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기억에 남는 선생님
나에게는 연락을 이어가고 있는 선생님이 없다. 나는 학창 시절에 크게 눈에 띄는 학생이 아니었다. 160센티를 겨우 넘긴 평균키를 가지고 머리를 한가닥으로 질끈 묶어 다니던 평범한 여고생이었다. 비교적 착실한 편이었으며 적당히 활발하고 적당히 밝아 교우관계도 원만한 편이었다. 요약하자면 나는 선생님들에게 별로 손이 가는 학생이 아니었다. 그것이 꾸중이 됐든 칭찬이 됐든 선생님의 시선은 나의 것이 아니었다. 어른들에게 살갑게 다가가는 성격도 못 되어 나는 선생님은 그저 선생님으로서 예의를 다할 뿐이었지 인간대 인간으로서 또 다른 유대를 만들어가진 않았던 것 같다. 진급을 하고 반이 달라지면 그만인 관계. 졸업을 하고 나서 우연히 길에서 선생님을 마주친다면 내 이름 석자를 기억해주는 분이 계실까. 누군가의 기억에 남는 부분에 있어서 나는 내 존재감을 장담할 수 없는 사람이다. 기억되기보다는 잊혀지는 쪽이 많지 않을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스무 살이 되었지만 나는 대학생이 아니라 재수생이 되었다. 대학생이 된 친구들은 등교를 위해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에 나는 커다란 가방을 등에 짊어지고 터덜터덜 재수학원으로 향했다. 그날도 재수생의 무수한 아침 중에 하루였을 것이다. 완전히 잠을 떨치지 못한 멍한 상태로 걸어가고 있는데 뒤통수에서 내 이름을 크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싶어서 뒤를 돌아봤더니 승용차 한 대가 도로 갓길에 멈춰 있었다. 운전자로 보이는 사람이 차 옆에 서서 나를 향해 손을 크게 흔들고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길가가 쩌렁쩌렁하게 울리도록 큰 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흔희야, 안녕!”
선생님과 나의 거리가 백 미터쯤 되었을까. 고개만 돌아봤던 나는 몸의 방향을 선생님 쪽으로 틀어 선생님과 마주 섰다. 반가운 마음에 나도 머리 위로 손을 뻗어 크게 두어 번 흔들다가 이내 허리를 구십 도로 숙여 인사를 하였다. 얼른 가던 길 가보라는 선생님의 손짓에 몸을 다시 틀었고 발걸음을 학원으로 향했다. 기억해주고 있음이 고마웠다. 바쁜 출근시간에 스쳐 지나갈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차를 세우고 길가에서 내 이름을 크게 외쳐주던 그 마음이 고마웠다. 걸어가는데 눈가 주변으로 뜨거운 열기가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1분도 채 되지 않는 순간이었지만 그 순간이, 그 아침이 나에게는 두고두고 기억되는 응원의 한 장면으로 남아있다.
김애란 작가는 소설 속에서 사랑을 '나의 부재를 알아봐 주는 것'으로 정의한다. ‘네가 안 보여서 찾았어.’라고 말하며 나를 찾아줄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우리는 울고 웃으면서 사람과의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때론 기대조차 하지 않은 상대가 나를 떠올려주고 있었다는 순간에서 뜻밖의 위로를 받기도 한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그런 위로를 줄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 ‘이만하면 그래도 내가 잘 살았구나.’라고 생각하는 삶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내가 잘 살아왔구나.’란 생각이 들게끔 하는 삶을 살고 싶다. 천성이 다정하지 못해 다정한 사람이 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두고 살아간다. 살다 보니 내 목표는 나를 완전히 개조하는 어마무시한 작업인 것 같아 목표를 다소 작게 수정하였다. 억지로 다정한 사람은 못되더라도 적어도 누군가에게 상처 주지 않는 사람이 되자고. 최선을 추구하기가 버거워 최악을 피하는 형국이다. 아무래도 목표를 다시 수정해야 할 듯하다.
누군가의 부재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 되는 것. 기억하는 사람이 되는 것.
70대 아버지와 30대 두 딸이 모여 같은 주제의 글을 써내려가는 뉴스레터 땡비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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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희의 글 보러가기 : 기억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 https://brunch.co.kr/@ddbee/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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