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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틱 Nov 18. 2021

비와 추억, 비의 랩소디(Rhapsody)

#우산 집 #추억 #빗소리 #우중 캠핑 #힐링 #소나기 #첫사랑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 함께 비를 맞지 않는 위로는 따뜻하지 않습니다. 위로는 위로를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가 위로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 신영복의 《처음처럼》중에서 -

비를 맞는 사람에게 때론 우산을 씌워주는 것보다 함께 비를 맞는 것이 어쩌면 그를 진정으로 위하는 행동일지도 모르겠다. 뼈저린 삶의 아픔과 상처를 겪고 있는 사람에게 어설픈 위로보다는 아무 말 없이 함께 있어주는 마음의 교감이 필요할 수도 있으니. 내가 가진 것을 나눠주는 것보다 그 사람의 마음에 함께 기거하면서 이해하고, 나누는 그런 동행의 삶이 말이다.




비(rain)라는 말처럼 삶의 갬성(?)을 돋우는 말은 없는 것 같다. 왠지 창밖에 쏟아지는 빗소리만 들어도 알 수 없는 묘한 감성이 쏟구치기도 한다. 하지만 요즘은 예전과 달리 지붕이 없는 아파트에 살고, 차량으로 이동하고, 주차장을 통해 일터와 목적지로 들어가다 보니 예전만큼 비의 감성을 제대로 느끼기 쉽지 않은 환경이 되어 버렸다. 이제 비는 더 이상 맞는 존재가 아닌 그냥 보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 아쉽다.


어릴 적 살던 시골 부모님 한옥집에는 함석지붕이 달린 외양간이 함께 있어 비가 올 때면 항상 함석지붕으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선명하게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지붕에, 창가에, 창문에, 땅바닥에, 마당의 세숫대야에 후드득하고 떨어지는 빗소리는 제각기 다른 소리를 내며 아름다운 빗소리의 하모니를 만들어내곤 했다.


어릴 때 나만의 방이 없었던 나는 비가 오면 항상 마당에 우산 세 개를 포개서 받쳐놓고 그 안에 들어가 손바닥만 한 공간에서 나만의 왕국을 즐기곤 했다. 그렇게 우산은 나만의 집이, 그리고 아지트가 되어주었다. 때론 동네 친구들과 좁은 그곳에서 우산 속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우중 캠핑(?)을 즐기기도 했다. 어머니가 야단을 치며 들어오라고 하기 전까지 세 개의 우산은 그렇게 나만의 소중한 추억의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소를 키웠던 부모님 집에서 이따금 내리는 여름의 소나기는 소꼴을 베러 가지 않아도 되는 '쉼'과 '여유'를 주는 반가운 선물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애니메이션 <소나기>의 한장면
소녀는 소년이 개울 둑에 앉아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냥 날쌔게 물만 움켜 낸다. 그러나, 번번이 허탕이다. 그대로 재미있는 양, 자꾸 물만 움킨다. 어제처럼 개울을 건너는 사람이 있어야 길을 비킬 모양이다. 그러다가 소녀가 물속에서 무엇을 하나 집어낸다. 하얀 조약돌이었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팔짝팔짝 징검다리를 뛰어 건너간다. 다 건너가더니만 홱 이리로 돌아서며,

 ‘이 바보.’

조약돌이 날아왔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개울가에서 만난 소년과 소녀가 산으로 놀러 가서 만난 소나기 대문에 수수밭 더미 속으로 몸을 숨기고, 둘이 웅크리고 앉아있는 모습은 오래 기억 남는다. 서로에게 따뜻한 체온을 나눌 수 있게 한 것도 소나기였다. 아마 소나기에 대한 아련한 향수와 그리움이 생긴 것은 아마 황순원 작가의 <소나기> 때문인 것은 틀림이 없다.




이렇듯 비만큼 인간과 친밀하고 우리 정서에 영향을 주는 자연현상은 없을 것이다. 비가 주는 쉼표와 느낌표는 사람마다 다 다를 수밖에 없다. 난 원래 비 맞는 것을 싫어했다. 특히 우산을 써도 운동화가 방수가 안되어서 빗물의 축축함이 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느낌이 정말 싫었다.


