 흔희, 아난의 글을 한 달에 2번 뉴스레터 땡비로 받아보는 거 어때요?

 - 땡비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235860

 - 지난 글 보러가기 : https://ddbee.stibee.com/

매거진의 이전글 장산(by. 못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