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생각하는 삶을 살다가 어느 날 맞닥뜨리게 되는 깊은 허무, 나는 이 허무야말로 가장 소중한 터닝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이는 어떤 이들에겐 '결핍'일 수도 있고, 또 어떤 이들에겐 '후회'일 수도 있으며, 어떤 이들에겐 '눈물'일 수도 있다. - 이종수의 <희망은 격렬하다> 중에서 -
얼마 전 나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서 잘 나가고 있는 선배 한 분과 술자리를 하게 되었다. 그 당시 난 본사 임원 생활을 하면서 정신적으로 힘들기도 했고, 회사가 대내외적으로 어려운 영업환경에 놓여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직장에 대한 불만과 불평을 그 선배에게 토로하게 되었다. 얼마 전까지 나와 함께 같은 직장에 근무한 선배다 보니 누구보다 내 고충을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도 있었다.
그 당시 난 본사 임원으로 근무하면서 회사의 민낯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본사의 분위기는 매우 냉랭했고, 부서 간 업무 이기주의도 극에 달했다. 기업이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한 방향으로 서로의 눈높이를 맞추고, 부서 간 협업과 시너지를 만들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진행되는 회의체의 주된 안건들은 그냥 단기적인 미봉책에 불과한 경우들이 대부분이었다. 현장이 겪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본사의 각 부문은 자기들만의 재무적 목표만을 달성하기 위한 이해관계로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었고, CEO에게 잘 보이려는 임원들 간의 진흙탕 싸움도 잦았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모바일 플랫폼 기업들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기 위해 무차별적 역마진 전략들을 전방위적으로 추진하면서 기존 오프라인 업체들의 생계계를 뿌리째 흔들고 있는 시점이었다. 온 오프라인 간 경쟁은 더 치열해졌고, 그로 인해 기업들의 손실 또한 산더미처럼 쌓여가고 있었다.
기업의 영업이익이 줄거나 마이너스가 되면 기업은 비상 경영체제로 들어가게 된다. 인건비를 비롯한 각종 경비는 더 옥죄게 되고, 외형적 매출의 신장보다는 마진 위주의 내실 위주의 영업을 펼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영업 현장은 인력 축소로 판매력이 더 떨어지게 되고, 상품 마진 확보를 위해 판매되는 상품 행사의 규모나 마케팅 비용마저 줄면서 매출과 영업이익이 동시에 줄어드는 악순환의 고리가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기업의 이상적인 모습은 부서 간 이기주의가 없어야 하며,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교차 기능 전략(Cross functional strategy)이 구현되어야 하는데 내가 본사에서 직접 목도한 모습은 이와는 전혀 상반된 모습이었던 것이다. 또한 장단기 투자 또한 최근 수년간 진행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시스템과 매장의 인프라 또한 경쟁점에 비해 초격차로 벌어지고 있었다.
이런 현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나는 선배에게 임원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기업의 민낯을 더욱 낱낱이 까발렸다. 또한 그런 기업에 다니고 있는 나의 모습이 정말 초라하고, 미래가 정말 불안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선배는 나의 얘기를 담담하게 듣고만 있었다. 나의 이런 불만 섞인 얘기들이 어느 정도 끝날 때쯤 선배는 내게 단호한 태도로 의미 심장한 대답을 했다.
"나도 너처럼 본사에서 근무하면서 지금의 기업으로 이직을 하기 전에 너처럼 회사에 대한 불만도 많았고, 진급에 대한 조바심도 매우 컸었다. 특히 내가 정말 싫어하는 상사가 회사의 CEO로 선임되었을 때 나는 회사 내에서 나의 미래 또한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난 과감하게 이직 결심을 했고, 이곳저곳 내게 맞는 기업을 알아보고, 또한 헤드헌트를 통해 적극적으로 구직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의 기업으로 이직을 하면서 임원을 달게 되었고, 그 후로 내 삶이 완전히 달라졌다."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이직한 것을 후회한 적이 없다. 물론 지금의 자리까지 오면서 엄청난 업무강도와 스트레스가 있었지만 그건 내가 선택한 결과의 대가였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때 이직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실직을 했을 확률이 높았을 것이고, 아니면 너처럼 불평과 불만을 토로하면서 억지로 참고 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너와 내가 다른 점은 딱 한 가지다. 불만만 가득하고, 불평만 늘어놓고 있으면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너는 전혀 하지 않고 있는 점이다. 나처럼 실행하지 않을 거면 불만도 가지지 말고, 열심히 직장에 다니거라."
