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우리 동네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
나는 스무 살이 되어서야 휴대폰을 가졌다. 주변에 친구들은 15살 때부터 휴대폰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고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부터는 대부분의 친구들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그런 나에게 아버지는 대학에 들어가면 휴대폰을 사주겠다고 했다. 스무 살이 되었고 그해 나는 대학 입시에 실패하여 대학생이 되진 못했다. 비록 대학생이 되진 못했지만 아버지는 나에게 휴대폰을 사주었다. 대학에 붙든 떨어지든 결과에 상관없이 사주고 싶었다는 말과 함께. 재수생인 나의 폰은 대부분 시계로서 기능을 하였고 가끔 이미 대학생이 된 친구들에게서 전화나 문자가 오곤 했다. 그리고 아주 가끔씩, 느닷없이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오기도 했다. 특별한 목적 없이 그냥 ‘뭐하노?’와 같은 존재감 없는 질문과 함께 흘러가는 통화였다.
시간이 지나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고, 아이를 키우면서 일을 하는 직업인이 되었다. 직장에서 숨쉴틈 없이 일을 하다 보면 하루가 고달플 때가 있다. 뜻하던 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답답할 때도 있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생각들 속에서 방향을 찾지 못해 부유할 때도 있다. 꼭 내가 있는 공간이 물로 가득 채워지는 느낌이다. 양쪽 귀 사이로 수압이 꽉 차서 웅웅 거리는 답답한 기분에 온몸이 눅눅해진다. 그럴 때면 유난스레 딸아이의 얼굴이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간다. 자그마한 너를 가슴팍에 꼭 끌어안고 온기를 함께 나누고 싶다는 바람이 가득해진다. 동시에 어느 날 느닷없이 내게 걸려왔던 스무 살 무렵, 아버지의 통화가 떠오른다. 아, 아버지도 그때 좀 고달팠구나.
그런 날이 있었다. 그리고 그날도 딸아이가 참 보고 싶은 날이었다. 제대로 앉아보지도 못하고 이리 저리로 뛰어다니다 보니 점심때가 지나도록 화장실에 한 번 가보지도 못했다. 다시 회의가 있었고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잠시 숨을 고르고 있던 찰나에 휴대폰이 울렸다. 딸아이에게서 문자가 왔다. 벚꽃이 만개한 사진을 보내온다.
학원으로 걸어가다 너는 잠시 멈춰 섰겠지. 그리고 작년의 우리를 떠올렸겠지. 작년에 엄마는 휴직을 했었고 네 보드라운 손을 잡고 학원을 오고 갔었지. 딱 이맘때였던 것 같아. 벚꽃을 두 개 모으면 사랑표 모양이 된다며 조잘대던 네가 예쁘고, 벚꽃도 예뻐서 길을 가다 잠시 멈춰보아라고 했던 날이. 닿지도 않을 손을 뻗어가며 벚꽃 나무 쪽으로 폴짝대던 너를 보며, 나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고 카메라로 너를 담아보았다. 여덟 살에 함께였던 너의 길은 아홉 살이 되니 혼자 걸어가야 하는 길이 되었구나. 혼자 걸어가다 보니 둘이었던 여덟 살의 너와 서른여덟 살인 엄마가 생각이 났던 거니. 이번에는 네가 가던 길을 멈추고 우리의 풍경을 사진에 담아주었구나…
'엄마, 현대아파트에는 벌써 벚꽃이 폈어.'
사진에 이어지는 네 메시지에 콧잔등이 시큰해진다. 혼자 걸어 다니는 것이 안쓰럽다가도 무심코 지나갈 법한 장면에 나름의 의미를 덧붙이는 너를 보니 네가 많이 자랐다는 것을 느낀다. 선물 같은 딸아이의 문자에 힘을 받아 남은 일정을 무사히 마무리한다.
시간이든 장소든 사건이든. 인생은 결국 나를 둘러싼 그 무언가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다. 많은 것들은 휘발되고 사라지지만 또 어떤 것들은 선택되고 기억 속에 남는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사건들을 주워 담아 가며 삶을 꾸려나간다. 자잘하게 모아두는 나의 의미는 이따금씩 꺼내보며 추억이 된다. 살아가다 보니 딸아이와 행복하게 벚꽃길을 걸었던 순간이 오기도 했고 또 살아가다 보니 그때의 우리를 떠올리며 다시 웃음 짓던 날이 찾아오기도 한다. 네가 보내준 문자 덕분에 우리 집과 맞은편 아파트의 사잇길에는 ‘동네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라는 의미가 덧붙는다.
수선을 맡겨 놓은 옷을 찾으러 가다가 아이의 손을 잡고 우리 동네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 길을 한 번 걸어본다. 밤하늘에 하얀 벚꽃이 걸려있다. 집에 돌아와 부지런히 아이를 먹이고 재운다. 하루를 마무리하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는다. 휴대폰을 집어 들고 전화를 걸어본다.
“아버지, 뭐해요?” - 우리의 한 때도, 행복도 그렇게 덧칠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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