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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낯설어지기 시작했다

#퇴직 후 일상 #걱정 인형 #휴식의 즐거움 #아내 #일상의 규칙과 루틴

by 미스틱

퇴직을 하게 되면 현역 시절 그토록 갈망했던 '여유 있는 삶', '저녁이 있는 삶'을 한껏 누리며 살 줄 알았다. 물론 처음엔 그랬다. 퇴직 초기 난 남들이 다 출근하는 바쁜 월요일. '이불 밖은 위험해'라며 보란 듯이 늦잠을 자기도 했다. 그리고 원하는 시간대에 일어나 내가 평소 좋아하던 운동(피트니스)을 하러 가기도 했다. 수시로 아내와 외출과 외식을 하면서 퇴직이 내게 선물해준 소소한 일상의 여유로움과 평온함을 온전하게 즐겼다.


하지만 '소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라고 28년간 이런 호사를 한 번도 맘껏 누리지 못했던 나의 고장 난 몸뚱아리와 생각은 '걱정 인형'처럼 나를 잠시도 가만 놔두지 않았다.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날수록 '정말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라는 몹쓸 생각이 잉크처럼 머릿속에 번지기 시작했다.

돌아보면 14년간 직장생활에서 리더 생활을 하면서 짧은 휴가를 제외하곤 한 번도 이렇게 쉬어본 적이 없었다. 쉬더라도 항상 업무에 대한 걱정과 근심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어떤 때는 주어진 휴가도 조기 반납하면서 신의성실(?)한 리더로서의 이미지를 만들기도 했다. '쉬는 게 쉬는 게 아니다'라는 말처럼 그냥 출근하는 게 오히려 맘이 더 편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럴 필요까진 없었는데 말이다.


인간이란 불완전한 존재는 참 희한하다. 현재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냥 맘껏 즐기면 되는데도 불구하고 항상 뭔가 모를 불안감과 걱정을 안고 살아간다. 어릴 때부터 발목에 쇠사슬이 묶여 그곳을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하는 서커스의 코끼리처럼 나 또한 직장생활에서 비롯된 학습된 무기력의 덫을 여전히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집에서 머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분명 내 집인데도 뭔가 낯선 느낌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물론 현역 시절 집에서 떨어져 타지에서 지낸 기간이 길었다 보니 그럴 수도 있을 거라 스스로 자위도 해봤지만 꼭 그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돌아보면 현역 시절 난 집보다는 직장과 사무실이 더 편했고, 가족들보다는 직장 구성원들과 더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집에서 쉴 때보다는 근무지 주변에 있거나 일을 할 때 오히려 더 맘이 편했던 것이다.


패잔병의 신분으로 퇴직 후 늘 꿈꾸던 '홈(home)'으로의 금의환향을 했지만 막상 집은 내가 없었던 오랜 기간 아내가 만들어놓은 '세상의 프레임'과 '시간의 흐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업무와 일 중심의 나와는 달리 관계 중심의 역할이 큰 아내는 자기만의 규칙과 질서로 가족들과의 관계를 구축해 놓고 있었다. 그런데 그 중간에 내가 다시 끼어들게 된 것이다.


고맙게도 아내는 행여 내가 자존감이 떨어질까, 부담감을 느낄까 노심초사하며 나를 배려하는 세심함을 보여주었다. 내가 먹고 싶어 하는 것을 항상 물어보고 챙겨주곤 했다. 삼식이가 된 나를 위해 삼시 세끼를 꼬박 잘 챙겨주는 것이 어쩌면 그녀가 내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배려이기도 했다.




하루 종일 아내와 함께 있다 보니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하루 일과를 관찰하게 되었다. 군대 간 아들, 대학생이 된 딸을 둔 아내는 이제 예전보다 몸과 마음이 많이 가벼워져 있었다. 아내는 식사시간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시간을 방 안에서 TV를 보거나 휴대폰을 보내면서 소일하고 있었다. 가끔은 TV를 보면서 낮잠을 자기도 했지만 밤에 자지 못할까 봐 금방 깨곤 했다.


점심을 먹고 난 후 15시쯤 되면 단지 내 피트니스 센터에 간다. 예전에는 운동을 극히 싫어했지만 최근에는 노화를 조금이라도 늦출 목적으로 다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예전보다는 혈색이 많이 좋아졌다. '집순이'인 아내의 성격상 10년 정도 이곳에 살았지만 만나는 이웃들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세상에서 제일 친한 여동생과 전화로 1~2시간 수다를 떤다. 그러면서 자세한 얘기는 만나서 하잖다. ^^; 보아하니 2~3주에 한번 정도는 오프라인 만남을 하는 것 같다. "만나면 뭐하냐"라고 물으니 윈도쇼핑이나 식사를 하면서 수다를 떠는 게 다라고 한다. 아내의 유일한 외출이기도 하다.


물론 나도 퇴직 후 나름 일상의 규칙과 루틴을 만들어 서재에서 공부도 하고, 글도 쓴다는 미명 하에 놀고 있기는 했지만 내가 봐도 아내는 소중한 시간을 너무 비효율적이고 비생산적으로 '킬링 타임(killing time)'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오랜 기간 없는 동안 아내는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구나'라고 생각을 하니 한편으로는 맘이 짠하기도 했다.



원래 예전에 내가 알고 아내는 누구보다도 활동력이 강하고 생활력이 강한 친구였다. 첫사랑 아내와 난 동갑내기 같은 학과 출신의 유명한 CC(Campus Couple)였다. 그 당시 파격적인 '커플 티'를 입고 다닐 정도였으니 말이다. 아내는 그래도 나름 유명한 지방 국립대 4년제 장학생으로 입학을 했다. 대학 4년 동안 까다롭다는 교직 이수도 했고, 과외도 틈틈이 하면서 부모님 도움 한번 안 받고 대학생활을 마무리했다.


