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스틱 Jun 09. 2021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죽음의 의미를 다시 곱씹어 본다

내가 열일곱 살이었을 때, "만일 내가 매일의 삶을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언젠가 당신은 대부분 옳은 삶을 살았을 것이다"라는 글을 읽고 33년간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만일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오늘 하려는 것을 할까?"라고 자신에게 말을 했습니다. 여러 날 동안 고민해서 그 답이 아니라면 나는 어떤 것을 바꿔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곧 죽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내가 내 삶에서 큰 결정을 내리는데 가장 큰 도움을 준 도구였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모든 외부의 기대들, 모든 자부심, 모든 좌절과 실패의 두려움 등은 아무것도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정으로 중요한 것들만 남기게 됩니다. 당신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당신이 어떤 잃을 것이 있다는 생각의 함정을 피하는 가장 좋은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마음을 따라가지 못할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 스티브 잡스 스탠퍼드대 연설 중에서 -



사람들은 죽는다. 하지만 누구나 죽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런 이유에서 죽음은 삶의 중요한 명제이지만 피하고 싶은 삶의 소외된 주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삶을 사는 것은 삶의 여정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준다. 죽음 앞에서는 삶의 모든 우선순위가 바뀌고, 중요한 모든 것들이 하찮아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삶에 대한 애착을 더 강하게 만들고, 삶의 여정을 더 충실하게 만든다.


나는 오래전 스티브 잡스의 스탠퍼드 연설 영상을 유튜브로 처음 볼 때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자신의 체험에서 나온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죽음이라는 무거운 명제를 이렇게 명쾌하게 해석하고, 이해하고, 실천하는 사람을 여태껏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 연설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직접 원문을 듣고 해석을 하기도 했다. 무엇이 나를 그토록 죽음이라는 단어에 집착하게 만들었을까? 아마 나는 죽음을 통해서 삶을 이해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임사체험을 하게 되었다!


군대 장교 시절, 난 죽음의 경계선을 넘나든 경험을 한 적이 있다. 94년 여름 평일 저녁, 나와 선배는 인근 지역에 술자리 모임이 있어 선배 차를 함께 타고 목적지로 향했다. 편도 일 차선의 좁은 지방도로이다 보니 앞에 대형트럭 한 대라도 있으면 속도가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평소 성격이 급한 선배 앞에서 느리게 가는 대형화물트럭을 추월하기 위해 가시성이 확보되지 않는 오르막 차선에서 무리하게 중앙차선을 넘어 추월을 시도했다. 평소 같으면 트럭들이 속도를 줄여 양보를 하는데 왠지 그날따라 대형 트럭은 속도를 더 높여 추월을 방해했다. 두 차의 속도 경쟁이 가속화되면서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선배는 엑셀을 있는 힘껏 밟았다. 하지만 잠시 후 맞은편에서 빠앙~하는 크락션 소리와 함께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눈부신 상향 전조등이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왔고, 그 순간 선배는 무의식적으로 핸들을 좌측으로 꺾었다. 차가 좌측으로 빙그르 돌면서 조수석에 앉아있던 나는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대형트럭과 정면으로 부딪혔다. 나는 너무 놀라 눈을 힘껏 감았고, 순간적으로 '이렇게 나도 죽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충돌한 순간 심장의 호흡이 멈추었다. 순식간에 내 머릿속에는 어릴 때부터 살아온 나의 전 생애가 파노라마 필름처럼 생생하게 지나갔다. '혹시 죽은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동안 나는 그렇게 무호흡 상태로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갑자기 호흡이 터졌고, 눈이 떠졌다. 살아난 것이다! 하지만 온몸이 쑤시고, 아팠다. 나는 어떻게든 밖으로 나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남은 힘을 다해 조수석 문을 열었고, 가까스로 나와서 차를 보니 차의 우측 부분이 거의 반파가 되어 있었다. 선배는 의식을 잃고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잠시 후 다급한 전화소리가 들렸고, 앰뷸런스가 오는 소리를 듣고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않았다. 그날 사건 이후 나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항상 염두에 두고 삶의 여정을 살고 있다. '나머지 인생은 덤'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아래 글은 내가 죽음에 대한 나의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임을 다시 한번 밝힌다. 물론 나는 종교도 없고, 사후세계에 대한 편향도 없다. 다만 죽음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생각을 정리한 글이니 오해 없기 바란다)


