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생각하면 눈물 나는 곳
회사에서 잘리면 가족에게 말할 수 있을까? 내 대답은 ‘아니요’였다. 엄마가 부산에서 멀리 서울까지 올라와 내 이사를 도와주고 내려간 다음 날이었다. 작은 여행사 스타트업을 다니고 있던 나는 부당해고를 당했다. 고민이 생기면 가족에게 실시간으로 주절주절 말하던 나인데 막상 그 상황이 되니 말문이 막혔다. 부산에 내려가 이사 뒤 고단한 몸을 풀고 있을 엄마에게 어떻게 말한단 말인가? ‘내 조언은 별 의미 없다. 이제 네 인생은 너 스스로가 더 잘 결정 내릴 거다.’라고 항상 선택을 지지해 주시던 아버지께 이런 망한 결과를 어떻게 알려드리겠는가? 공공기관을 박차고 나와 스타트업을 다니겠다고 했을 때는 당당하게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그러나 내가 박차고 나온 것과 잘린 것은 완전히 달랐다. 아무런 대안과 소속이 없는 상황에서 내가 가진 불안감을 가족들에게 알려 더 증폭시키고 싶지 않았다.
스타트업에 다닐 당시 내 통장에 찍히는 월급은 180만 원이었다. 회사가 아직 안정적이지 않아 연봉 인상 언급은 쉽사리 꺼낼 수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쫓겨나기까지 하니 ‘내 인생은 어디로 흘러가는가?’라는 질문이 나를 에워쌌다. 앞으로 박봉의 연봉 계약서를 가지고 안정적이지 못한 여러 기업을 전전하게 될까봐 걱정되었다. 밤에 누워 새하얀 새 집의 천장을 보고 있자면 온갖 결로 퍼져나가는 미래에 대한 고민 때문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대망의 추석이 왔다. 백수가 되어 맞이하는 추석이라니! 2013년 취업한 이후 2번의 이직동안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연이어 출근하며 살아왔다. 강제로 휴식이 주어진 지금 서울에 혼자 남아있고 싶지 않았다. 무작정 부산으로 가서 엄마가 주는 과일을 먹으며 시간이 멈춘 듯 쉬고 싶었다. 부모님께는 연차를 오래 냈다 하고 2주를 부산에서 지냈다. 엄마는 "이렇게 휴가를 길게 내도 되나~ 니 잘리는 거 아니가"하며 농담을 던졌다. 겉으로는 "잘리긴 뭘 잘려~"라고 했지만 ‘엄마! 사실 벌써 잘렸어!’라고 속으로 답했다.
이런 상황을 마치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지켜보며 다 알고 있던 이가 있다. 바로 나의 혈육 자매님이었다. 부모님은 너무 걱정하실 것 같아 차마 말하지 못하고, 언니에게는 슬쩍 말해두었다. 혼자서 짊어지고 싶지만 현재 나의 상황을 털어놓고 싶은 마음도 동시에 들면서 언니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긴 추석 연휴가 끝나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야 하는 날이 되었다. 부산역으로 언니네 부부가 태워준다고 했다. 기차 시간보다 이르게 도착하여 부산역 주차장에 차를 대어 두고, 별 시답지 않은 농담을 던지며 시간을 보냈다. 언니도 나도 불안함이나 걱정은 감추고 애써 웃으며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드문드문 무언가 씁쓸함이 새어 나오는 듯한 정적이 생겼다. ‘시간이 되어 가보아야겠다’고 나는 씩씩하게 인사를 하고 내려 기차를 향해 걸어갔다. 훗날 언니는 차에서 내려가던 내 뒷모습이 너무 슬퍼서 나를 보내고 나서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그 순간 우리는 담백하게 인사했지만 언니는 홀로 먼 서울에서 힘들게 살아나가고 있는 나를 걱정하고, 나는 언니에게 괜히 짐을 더한 것 같아 언니를 걱정하는 마음에 눈물이 흘렀다.
그래서 부산역은 내게 참 좋으면서 슬프고 아린 공간이다. 스무 살 처음으로 아무도 없는 서울에 올라와 사무치게 외로운 순간이 많았다. 그래서 첫 월급을 받고 연말정산을 했을 때 급여 담당 선배가 슬쩍 와서 물었다. “대중교통비가 이렇게 많이 나온 사람은 처음 본다. 도로에서 대체 뭘 하고 다니니?”라고 할 정도로 나는 부산에 갈 기회가 생기면 부산에서 시간을 보냈다. 엄마는 서투른 운전에도 부산역까지 늘 나를 데리러 왔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 아는 부산역 옆 길가에 엄마 차를 발견하면 볼살이 다 흔들리도록 뛰어가 엄마에게 안겼다. 서울로 돌아가야 할 때면 부산에서 있을 수 있을 때까지 지내다가 저녁 8시 반 넘어 기차를 타 서울역에서 막차 버스를 타고 신촌 집으로 와 짐을 풀었다. 부산역에 마중 나온 가족들과 헤어질 때면 웃는데 눈에는 눈물이 차올라 눈물을 닦으며 서울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간이 멈춘 듯 부산에 있다가 서울로 올라오니 다시 시간이 팽팽 돌아갔다. 내가 몸담았던 스타트업의 IT 팀장님께서 잠시 나를 프리랜서처럼 고용해 주셨다. 회사에서도 늘 나를 성장시켜 주시고 동기부여해 주시며 거둬준 IT 팀장님 덕분에 부당해고된 상황에서도 자책하거나 스스로를 할퀴지 않을 수 있었다. 독서실이 여러 개 묶인 것 같은 공유 오피스가 나의 새로운 근무지가 되었다. 나는 잠시 비를 피하는 백수지만 약속한 날에 성실히 출근했다. 동시에 다시 부산과 서울의 여러 기업에 서류를 넣고 면접을 하며 취업 시장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던 12월 9일 박근혜 탄핵이 국회에서 가결되었다는 방송을 보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부산에 있는 한 회사에 최종 합격을 했다는 전화였다.
그렇게 나는 고향을 향하는 연어 마냥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삶의 터전이 부산이 된 요즘 부산역을 지나갈 때면 웃음이 슬며시 나온다. 치열했던 나의 20대가 휘리릭 재생된다. 그러다 기억 저 안쪽까지 들어가 보면 그때의 부산역 주차장이 떠올라 목에 울대를 차오르게 한다. 시커먼 언니네 차에서 내려 기차로 걸어가던 그 순간이 한 번씩 떠오른다. ‘와 여기서 그렇게 오갈 때는 부산에서 다시 살 수 있게 될 거라고 생각도 못했는데….’ 인생은 어디로 흘러갈지 정말 알 수가 없다. 앞으로도 부산역을 수없이 오고 가겠지만 마음 한 곳에 묵직함을 안겨다 주는 이 기억들 때문에 부산역은 여전히 내게 참 좋으면서도 아린 공간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70대 아버지와 30대 두 딸이 모여 같은 주제의 글을 써내려가는 뉴스레터 땡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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