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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땡비 May 14. 2024

문이 닫히고 나면(by. 흔희)

#17. 생각하면 눈물 나는 곳


결혼한 지 7개월 만에 아이가 찾아왔다. 10개월을 뱃속에 품고 다녔고 31살이 되던 해, 아이는 개나리꽃과 함께 태어났다. 12시간의 진통이었다. 분만 직전에 혈압이 오르고 열이 올라 난산이 예상되었다. 엄마는 연신 나의 팔다리를 주무르며 걱정 어린 시선을 건넸다. 낯선 세상에 내던져진 아기는 울음을 터뜨리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었고 분만실 밖에서 전전긍긍하던 엄마는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같이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출산은 순탄했지만 육아의 과정은 생각보다 더 혹독했다. 직장에서 한창 재미를 붙여가던 때에 휴직을 해야 했고 13살 때부터 살았던 익숙한 동네를 떠나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곳에서 말도 못 하는 아기를 안고 생활을 해야 했다. 꼭 외따로 떨어진 무인도에 갇힌 기분이었다. 엄마의 양수 안에서 아늑하게 지내왔던 아기도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고생이었다. 탯줄로 연결되어 큰 노력 없이 배를 채울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세상에 나오니 젖을 빠는 노동을 해야 배를 불릴 수 있었다. 밖은 추웠다가 더웠으며 날은 밝았다가 어두워졌다. 변화된 환경에 적응을 하느라 나뿐만 아니라 아기도 부단히 애를 쓰던 시기였다.


아기는 자라 3살이 되었고 2년의 휴직 끝에 나는 복직을 했다. 복직을 하면서 다시 친정과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갔다. 어린이집 입소 날짜는 복직 날짜와 같았다. 원장님께 양해를 구해 입소일 2주 전부터 적응 기간을 가졌다. 처음에는 한 시간 정도 같이 어린이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며칠 다니다 보니 아이도 선생님과 기관 분위기에 익숙해지는 듯했다. 엄마 없이 어린이집에 있어봐도 될 듯하다고 원장님이 한번 나가보라고 하셨다. 엄마가 나가려는 것을 귀신같이 눈치챈 듯 아이는 갑자기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울먹거리는 엄마의 얼굴을 보자마자 원장님은 얼른 나가라며 등을 떠밀었다. 막상 엄마가 가고 나면 아기는 괜찮아진다고 하였다. 쫓겨나다시피 서둘러 나온 나는 한동안 어린이집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가지도 들어가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저 울음이 너무 길어지지 않기를. 힘이 너무 빠지지 않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눈물에 가려 시야가 일렁거렸다. 적응의 시간은 며칠 더 이어졌고 다행히도 아이는 상황을 점차 받아들였다. 담임 선생님에게서 놀다 보니 잠이 들었다고 내일부터는 낮잠 이불을 들고 와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어린이집을 적응하고 난 뒤 또 다른 언덕이 기다리고 있었다. 출근이었다. 직장이 멀어 7시 전에 집에서 나서야 했다. 아이에게 찾아온 엄마의 빈자리를 할미와 할비가 채워주었다. 새벽잠을 쫓아가며 부은 얼굴로 엄마와 아버지가 번갈아가며 집으로 왔다. 그냥 편히 자면 좋으련만. 숨죽이며 움직였지만 집을 나서기 전에 아이는 일어났고 목놓아 울었다. 품에 파고들어 놓아주지 않았다. 울음이 그치길 바라며 안아주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아버지는 늦겠다며 얼른 일어나라고 하였다. 또 가고 나면 괜찮아진다고 하였다. 품에서 떨어뜨리면 아이의 울음은 더 짙어졌다.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뒤로 하고 도망치듯이 문을 나섰다. 당시엔 서로 직장이 가까워 남편과 같이 출근을 하였다. 나는 남편이 먼저 차에서 내리고 나면 기다렸다는 듯이 울었다. 그냥 운 것이 아니라 울부짖으며 울었다. 눈물은 뺨을 타고 흘러내렸고 그 눈물을 휴지로 찍어대며 차를 몰았다. 아이를 낳고 나니 미안한 일 투성이었다. 직장에서도 엄마로서도 딸로서도 계속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고 뭐 하나 제대로 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정신없이 토해내듯 울고 나면 어느덧 직장에 도착해 있었다. 누가 봐도 울었던 티가 나서 바로 내리지 못했다. 꺽꺽 거리며 숨을 몰아 쉬었고 들썩이던 어깨를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잠잠해지고 나면 룸미러를 통해 눈 상태를 확인했다. 슬픔을 거둬들인 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말간 얼굴로 동료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업무를 시작하기 위해 컴퓨터를 켜고 메신저를 확인할 때쯤이면 휴대폰이 징~ 울렸다. 부은 눈으로 웃고 있는 아이의 사진이었다. 아이가 울지 않고 출근하는 엄마를 배웅해 줄 때까지, 부모님이 보내준 아이의 사진은 핸드폰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아침마다 눈물바람이었던 3살 배기 아기는 자라서 9살 소녀가 되었다. 여전히 엄마는 아이보다 집을 빨리 나선다. 집을 나서는 엄마를 따라 나오며 아이는 빙긋 웃는다. “엄마, 사랑해. 하루 잘 보내.” “연서야, 사랑해. 하루 잘 보내. 연서 먼저 방에 들어가. 들어가는 거 보고 엄마 현관문 닫을게.” 아이가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문을 닫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문이 열린다. 아이는 고개를 쏙 내밀며 엄마를 바라본다. 손을 볼에 갖다 대며 하트를 만든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웃는다. 엘리베이터는 도착하고 아이에게 들어가라며 손을 흔든다. 문이 닫힌다.


직장에 도착한 후, SNS에 올렸던 아이의 사진을 들여다본다. 시간을 거슬러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다 보니 아이가 유아차를 타고 다녔을 때의 사진까지 나온다. 사진 밑에 그때 적어 놓았던 글을 읽어 본다.

2017년. 1월 18일. 오랜만에 아이와 함께 친정에 다녀왔다. 연서가 아버지의 필통에 흥미를 보이며 혼자 잘 노는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가 물었다. “아 보기 안 힘드나?” “아유, 아부지 내 새끼니 봐주지 아니면 못 봐요.” 뒤늦게 아버지와 주고받던 대화를 떠올려보았다. 내가 아이를 보고 있던 그때 우리 아부지는 나를 보고 있었나 보다. 집으로 끌고 가던 유아차를 멈춰 세울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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