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땡비 May 13. 2024

인생에서 생각하면 눈물나는 곳

#17. 생각하면 눈물나는 곳


내 젊은 시절은 없었던 것 같다.      

재수를 하면서 학원도 다니지 않고 그냥 기본 참고서를 겸한 문제지를 과목별로 1권씩 골라서 그 책만 죽자고 파헤쳤다. 그렇게 하면 입시는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본 책만 몇 번이고 반복을 했다. 첫 해 입시 실패를 하고 집에 쳐 박혀 혼자서 갖고 있는 책을 '안광(眼光)이 지배(紙背)를 철(徹)한다'(책을 반복하여 보고 또 보면 그 내용을 충분히 이해한다.-양주동)는 각오로 읽고 또 이해하며 팠다. 그런데도 실패였다. 왜일까?


빵과 과자, 생필품을 평상에 진열해 놓고 판매를 하는 작은 구멍가게를 하며 어머니가 생계를 꾸렸다. 나는 ‘대학은 꼭 가야 되겠다.’는 목표 의식만 강했지 정작 방법은 몰랐다. 입시에 계속 실패하니 답답한 마음에 이웃에 거주하는 모 교수에게 어머니가 물어본 모양이다. 나는 중학교 1학년 1학기만 다니다가 장기 결석으로 퇴학을 하고, 두 해가 지난 뒤 2학년에 복학을 했다. 그 사실을 전해들은 교수님은 ‘1학년이 공백 학기가 되어 아들의 발목을 잡는 것 같다.’는 진단을 내렸다. 특히 수학 과목을 두고 그렇게 이야기를 했다. 진단만 쉽게 내렸지 어떻게 하라고는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물론 그 말도 일면 타당한 지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공백 기간에 빠진 부분은 상급 학년을 올라가면서 조금씩 해결되어 간다고 생각했다. 기초 공부를 마음먹고 보충하지 않으면 현재의 학습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보완을 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금정산에 ‘관음사’란 절이 있었다. 명칭만 절이지 실제로는 작은 판잣집 같은 가난한 절이다. 어머니가 “그곳에 가서 공부해 볼래?”라고 물으며 함께 가본 적이 있다. 아는 절이기 때문에 실비로 숙식이 가능한 조건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연이은 아들의 실패에 몹시 안타까웠나 보다. 문맹인 어머니가 얼마나 애탔을까? 어머니 나름의 해결책이었다.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방법이 없어 더 갑갑하셨으리라!


무슨 고시 공부한다고 절에까지 가겠나 싶어 집에서 계속 혼자 견디어 나갔다. 그리고 다음 해 세 번째 입시를 치렀다. 그때는 예비고사가 있고 전기‧후기대학이 나누어져 2번의 본고사를 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전기 대학에 실패하고 후기 대학에 시험을 치고 오니 형이 물었다. 

“어떻터노?”

“장학생도 하겠더라”

“어! 진짜로?” 하고 형은 기뻐했다. 합격자 발표날 가서 보니 몇 단계의 상위과를 골라도 충분한 성적이었다. 자신의 수준을 모르니 그냥 선택한 진로였다. 입대 날짜도 되고 경제적 이유 때문에 더 이상 입시를 시도해 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원하는 대학을 욕심내어 보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1974년 9월 5일 입대하는 영장을 받았다. 우울한 날들이었다. 목표한 것을 극복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은 엄청난 차이다.


그리고 제대를 하여 복학을 했다. 복학을 하니 나는 수입이 급한 학생 가장이 되어있었다. 홀로 계시는 어머니와 내가 살기 위해서는 벌이가 필요했다. 야간학교에 강사로 나가며 끈질기게 학업을 계속해 나갔다. 전두환 때 과외는 금지되어 있었다. 도시락을 2개 싸서 라면과 말아먹으며 한 치 옆도 쳐다볼 수 없는 힘든 시기였다. ‘대학생’은 나에게 사치스러운 이름이었다. 졸업식에서 친구가 축하 삼아 해준 말은 “정말로 고생했다”였다.   


결혼을 하고 두 아이가 태어났다. 내 입시의 실패 원인이 다양한 문제를 경험하지 않은 데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는 그런 실패를 반복하게 하지 말자고 하여 여러 문제를 많이 폭넓게 다루어 보도록 배려했다. 아이들은 고맙게도 내 바람처럼 열심히 공부하였다.


큰 아이는 성적은 괜찮으나 석차가 한참 뒤로 밀렸다. 1점으로 석차가 크게 뒤바뀌는 살벌한 학교 현장이었다. 첫해 수능시험은 영어 과목에 발목을 잡혔다. 입시는 실패였다. 내 대물림인지 둘째 해도 입시에 실패하였다는 소식을 부산에서 서울까지 도보여행을 하는 2004년 2월에 경북 왜관을 지날 때 들었다. 아이도 열심히 노력하여 성적이 많이 향상되어 합격할 것이라고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는데 내신 산출을 태만하게 하여 다시 실패했다. 실패라니! 이 꽃다운 젊은 시절을 어둡고 좁은 독서실에 처박혀 모든 즐거움을 차단해 버리고 자신과 힘겹게 다투어 나갈 또 한 해를 생각하니 아이가 느끼게 될 암담함에 눈물이 났다.


여행 중에 함께 걸어가는 표 선생이 “형님! 무슨 일 있어요?” 하고 묻는다. 그때 비로소 생각이 났다. 아해를 낳아서 길러 보아야 부모님 마음을 안다는 그 말을, 아이가 입시에 실패하는 것이 내가 실패하는 것처럼 가슴 아팠다. 그러나 수험자 본인은 그것까지 느낄 수 없다. 자신에게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데만도 에너지가 부족할 지경이기 때문에 옆의 상황에 관심 가질 여유가 없는 것이다. 내가 그랬다. ‘왜 실패할까? 어떻게 하면 이 난관을 극복할까?’하는 문제해결에만 관심이 있었지 옆에서 마음 졸이며 바라보는 어머니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실패하고 낙담하는 나를 보면서 어머니는 얼마나 가슴 아팠을까? 얼마나 우울하고 안쓰러웠을까? 내가 그런 처지가 되니 비로소 어머니가 느꼈을 아픔이 전해져 온다. 그 해 덕문여고에서 수능시험을 치러 들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났다. 아이가 겪은 그 힘든 시기를 생각하니 가슴이 저렸다.


다행스럽게 그해 세 번째 해에는 열심히 하여 큰 아이의 수능 성적은 상당한 수준이 되었다. 시험에 다시 실패하지 않도록 알아볼 수 있는 모든 정보를 동원해 두드려 보고 또 확인해 가며 신중에 신중을 기해 학교 선택을 했다. 나군 00 교육대학에 면접을 보기 위해 아침에 학교 앞 식당에서 딸과 둘이서 말없이 떡국을 먹을 때 묘한 쓸쓸함이 몰려들었다. 푸스슥 부은 아이의 얼굴을 보면서 우리들이 그렇게 견뎌온 날들을 생각하면 마음은 까닭도 없이 우울해졌다. 그 해 다행스럽게 원하는 가군학과에 아이는 진학을 하고 다시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순간순간 나의 입시 실패를 자신의 실패인양 가슴 아파했을 어머니 당신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 한 구석이 저려온다. 살아가는 과정은 기쁨도, 슬픔도 모두 함께 대물림하며 되새김하며 흘러가는 가보다. 가족이란 그런 것이다. 함께 사는 것이 슬픔이고 기쁨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덧칠(by. 흔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