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기억에 남는 선생님
모방 과정을 거치지 않은 창조라는 것이 있을까?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가장 기초적인 방법과 생각이 부모님에게서 유래된다면, 또 내가 가르치고 이야기하는 내용과 방법이 내가 가장 이상적인 선생님이라고 생각했던 어느 선생님의 방식과 생각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깡마른 얼굴에 검은 뿔테 안경을 낀 눈초리가 매섭다. 칠판에 글씨를 힘 있게 눌러 써 분필이 부딪치는 소리가 심하게 탁탁 난다. 자주 분필이 부러진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손목에 압력을 가해 써 나가는 글씨, 이쁜 글이 아닌 힘 있는 글이 칠판에 질서 없이 매워진다. 그래도 정리되고 이해되어 머릿속에 입력되는 내용은 버릴 것이 없다. 그냥 듣기만 해도 이해가 된다. 담임 선생님 수업이라 더 귀 기울여 듣는다. 고3인데도 잘못을 크게 저지른 친구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교편으로 종아리에 회초리를 가한다. 복싱을 하는 친구에게 ‘너는 공부보다 권투를 열심히 하여 그쪽으로 대성해야 한다’며 친구를 격려해 준다.
학생이 지나치다 싶을 때 체벌을 극히 가끔 할 뿐 좀처럼 그런 경우는 없다. ‘왜 결석했어? 왜 싸웠어? 왜?’를 사용하여 우리에게 물을 때면 자상한 표정이 늘 얼굴에 깃들어 있다. 교련 조교의 요구를 무시한 죄로 얼굴을 못 알아볼 정도로 심하게 두들겨 맞고 담임선생님에게 인계되었다. 웃으며 ‘괜찮냐’하고 묻는다. 선생님은 조교에게 간단히 나의 변명을 대신해 준다.
“얘는 그런 학생입니다. 스스로 맞지 않다고 생각하면 잘 굴복하지 않습니다.”
충청도가 선생님의 고향인데 부산으로 와서 생활하였다. 대학원 진학을 하여 석사학위를 받는 과정에서 금전을 지나치게 요구하여 졸업이 힘들었다며 석사학위를 경력에 표시하지 않는다고 했다. 처음 교직을 알아보고 다닌 경험을 나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교직을 구하려 다닌 당신의 과정이 특이하다. 부산은 연고가 없기 때문에 이력서를 여러 장 작성하여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무작위로 고등학교를 방문하여 관리자를 면담하였다. ‘꽤 괜찮은 교사이니 고용하여 한번 써 보십시오’라며 준비해 간 이력서를 주고 자신을 선전하고 나왔다고 한다. 그런 배짱을 나도 배워 학원에 근무할 때 다른 학원에 가서 자리가 나면 ‘괜찮은 강사이니 한번 불러달라’라고 하며 이력서를 주고 나왔다. 학원에서 생활하고 한참 뒤에 나를 만나지 않았는데도 이력서를 보고 미리 나를 알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선생님은 “내가 너희들 진학지도를 태만하게 하여 너희들에게 지금도 미안스럽다.”라고 했다. 줄담배를 즐기는 끽연가인 그는 폐암투병을 하며 ‘네놈이 사진관 한다고 하니 어디 내 사진 한번 촬영해 봐라’고 한다. 빨조리를 물고 담배 피우는 모습을 연출하여 촬영한 사진을 지금 보니 그립다. 군자란을 길러 온 집에 난이 자라고 있었다. 패각충이 있어 매일 잎을 닦아 주며 확인을 해야 한다고 자식처럼 군자란을 길렀다. 군자란은 꽃을 보는 식물이 아니라 잎을 보고 키운다고 하며 관상용 식물의 용도가 여러 가지로 있음을 알려준다. 산에서 흙을 가져오면 살균하기 위해서 솥에서 찐다고 했다. 대단한 성의이다. 아들이 있는데 입시에 실패하여 삼수를 하고 있다며 나에게 자식이 가장 힘들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늦둥이 딸이 있었는데 아주 명랑하고 발랄해서 선생님의 귀염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사모님은 약사였는데 왜 그렇게 사업이 잘되지 않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약사도 사업에 실패를 하는가’하는 이해하지 못할 의문이 들었다. 선생님은 나이 많은 백발의 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다.