동양사상에서 인간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바로 '기(氣운)'이며, 서양에서는 이를 '에너지'라고 부른다. 기력이 쇄하거나 기운이 다하면 죽음에 이르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에너지가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에너지 불변의 법칙 즉, 에너지 보존법칙에 따르면 에너지는 사라지지 않고, 다른 형태나 에너지로 변환하거나 전환이 되지만 그 총량은 변치 않는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죽음은 인간의 육신에 남아있던 에너지가 빠져나가 다른 형태로 전환되어 가상의 공간을 떠돌다가 다시 어떤 물질(육체)을 만나 완전체를 이루면 존재의 상태 즉 윤회(輪廻)를 하게 되고, 다시 기운이 다하면 에너지가 물질에서 빠져나가는 생성과 해체의 과정을 거듭 반복하게 된다. 영양분을 섭취해 열량을 얻어 자전거를 돌리면 그 운동 에너지에서 전기가 발생하는 것처럼 에너지는 써도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변화하는 것처럼 말이다. 어떻게 보면 죽음은 육신과의 이별이지 진짜 '나'는 없어지지 않고 에너지처럼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죽음은 인생의 '사고(四苦)'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인간의 불행의 근원은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행복을 추구하지 말고 안심(安心)을 추구하면 불행을 느끼지 않는다. 무엇을 집착하거나 추구하면 반대의 감정이 들기 마련이다. 또 삶에 너무 애착하지도 슬퍼하지도 말고 한바탕 꿈이라고 생각하고 마음 편안하게 살아가자. 불교에선 속세에 있는 심신을 '아바타(Avarta)'라고 부른다. 산스크리트어로 '분신', '화신'을 말한다. 아바타를 관찰하는 진짜 '나'가 있다. 내가 아바타라는 것을 확신하면 내가 병들어도 '아바타가 병들었구나', 화가 나도 그건 내가 아니라 '아바타가 화를 내는구나'라고 진짜 '나'와 '아바타'를 분리해서 관찰해야 한다. 죽음 또한 마찬가지다. 불교의 핵심적 가르침은 삶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사고(四苦)'의 과정이며, 죽음으로써 고통을 벗어날 수 있다. 아바타를 이해하면 생로병사의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고, 해탈에 이를 수 있게 된다.

- TV 프로그램 <유퀴즈>에 출연한 월호스님의 대사 중 -



인터넷을 보면 '이생망'이라는 말이 한 때 유행을 했다. '이번 은 망했다!'라는 뜻이다. 어떤 이는 전생의 업보가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산스크리트어로 '카르마(Karma)'라는 불교 용어가 있다. '미래에 선악의 결과를 가져오는 원인이며,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선악의 소행'을 말한다. 흔히 '업' 또는 '업보'라고 부르기도 한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삶은 4단계의 과정을 거치는데 태어나는 순간이 생유(生有), 삶을 사는 본유(本有), 삶이 끝나는 사유(死有), 다음 생을 받기 전까지 기간인 중유(中有)가 있다. 중유는 윤회를 위한 선업과 악업을 계산하는 기간인데 보통 10일에서 49일이 걸린다고 한다. 49재(齋)가 여기서 유래했다. 업과 윤회는 어떻게 보면 인과관계와 인과응보처럼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혹시 좋지 못한 업을 과거에 많이 저질렀더라도 현생에서 참회하고, 선한 일을 많이 해서 덕을 쌓는다면 업보를 벗어날 수 있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해탈에도 이를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죽음을 보는 시각에서 불교는 죽음은 육신(몸)이 소멸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어찌 보면 죽음 이후에도 삶은 계속 이어진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죽음은 삶을 이해하는 가장 핵심적인 말이다!


 '끝을 생각하면서 시작하라'는 말이 있다. 아름다운 끝은 결과가 아닌 과정의 충실함이다. 한 땀 한 땀 수놓은 옷처럼 과정의 노력이 모이면 좋은 끝이 만들어진다. 웰빙(Well-being)과 웰다잉(Well-dying)은 무수히 많은 점으로 연결되어 있다. 죽을 때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는 매 순간 허투루 쓰지 말아야 한다. 가치가 있거나 의미가 있는데 가급적 많이 써야 한다. 남의 맘에 상처를 주어서도 안된다.


물론 매 순간 그렇게 할 수는 없지만 인생의 '의미'와 '재미'를 적절한 비율로 잘만 쓴다면 삶은 더 윤택해질 수 있다. 그렇다고 빡빡하고 여유 없게 살라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 있다면 과감히 도전을 해야 한다. 한 일에 대한 후회보다는 하지 못한 일에 대한 후회를 줄여야 한다. 편안한 죽음이란 삶의 여정을 후회 없이 산 이들에게 주어지는 이승의 선물은 아닐까?


작가의 이전글 그대여,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