하지만 대학생이 되어 첫사랑인 아내와 데이트를 할 때는 비에 대한 감정이 바뀌게 되었다. 연애와 사랑도 제대로 모르던 스무 살 젊은 남녀가 뜨거웠던 연애와 사랑의 감정을 식혀주고 이어주었던 매개체가 바로 비였다. 가끔은 우산을 접고 길을 걸으며 몇 시간 동안 우중 데이트를 즐기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왜 미친 짓(?)을 했는지 서로 물어봐도 그냥 웃기만 하는 그런 웃픈 청춘시절의 추억이 되어 버렸다.


지금도 생생하게 발현되는 추억 하나가 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장마철. 아내와 나는 한 개의 우산으로 인도를 걷던 중 깊게 파인 웅덩이를 피하기 위해 난 아내가 행여 신발이 젖을까 아내를 엎고 그곳을 폴짝 뛰어 건넜고, 빵집 가게 처마 밑에서 소나기를 잠시 피하기 위해 서있다가 주인에게 미안해 들어간 빵집에서 사 먹었던 흰 생크림빵은 정말 맛있었다. 배가 고프기도 했지만 그때 함께 먹었던 빵이라서 더 그랬던 것 같다. 빵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아내는 유독 흰 생크림빵은 여전히 좋아하는 것은 아마 그때 추억 때문이 아니었을까.




인간과 떼려야 뗄 수가 없는 비라는 존재는 누군가에게는 지친 삶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게 하는 멈춤과 휴식의 시간을 주기도 하고, 또 누군가에게는 내리는 눈물처럼 이별의 아픔을 잊게 하고, 또 추억을 소환하는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가뭄에 바짝 마른땅과 대지위의 식물에게는 생명을 다시 싹 틔우는 단비가 되기도 한다. 


아이들에게 비는 우의와 장화를 입을 수 있는 패션무대를 만들어주고, 또한 첨벙첨벙 고인 물을 발로 세차게 두드리는 시각과 청각을 자극하는 자연의 놀이터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또 누군가에게 비는 무료하고 지루한 일상의 삶에 힐링을 주기도 한다. 이렇듯 빗소리는 바쁘고 지친 우리들의 삶 속에 어쩌면 저마다 다른 쉼표와 느낌표를 만들어 주고 있다.




비와 음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그런 관계랄까. 비가 나오는 노래는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아마 비만큼 인간과 친밀하고 우리 정서에 영향을 주는 자연현상은 없기 때문이다. 특히 소리, 청각이 깨우는 빗소리의 감성은 삶의 희로애락의 기억을 일깨우는 뭔가가 있는 것은 틀림이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색감에 따라 그리고 가랑비, 안개비, 소나기, 밤비, 궂은비 등 비의 종류에 따라 느끼는 감성은 듣는 사람의 감정과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특히 여름 장마는 영화로도, 소설로도, 시로도 많이 사용된 단골 소재이기도 하다.



첫사랑이 생각나는 영화 <노트북>을 보면 17살 첫눈에 반했던 노아와 앨리는 집안의 반대와 군입대로 이별하게 된다. 그로부터 7년이 흐른 뒤 결혼을 앞둔 엘리는 우연히 듣게 된 노아이 소식에 고향으로 돌아와 노아를 만난다. 호수 위 보트에 오른 두 사람. 오랜만이 낯섦과 반가움의 감정이 흐르고 내리는 빗속에서 애절한 키스는 두 주인공이 오랫동안 간직했던 첫사랑에 대한 복잡 미묘한 감정을 나타내기에 충분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퍼붓는 장대비는 감정을 고조시키기 적절했다. 