졸업 후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아내는 남들보다 빠르게 취업을 하려고 대기업에 원서를 제출했지만 우수한 졸업성적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낙방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마음이 급하다 보니 잠시 동안만 학습지 방문교사를 하려고 했는데 그것이 아내의 처음이자 마지막 직업이 되고야 말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때 하던 일 때문에 맞벌이를 하지 않을 정도로 업무적인 스트레스가 컸다고 한다.


나와 결혼을 하자마자 아내는 그 일을 그만두었다. 난 더 다니길 원했지만 아내는 사회생활이 너무 힘들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아내는 전업주부로 살아오고 있다. 주변 동료들이 맞벌이를 하면서 나보다 빨리 새 아파트를 장만해 가는 모습들을 보며 한때 난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아내가 조금 원망스러웠다.


아이 둘을 낳고 기르던 아내에게 난 맞벌이 대신 자격증 취득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아내는 나의 억지스러운 요구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육아 상황에서도 묵묵하게 자격증 취득에 도전했다. '공부 머리'가 어느 정도 있던 아내는 책과 동영상 강의만 듣고 6개월 만에 고시만큼 힘들다는 '공인중개사' 자격을 취득했다. 그리고 이어서 '상담사' 자격증도 땄다.


더 놀라운 건 내가 따려고 준비해 놓은 노무사 관련 책들이 집에 있어 자격증 취득을 권했는데 불과 6개월 만에 1차 합격이라는 놀라운 소식을 내게 전했다. 혹시나 몰라 2차 공부를 했지만 어린 두 자녀를 함께 돌보는 것이 쉽지 않았는지 결국 눈물을 보이며 내게 "2차는 안 하면 안 되냐"며 울면서 말하던 모습에 난 아내의 편을 결국 들어주었다. 솔직히 그때 내가 조금만 강하게 밀고 나갔더라면 지금 난 편하게 퇴직 생활을 즐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ㅠㅠ


두 자녀가 어느 정도 성장을 한 후 나는 아내에게 공인중개소 알바라도 하라고 말했다. 아내도 외벌이인 내게 미안했는지 주변 중개소에서 3~4개월 정도 알바를 했다. 결국 아내는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고 내게 눈물로 호소를 했다. 한 달에 매매가 한건도 없으니 소정의 임금을 받던 아내의 속이 타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때 이후 난 아내에게 일을 시키는 것은 더 이상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지금까지 나름 성공적으로 직장생활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아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빠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두 자녀를 건강하게 지금까지 키워 온 것만 해도 어쩌면 아내에게 감사한 일일지도 모른다. 학원을 보내지 않고 고등학교 때까지 아이들과 함께 공부를 하면서 과외를 시켰는데도 안타깝게도 아이들은 우리가 기대했던 것만큼 공부를 잘 하진 못했다. 하지만 내가 볼 때 아내는 나름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아내는 늘 아이들을 위해 손수 만든 음식을 꼬박 챙겨 먹였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올 때면 늘 따뜻하게 맞이하면서 아이들과 소소한 대화도 나누고, 간식도 챙겨주었다. 내가 볼 때 아내는 엄마로서는 최고의 엄마였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아이들이 클 때 엄마가 항상 곁에 있는 것만큼 최고의 선물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집으로 다시 돌아온 후 아내가 만들어 놓은 질서가 조금씩 깨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아빠가 돌아와 아빠 역할을 하려고 하니 그게 어디 먹히겠는가? 아무리 아내가 나를 존중해주고 배려해줘도 난 낯선 집의 향기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여전히 '아웃사이더'였다.


'사람 고쳐서 쓰는 게 아니다'라는 옛 어른의 말씀이 있지만 그래도 난 고쳐 써야 할 시점이 된 것 같다. 가족들의 평온한 일상을 더 이상 방해하지 않기 위해 난 제일 먼저 일상의 규칙과 루틴을 만들기 시작했다. 직장생활처럼 출근하기 위해 나만의 서재 공간을 마련했다. 만약 서재가 없었다면 난 TV 보는 아내를 피해 거실로 나가거나 하니면 함께 TV를 봐야만 했을 것이다. 서재는 나의 가족 간의 일정의 거리와 경계를 만들어주는 나만의 아지트이기도 했다.


난 앞으로 나만의 역할과 정체성을 찾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할 것이다. 지금까진 삼식이 역할을 빼고 제대로 한 것이 없지만 가족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시나브로 변신을 꾀할 것이다. 요즘 인터넷에 보니 인기 음식의 레시피가 도처에 공개되어 있어 따라 하기만 하면 될 것 같다. 집안 청소와 설거지도 거들고, 함께 외식도 하면서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을 한층 강화할 예정이다.


날씨가 좀 더 따뜻해지면 가까운 곳으로 여행도 할 생각이다. 여행의 특성상 서로 간에 의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의존과 친밀감이 높아진다고 하니 말이다. 그리고 나와 가족들 간의 낯설고 이질적인 괴리(gap)를 메우기 위해 '신뢰와 감정의 계좌'를 더욱 쌓을 예정이다. 퇴직 후 난 여전히 '첫걸음마'를 배우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내가 없는 동안 자녀들을 건강하게 잘 키우고, 애 많이 쓴 아내에게 다시 한번 이 글을 통해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여보, 그간 고생 많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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