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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틱 Jun 13. 2021

바람 나들목에서

김해 연지공원에서 느림과 여유로움을 느끼다

일 년 남짓 힘들고 서툴었던 본사 임원 생활을 마무리하고, 자원해서 지방으로 배치를 받았다. 연고로 가면 최선이겠지만 그것도 임원 생활에 있어서 사치인지라 그냥 고향 가까운 곳에만 가도 이제는 감사할 따름이다. 서울에서 떠나던 날 어지간히도 마음이 찹작하고 복잡했다. 더 큰 세상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했는데도 왠지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었던 것은 아마 사람 사는 냄새(香) 정(情)이 많이 그리웠던 것 같다. 


부산과 경남지역을 관리해야 하다 보니 첫 둥지를 다시 튼 곳은 김해였다. 아마 이곳저곳을 누벼야 하는 업(業)의 특성상 부산과 경남지역의 가장 중간지역에 있어야 이동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서울에서는 9 평 남짓의 월세방에 거주했는데 지방으로 내려오니 방이 세 개인 꽤 큰 규모의 오피스텔에 사택을 잡을 수 있었다. 아내도 본사를 떠나 지방 발령을 받은 것을 크게 환영하는 편이다. 아마 그간 내가 받았던 업무 스트레스를 잘 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부산지역에 둥지를 틀 수도 있었지만 김해에 사택을 정한 이유는 주변이 조용하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서울이라는 시끌벅적하고 분주한 곳에 근무하다 보니 아마 한적하고 조용한 곳이 그리웠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역시 생각한 대로 집도 넓었지만 공원이라 주변도 생각보다 조용했다.


이사를 도와주러 아내가 내려왔다. 이럴 때 정말 아내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이사하는 첫날에는 원래 짜장면을 먹어야 하는데 찾아보니 주변에 반점이 없었다. 추어탕집을 찾아서 허기를 빨리 해결하고, 빠르게 이삿짐 정리를 대충 마무리했다.  마침 주말이고 해서 인근에 산책할 곳을 검색해보니 사택 가까운 곳에 유명한 호수 공원이 있었다. 연지공원??? 아마 연꽃이 많아서 연지공원이라고 명칭을 한 것 같았다.



며칠 비가 와서 그런지 날씨도 더운 데다 습도도 매우 높아 산책하기는 쉽지 않은 날씨였다. 십여분 정도 걸으니 어느새 공원에 도착했다. 공원 둘레길은 생각보다 정말 산책하기에 쾌적했다. 산책길 둘레는 벚꽃나무가 서로 연리지처럼 얽히고설킨 모양으로 터널길을 만들어 시원하게 그늘을 제공해주고 있었다. 아마 봄에는 벚꽃의 향연에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을 것이다.


호수에는 수련 잎이 층층이 호수 위에 떠올라 자신의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꽃말을 찾아보니 수련(water lily)은 '깨끗한 마음, 청순한 마음'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한자로 '물' 수(水)가 아닌 '잠잘' 수(睡)를 써서 '잠자는 연꽃(睡蓮)'이라고도 불린다. 6~8월에 뿌리줄기에서 꽃줄기가 자라 물 밖으로 나오고 그 끝에 흰색이나 분홍색 꽃이 피는데 연꽃과 모양이 비슷하고, 실제로 피어 있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고 대부분의 시간은 잠을 잔다고 해서 물 위의 잠자는 꽃인 수련(睡蓮)이라는 명칭이 생겼다고 한다. 수련은 이집트의 국화이기도 하다.



공원 둘레길 초입에 큰 느티나무가 있었다. 여름이라 녹색 잎이 무성해 느티나무가 제공해주는 그늘은 정말 시원했다. 장수를 상징하고 한민족의 보호수로 아늑한 시민적 정서를 갖고 있는 나무이다. 아내는 나무 중에서도 느티나무를 특히 좋아한다. 그래서인지 공원 초입부터 시원한 느낌이 좋았다.  


공원 둘레길은 벚꽃나무, 느티나무, 메타세쿼이아 그리고 호수를 가로지르는 나무 가교와 나무 오두막집이 정말 이색적인 풍경을 만들어내며 처음 공원을 찾는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고 있었다. 더운 뙤약볕을 온몸으로 받으면 공원에 도착한 우리들에게 나무 터널길을 제공해주는 둘레길은 정말 심신의 안정을 주기에 충분했다.