빗소리는 어떤가. '톡톡톡, 투둑, 토닥토닥, 후두두둑, 추적추적, 보슬보슬, 쏴아악, 주룩주룩' 등 참 많기도 하다. 작은 빗방울은 톡톡 떨어지고, 작은 빗방울이 더 빠르게 떨어지면 토도독 떨어진다. 큰 빗방울은 후드득, 소나기는 쏴아악, 보슬비는 보슬보슬. 그중에서는 난 '토닥토닥'이라는 의성어를 참 좋아한다. 비가 내리면서 물건이나 바닥 등을 두드리는 소리가 참 좋다. 




빗소리, 파도소리, 폭포 소리처럼 일상생활에서 나오는 소음을 백색소음이라고 한다. 누군가는 조용한 곳에서 눈을 감고 들으면 하얀 기운이 느껴지는 소음이라고 해서 그렇단다. 백색소음은 일반 소음과 달리 귀에 쉽게 익숙해지기 대문에 작업에 방해되는 일이 거의 없어며, 오히려 거슬리는 주변의 소음을 덮어주는 작용을 하기도 한다. 


실제로 여름철 해변가에 누워 파도소리를 듣거나, 빗소리나 장작불 타는 소리를 들으면서 깊은 잠에 빠지는 경우도 있는데 백색소음이 심신 이완을 유도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요즘 도시의 소음을 벗어나 빗소리나 장작불 소리로 지친 일상을 달래기 위한 우중 캠핑과 불멍 캠핑이 유행을 하고 있다. 텐트나 타프에 토닥토닥, 후드득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불멍을 하면서 느끼는 감성, 낭만, 힐링의 느낌은 재미있는 추억과 경험을 만들어 준다.

 


캠핑장에서 들리는 빗소리는 흡사 콩 볶는 소리처럼 입체 사운드를 만들어 낸다. 셀 수 없을 정도의 빗줄기의 군무가 가로등과 텐트의 전구 불빛에서 공연을 하는 것처럼 역동적이고 때로는 부드럽게 시선을 고정시킨다. 때론 내리는 빗소리와 장작불 소리,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자는 것은 어릴 때 느꼈던 우산 집에서의 추억을 소환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중 캠핑은 낭만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을 만들어내기도 하는데 특히 비가 올 때 텐트를 치워야 하거나 집으로 돌아가서 텐트를 말려는 등의 뒷일 수습을 할 때는 번거로울 수 밖에는 없다. 내 삶에서는 노천탕에서 맞던 비도 참 운치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비를 맞는 것보다는 창문이나 차창을 통해서 보거나 빗소리를 들을 때가 더 좋아지는 나이가 되었다.


비 오는 날 공원이나 수목원에 가면 평소와 달리 초록잎이 더욱 선명해지면서 새 옷으로 갈아입는 게 너무 좋다. 비는 어쩌면 산수화라는 그림에 선명함을 만들어내는 붓인지도 모르겠다. 단비는 초목을 갈증을 해소하고, 먼지로 더러워진 자신을 샤워하고, 바닥의 흙냄새를 더 북돋게 한다. 도심에 내리는 비는 청량한 빗소리로 회색빛 도시의 빈 공간을 채우는 충진재가 되기도 한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면 항상 파전과 막걸리가 생각난다. 아마 지글지글 파전 굽는 소리가 마치 비 오는 소리와 흡사해서 그럴 것이다. 시원한 빗소리에 한잔, 상쾌한 빗 내음에 한잔, 창밖의 빗방울을 보면서 한잔 마신다. 술이 달 때는 인생이 그만큼 쓰기 때문이란다.




이렇게 비라는 단어는 우리의 삶 속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비'는 물이며 생명의 원천임에도 소중한 공기처럼 항상 늘 가까이 있기 때문에 그 고마움을 깊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하지만 난 비를 좋아한다. 비의 생명을 불어넣는 음악을 좋아하고, 삶의 활력을 주는 빗소리의 리듬을 좋아한다.


늦가을비가 내리면 오랜만에 아내와 우중 데이트를 한번 해봐야겠다. 예전처럼 등에 업어서 가지는 않겠지만 가까운 빵집에서 흰 생크림빵을 아내에게 사주고 싶다. 예전처럼 좋아할지 모르겠다. 나만의 오십 대 감성이 등짝 스매싱으로 끝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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