내가 임용 후 고등학교 3학년 담임을 맡았을 때, 선생님은 만들어 놓은 진학 지도표를 나의 학급에 대입시켜 입학 가능한 학교를 예정해 주었다. 3학년 초보 담임을 제법 경력 있는 교사처럼 연수시켜 입학 시즌을 슬기롭게 넘겼다. 유락여중을 졸업한 아이가 우리 반에 편성되고 나서 나이 지긋한 어머니 한 분이 찾아와서 부탁을 했다. 아이가 실장으로 선출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실장이 되고 그렇지 않고에 담임이 개입할 여지는 크게 없다. 공정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감수한다면 몰라도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도 선생님은 실장을 부탁하는 것은 그런 직책을 감당할 만한 아이이니 부탁하는 것일 거라고 말해 주었다. 실장 선출에 담임이 되도록 개입하지 않고 아이들 스스로 선출하도록 두고 보니 이 아이가 자연스레 실장이 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중학교 때 학생회장을 했다고 한다. 실장이 되니 학급을 잘 이끌어 간다. 실장은 담임 못지않게 여러 가지 역할을 한다. 할만한 역량을 갖고 있으니 부탁을 한 것이라는 담임 선생님의 말이 생각났다.
89년에 해직이 되고 나서 선생님이 재직 중인 학교의 조합원 동료에게 선생님의 근황을 물으면 ‘자신의 애제자도 해직되어 있다’고 하더란다.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 너희들이 힘든 과정을 거치고 있다’며 미안해했다. 전교조 건으로 해직되고 나서 00여상 김0덕 교장을 소개해 주었다. 정권의 폭력에 의해 해직이 되었는데 어느 누가 임용을 해줄 것인가? 불가능한 일이라며 선생님께 면접을 가지 않겠다고 하니 자기가 이야기해 놓았다며 일단 가서 만나만 보라고 간곡하게 이야기를 해 주셨다. 이런 정치적 상황에서도 제자의 해직을 가슴 아파하는 선생님의 배려가 고마워 헛발질이라 생각하며 김교장을 찾아갔다.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자 곧바로 나를 쳐다보며 ‘꽤 나이가 든 전교조 교사이구만’하며 이어 나오는 말이 ‘자기가 한 행동에 책임을 져야지!’ 하는 책망의 말이 나에게 던져졌다. 속으로 이렇게 답변을 했다. ‘그래서 해직이 되지 않았습니까? 이 이상 책임지는 일이란 어떤 것인지요?’ 하고 자문했다. 억울한 마음에 눈물이 나오려 했다. 전국의 학교가 전교조 사태로 폭풍 같은 시간을 견디고 있을 때다. ‘모든 학교의 관리자가 전부 전교조에 비판적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라는 말로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나왔다. 당연히 임용은 되지 않았지만 하고 싶은 말이었다.
불가능 속에서도 나를 위해 애써주신 선생님의 마음이 늘 고맙게 느껴진다. 94년 복직을 하고 5월인가 전화를 하니 선생님이 돌아가셨다고 전화로 답변이 온다. 황당해 하는 나의 귀에 ‘선생님이 나에게는 부고를 보내지 말라’고 당부하셨다한다. 너무 슬퍼하지 말아라는 유언처럼 들렸다. 그 이후로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도 선생님의 목소리가 가끔 귀에 쟁쟁거린다. 길을 걷다가, 학교 생활에 힘들었을 때,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을 때 기억되는 평생 함께 가는 선생님이다.
70대 아버지와 30대 두 딸이 모여 같은 주제의 글을 써내려가는 뉴스레터 땡비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 못골 글 보러가기 : 부고를 보내지 말아라 https://brunch.co.kr/@ddbee/88
- 흔희의 글 보러가기 : 기억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 https://brunch.co.kr/@ddbee/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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