둘레길에도 '바람의 나들목'이 있었다. 그곳에 서있으니 정말 다른 곳과 달리 바람이 정말 시원하게 불어왔다. 걷다 보니 "자기야 너무 예쁘지 않나"라는 아내의 말에 시선을 돌리니 정말 나무와 나무 사이로 보이는 가교와 메타세쿼이아의 풍광이 정말 그림의 화폭처럼 아름다웠다. 잠시 우리는 그곳에 앉아서 한참 동안 이색적인 풍광의 아름다움을 즐겼다.



햇볕이 강하게 내려쬐는 나무다리를 큰 노란 우산을 쓰면서 걷는 어린아이들의 뒷모습이 너무나 귀여웠다. 나무다리를 걷다 보니 멀리서 할아버지 한분이 다리 밑의 물고기에게 빵부스러기를 던져주고 있는 모습이 보여서 우리는 그곳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기대했던 물고기는 비단잉어가 아닌 긴 수염이 나있는 메기였다. 잉어뿐만 아니라 메기도 과자 부스러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처음엔 생소하게 느껴졌지만 같은 물고기 종류니 당연히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걷다 보니 발 지압 길도 있었다. 80대 노년의 여성분이 사뿐하게 걷는 모습에 나도 용기를 내서 무모하게 도전을 시도했다. 세 걸음 만에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발바닥이 아파왔다. "자기야 아프면 내가 그쪽으로 신발을 들고 갈게"라는 아내의 말에 왠지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끝까지 지압길을 걸었다. 뾰족한 잔돌을 지나니 뭉글하고 넓은 돌이 나오고, 잠시 후에 나무길도 나왔다. 내가 걸어왔던 삶도 이런 길이었을까? 앞으로는 편한 지압길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렇게 고통스러웠던 지압길을 지나 다시 신발을 신으니 내 온몸의 스트레스와 독이 발의 고통과 함께 시원하게 배출된 느낌이 들었고 걷는 발걸음도 너무 편안했다.



중간중간 보이는 인근 공원의 놀이터에서 시소와 그네를 타는 아이와 부모들의 환한 웃음과 미소가 멀리서도 느껴졌다. 모두들 잠시나마 복잡하고 힘든 삶의 여정에서 벗어나 느리고 여유롭게 가는 시간들을 한껏 온몸으로 즐기고 있었다. 멀리서 길냥이가 꽃이 좋은지 그 옆을 떠나지 않고 한참을 앉아서 꽃향기를 맡고 있었다. 전생이 아마 꽃을 좋아했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바람 나들목에 있는 벤치에 잠시 앉았다. 바람의 통로 길을 만들어서인지 계속해서 시원한 바람이 더위에 지친 피부를 시원하게 간지럽혔다. 벤치 위에 앉으니 잔잔하게 들리는 클래식 음악과 함께 호수 분수쇼가 장엄하게 펼쳐졌다. 아마 저녁에는 여름에 지친 무더위를 싹 날려줄 보기만 해도 시원한 음악분수쇼가 펼쳐질 것이다. 다음번에는 저녁에 산책을 와야겠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기대감으로 설렌다. 앉아 있으니 둘레길 전체에 잔잔하게 퍼지는 클래식 음악은 호수에서 산책하고 앉아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마음의 평안과 위로를 주고 있었다.



늘 시간에 쫓겨 바쁜 걸음을 걷는 우리들에게 오늘 호수 산책은 오랜만에 느림과 여유로움을 주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내일은 사실 24주년 결혼기념일이다. 뭘 갖고 싶냐는 물음에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선물은 평소 챙겨주지 못한 사람들이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사주는 행위"라고 말하면서 "우리들은 늘 이렇게 데이트를 하고 있는데 선물은 따로 필요 없다"라고 얘기했다. 그래도 24주년 결혼기념일인데 그냥 지나가도 될까? 원래 여자들의 마음은 갈대와 같은데...... 왠지 찝찝한 마음을 억누른 채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제 다시 새로운 지역에서 직장생활을 해야 한다. 언제나 그렇듯 낯설고 새로운 환경은 또 다른 스트레스를 줄 수 밖에는 없다. 하지만 오랜 직장생활을 노하우 중에 하나는 바로 그 지역과 빨리 친해져 '지역 통'이 되는 것이다. 그래야 그때부터 몸도 마음도 최적화되고 편해진다. 지역에 있는 유명한 명소를 방문하고, 맛집을 찾아서 즐기다 보면 어느새 지역의 전문가가 되어 있을 것이다. 올해는 내게 정말 중요한 삶의 이정표가 만들어지는 시점이다. 한걸음 한걸음, 하루하루 충실히 살고 즐기고, 사람들과의 정을 충분히 나눈다면 어느새 나도 이곳을 고향만큼 충분히 좋아하지 않을까? 오늘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감바스에 와인을 한잔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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