그 말을 듣고 나는 나는 뭔가를 크게 머리에 맞은 느낌이었다. 그 선배가 지금과 같이 대기업의 고위 임원을 달게 된 것은 바로 그 선배의 선구안과 실행력 덕분이 아닌가? 아니라고 생각할 때 과감히 승부수를 던지는 배짱이 내게는 없었던 것이다. 누구나 인생을 살다 보면 시한폭탄처럼 삶의 극적인 변화를 만들 수 있는 '삶의 터닝 포인트'를 맞이하게 된다. 누군가에는 '결핍'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는 '후회'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는 '걱정'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눈물'일 수도 있다. 변곡점이라고 불리는 터닝 포인트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선물처럼 주어지기도 한다.
선배에게 있어 삶의 터닝 포인트는 바로 이직이었고, 또한 이전보다 매출 규모가 십 분의 일 수준의 대기업으로 이직한 것이 바로 신의 한 수였다. 이전에 다녔던 기업이 글로벌 스탠더드 경영에 의해 운영되었고, 기업의 시스템과 운영 모델은 거의 세계 일류급의 수준이었기 때문에 이전 직장에서 경험한 지식과 노하우, 경험들을 이직한 기업에서 구현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물론 뿌리가 없는 임원으로서 지금까지 생존 노력은 내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소의 꼬리가 되기보다는 닭의 머리가 되는 편이 낫다
사기(史記)를 보면 계구우후(鷄口牛後)라는 고사성어가 나온다. '소의 꼬리가 되기보다는 닭의 주둥이가 되는 것이 낫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면 큰 기업에 들어가서 빛을 못 본 채 비참하게 사는 것보다는 자신의 능력을 맘껏 펼칠 기업에 들어가서 우두머리가 되는 편이 낫다는 말이다. 현재의 자리에 연연하기보다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도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적시적기(適時適期)에 삶의 터닝 포인트를 만드는 것은 실행력과 운(運, luck)이 따라야 한다. 영어 속담에 'Nothing comes from nothing'이라는 말이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직을 결심한 것은 정말 인생의 큰 터닝 포인임은 틀림이 없다. 인생 100세 시대, 조직에 순응하기만 했던 내 삶의 터닝 포인트는 무엇일까? 사실 얼마 전 헤드헌트로부터 스타트업 기업 임원 자리를 제의 받은 적이 있었다. 맘은 굴뚝같았지만 내심 두려웠다. 오십이 훌쩍 넘은 내가 아직까지 열정이 내 맘속에 남아 있기는 할까? 정말 초심으로 돌아가 뿌리도 없는 기업에서 내 입지를 만들 수는 있을까?
온갖 두려움과 걱정으로 며칠 밤을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아내와도 상의했지만 현 직장에 다니는 것으로 최종 결론을 내렸다. 지금의 내 마음가짐과 정신 상태로는 이직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부끄러웠지만 난 선배처럼 이직할 용기가 없었다. 인생의 이모작을 준비해야 하는 시점이다 보니 더욱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찌 보면 선배처럼 절박함이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성공한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운과 타이밍이 따라 줘야 한다. 운이란 준비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고, 타이밍이란 도전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현생의 삶에 안분지족(安分自足)하고, 도전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는 운과 타이밍이 따르지 않는 법이다. 늦었지만 선배의 말처럼 삶의 주도권을 내가 거머쥘 수 있도록 다시 한번 내 삶의 전방위적인 방향을 수정해야 할 시점인 것 같다. '꿈은 꾸는 자의 것이다'라는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